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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팽과 와트, 그리고 경제적 자유 

 

영국의 제임스 와트(1736~1819)는 증기기관을 발명했을 뿐 아니라 매슈 볼튼(1728~1809)과 함께 1775년에 주식회사를 공동설립해 증기기관을 널리 판매, 보급하면서 세계 최초의 산업혁명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들의 증기기관이 없었다면 영국이 산업혁명을 통해 세계 경제의 패권을 장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50 파운드 고액권 지폐 도안에 와트, 볼튼, 그리고 그들이 세운 회사를 담아 기념하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도 와트를 일상적으로 언급하며 사용하고 있다. 30W, 60W처럼 전구마다 표기되어 있는 W는 와트의 줄임말이다. 이는 1889년 영국과학진흥협회가 제임스 와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초 동안 소비하는 전력 에너지를 와트(W)로 표시하기로 정한 데서 비롯됐다.

사실을 따져보면 증기기관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제임스 와트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앞선 1679년에 프랑스 출신의 물리학자 드니 파팽(1647~1712)은 오늘날의 압력밥솥과 비슷한 원리의 증기찜통을 발명했다. 파팽은 이 기술을 피스톤 엔진에 적용해 1705년에 세계 최초의 증기선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독일의 풀다(Fulda)강을 따라 베저(Weser)강까지 항해를 시도했다. 당시 독점적 직역단체인 사공 길드 조합들은 파팽의 증기선 운항에 반발했다. 증기선이 사공의 일자리를 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국은 사공 조합원들이 배를 부수고 증기엔진을 조각조각 내는 바람에 파팽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파팽이 독일이 아니라 영국에서 증기엔진을 실험했다면 어땠을까? 창조적 파괴의 운명에 직면했을 때 이해당사자들은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여기에 위정자까지 국민 전체의 복지나 국가의 중장기 발전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소득을 위해서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는 기술 진보에 반대하거나 외면하면서 혁신의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17세기 전의 영국도 그랬다. 1589년, 영국의 발명가 윌리엄 리(1563~1614)는 양말을 짜느라 고생하는 어머니와 누이들을 보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양말을 쉽고 빠르게 짜는 편물기계를 발명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 1세를 찾아가 편물기계의 특허권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왕은 ‘가난한 백성의 일자리를 박탈하는 기계의 특허를 허가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낙담한 리는 프랑스로 건너가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으나 거기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영국에서 최초의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1688년 명예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예혁명의 의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경제적 자유의 법적 보장(liberty by law)’이다. 상공인을 비롯한 국민의 대표가 참여하는 의회에서 정한 법률이 아니면 국왕이라 해도 국민의 재산권을 비롯한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영국의 명예혁명은 국가 공권력이 국민의 재산권을 비롯한 경제적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게 ‘법치주의 또는 법의 지배(rule of law)’ 원칙을 천명한 사건이다. 법치주의는 ‘의법통치(rule by law)’와는 확연하게 다른 개념이다. 의법통치는 법 집행과 국민의 준법의무를 강조하고, 법치주의는 공권력을 견제해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에 방점이 있다.

리의 편직기계(1589)는 무위에 그친 반면, 와트의 증기기관(1769)이 성공했던 이유는 재산권과 경제적 자유를 보호하는 제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튼 와트의 발명으로 증기 에너지 기반의 기계화·공장화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특히 섬유산업은 획기적으로 변모, 발전했다. 영국의 섬유산업은 토마스 모어(1477~1535)가 그의 저서 [유토피아](1516)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 풍자할 만큼 양모 중심이었다.

지주계급이기도 한 양모업자들은 ‘사치방지법’을 통해 평민들의 면직물 착용을 금지하고 양모 소비를 강제하기도 했다. 그런 환경에서 면화, 린넨 중심의 섬유산업 발전은 뜻밖의 일처럼 보인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1736년 맨체스터 조례를 제정해서 면직물의 생산·유통·소비의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와트의 성공은 그의 기술 개발 역량이 출중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명예혁명과 맨체스터 조례 등으로 경제적 자유가 법률로 보장되지 않았다면 와트의 증기기관은 파팽의 증기선 운명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간단한 사례지만 위의 이야기들은 혁신, 그리고 경제 성장의 결정 요인으로 사람·기술·자본보다 경제적 자유가 가장 중요함을 웅변한다. 기업가정신이 혁신 성장의 중요한 원천이기는 하나 경제적 자유 없이 기업가정신은 자라지 못한다. 세상은 리, 파팽, 와트처럼 정부의 강제나 권유가 아니라도 새로운 기회를 찾아 더 나은 삶을 구현하려는 이들로 넘친다.

우리는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했음을 큰 자랑거리로 이야기한다. 1377년 직지심체요절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구텐베르크(1400~1468) 42줄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섰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계 최초 기술의 활용은 턱없이 미흡했다. 알 고어 미국 부통령이 1997년 베를린 G7 회담에서 말했듯이 ‘금속활자는 최초로 한국이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 문화사에 영향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였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가?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역사상 중대한 변곡점에 들어서 있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4D 프린팅, 빅데이터 등 과거에 상상도 못했던 기술이 기하급수 속도로 발전하면서 일자리, 산업 경쟁력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파급시키고 있다.

앞으로 세계 경제패권과 국가 경쟁력은 지금 시기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적응하고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과거 역사적 전례를 돌아볼 때 이러한 중대 변혁기에 경제적 자유를 허용하고 보호한 나라는 번영의 길로, 그렇지 않은 나라는 쇠퇴의 길로 운명을 달리 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경제적 자유의 신장 및 보호가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시기이다.

4차 산업혁명 준비 태세와 관련, 한국의 경제자유는 미흡한 부분이 많다. 2019년 1월 미국 헤리티지 재단에서 발표한 경제자유지수에서 한국은 186개국 중 29위, 2019년 9월에 캐나다 프레이저 연구소에서 평가한 자유 지수는 162개국 중 37위에 불과하다. 이마저 두 기관이 평가한 기준 시점은 2017년이라 지금과는 시차가 있다. 지난 2년 동안 진행된 문재인 정부의 국가 개입 정책을 추가 반영하면 현재 시점의 경제자유는 더 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국회가 발의한 규제입법 건수가 1200건에 이르고 정부가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15년 이후 가장 많았다는 사실도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끝으로 경제적 자유를 말하면 흔히들 기업 규제를 완화하자는 얘기냐 하는데, 영업 및 거래의 자유는 경제자유의 일부분일 뿐이다. 경제적 자유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국가 공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법치주의 확립이다.

- 황인학 한양대 특임교수(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1518호 (2020.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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