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조지선의 심리학 공간 | 양준일의 공간과 선택의 힘] 실패를 기회로 만드는 열쇠는 바로 나 

 

상황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따라... 삶의 아픔을 통과하는 모습 달라져

▎가수 양준일이 30년 전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팬들에게 소감을 얘기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양준일 신드롬? 그게 뭡니까?” 필자의 ‘아재’ 지인은 대체 이 사람이 누구길래 [이코노미스트] 같은 경제지마저 분석 기사를 싣는 것이냐고 물었다. 트렌드에 민감한 ‘아재들’ 중에서도 이 이름을 생소하게 느끼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데 양준일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다 버렸더니 남는 것은 ‘공간’이었다”는 그의 말은 곰곰이 숙고할 만하다. 가수 양준일의 공간과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랭클의 공간. 서로 맞닿아 있는 두 남자의 공간은 삶에 대한 태도와 존재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

30년 전 아이돌, 양준일에게 한국의 누리꾼들이 새로 붙여준 별명은 온라인탑골공원 GD(지드래곤)다. 1990년대 초, 몇 장의 앨범을 낸 그는 반짝 인기를 얻었지만 곧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며칠 전에 찍은 영상에 빈티지 필터를 끼운 것 같은 화면 속 그의 음악과 춤, 패션은 그 당시 대중에겐 이해 불가의 영역이었다. 영어 강사, 음식점 서빙 등의 일로 생계를 어렵게 유지하던 그가 JTBC 음악프로그램인 슈가맨을 통해 소환된 후 벌어진 일은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사건이다. 지난 1월 말 남자 광고모델 브랜드 평판 3위(한국기업평판연구소 분석)에 오른 그는 30대에서 70대까지 아우르는 여성 집단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제 1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스타 탄생 스토리가 이목을 끈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신드롬의 요체가 아니다. 현상의 핵심은 오랜 세월 외톨이 파란을 겪은 그 얼굴에 비친 역설적인 고요함이다. 양준일 팬덤의 최대 관심사는 그의 아이돌급 외모도, 여태껏 살아있는 춤 선도, 심지어 독특한 음악성도 아니다. 팬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그가 ‘삶의 아픔을 통과한 방식’이다. 이 궁금증이 그의 첫 책 [MAYBE 너와 나의 암호말]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이 사람, 대체 뭐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말과 행동이 가능할까?” 연예인 양준일이 아닌 인간 양준일에 대한 궁금증에 불을 붙이고 신드롬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단어가 바로 ‘공간’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빅토르 프랭클의 공간을 먼저 방문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서로 얼마나 다를까?” ‘공간’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질문은 없다. 큰 어려움이 닥치면 누구나 좌절하고 감사보다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홀대를 당하면 남녀노소 한가지로 위축되기 마련이다. 자기 살 길부터 챙기는 이기심은 또 어떠한가. 그래서 때론 이렇게 중얼거린다. “사람 다 똑같아. 거기서 거기야.”

그런데 모두 알듯이, 사람은 다 똑같지 않다. 사람이니까 비슷하지만 사람이니까 다르다.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서로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목격하고 기록한 인물이 있다. 로고테라피라는 정신 치료 분야를 개척한 오스트리아 출신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랭클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됐고, 가족을 모두 잃었다.

공간은 과거를 비우고 새로움으로 채우는 삶


▎빅토르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
오랜 시간 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 역에 도착한 프랭클은 삶과 죽음의 첫 관문을 통과한다. 기차에서 내린 유대인들은 남녀 각각 한 줄로 서서 한 명씩 친위대 장교의 앞을 지나가야 했는데, 장교는 무심한 표정으로 한 사람씩 훑어보고는 손가락으로 오른쪽 혹은 왼쪽을 가리켰다. 오른쪽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은 프랭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 손가락 방향의 의미를 깨달았다. 사형 판결이었다. 그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90퍼센트의 사람들은 역에서 바로 화장터로 직행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는 수용소. 프랭클은 이곳에서 두 종류의 인간을 보게 된다. 하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삶을 놓아버린 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존재의 의미를 잃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수용소에서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질문은 하나였다. “대체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인생은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자유를 찾은 후 그가 쓴 책이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다.

가장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즉,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빼앗아갈 수 없다.’

굶주림과 추위, 죽음의 공포, 모멸감과 수치심에 시달리는 일상. 모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채 가족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이런 고통을 실제에 가깝게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치가 한 인간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었던 단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준 것은 다음 구절이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우리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의 반응 속에 성장과 자유가 있다.’

가수 양준일이 지난해 12월 25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공간’을 언급했을 때, 프랭클의 공간이 떠올랐다. (“우리가 못 본 동안 어떤 삶을 살았나?”라는 앵커의 질문에) “제 머리 속의 쓰레기를 많이 버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의 과거가 곧 나의 미래로 이어질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싶었어요. 내 머리에 가득 차 있는 내 자신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 위한 노력을 ‘생활’처럼 했어요.” (“다 버렸더니 남는 것은 무엇이었나?”는 질문에) “남은 것은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새로운 게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나의 과거로 채우지 않는 게 목적이었어요.”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 ‘공간’. 이 단어가 신드롬의 기폭제가 됐다. 대중은 댓글로 화답했다. “과거를 버리고 남은 게 뭐냐는 물음에 ‘공간’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버리면 비워둬야 하는데, 두려움에 자꾸 무언가를 채우려 했던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비워둔 이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공간은 자극과 나의 반응 사이에 존재한다. 자극은 이 공간을 통과해서 나에게 전달되고 나의 반응도 이 공간을 거쳐 밖으로 나간다. 이 공간의 생김새는 사람마다 다르다. 자신에 대한 편견,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머릿속을 채운 사람의 공간은 좁고 얄팍하다. 이 사람은 자극이 들어오는 순간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반면, 넓고 깊은 공간을 가진 사람은 공간에 머무르면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반응을 ‘선택’한다. 사람은 다 똑같지 않다.

고통을 피할 순 없어도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그래서 자극은 한 가지인데 반응은 가지각색이다. 이는 개인이 가진 선택의 힘을 의미한다. 끝까지 내 소유로 남을 마지막 자유는 ‘삶의 의미를 선택할 자유’다. 프랭클의 증언에 따르면 강제 수용소 상황에서도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원망하고 비난하며 남의 것을 빼앗는 선택도 있었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타인을 위로하며 자기 것을 나눠주는 선택도 있었다. 인간의 품격은 그가 처한 상황이 아닌, 반응을 선택하는 그의 힘에 달려있다.

양준일의 ‘공간’ 언급은 예상대로 ‘반응’ 언급으로 이어졌다. 지난 1월 29일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출연한 그가 대학입시에 실패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학생에게 건넨 조언을 들어보자.

반응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의 가치


▎양준일의 회고록 [양준일 MAYBE -너와 나의 암호말] / 사진:모비딕북스
“상황을 조절할 순 없지만, 상황에 반응할 수는 있어요. 실패를 바라보지 말고,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실패가 기회가 돼요. 이 상황에 숨겨져 있는 소중한 보석이 있어요. 저도 많이 떨어져봤어요. 대학에 떨어졌다는 것이 울어야 할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흔들리지 마세요. 인생은 공부도, 시험도 아니고 시험의 결과가 본인이 아니에요. 자신의 가치를 잊지 마세요. 실패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대학에 떨어지고 승진에 실패하고 계획이 좌초한 현실은 개인의 선택을 통해서 의미를 부여 받는다. 어떤 이의 공간에서는 눈물지을 일이 되고 다른 이의 공간에선 감사할 일이 된다. 현실은 내 소유가 아니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내 소유다. 실패를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도, 새로운 기회로 전환하는 것도 나의 선택이다.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 갇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이런 선택이 가능하다고 프랭클은 강조한다.

공간이 빈약한 사람은 실패의 결과와 자신의 가치를 구분하지 못한다. 학생은 시험 점수가, 회사원은 연봉이나 직급이, 가수는 음원 순위가 자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당면한 현실이 곧 자신이라고 믿는다. 남들의 평가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뿐, 선택의 권리는 포기한 상태다. 현실은 그저 ‘자극’일뿐 내가 아니다.

공간에서 반응을 선택하는 과정은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즉각적 반응이 아닌 선택하는 삶을 지속한 사람은 평온하고 따뜻하며 진솔하다. 이것이 많은 팬들이 양준일의 맑은 표정에서 감지했던 덕목이 아닐까? “내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늘 커다란 의문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 말에서 추측하건대, 그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믿은 것 같다. 의미를 찾은 사람은 상황을 견디는 힘을 얻는다. 거친 세월을 견디고 맑게 돌아온 그를 보면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철학자 니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코로나19가 활개치는 난국의 가운데를 통과하는 중이다. 사업장과 가정에서 개개인이 어떤 어려움을 맞닥뜨린 상태인지 다 헤아리기 어렵다. 이 위기의 해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환란이 찾아왔을 때,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자극에 그저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순간에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었고 자동반응(Reaction)이 아닌 응답(Response)을 통해 시련의 길을 헤쳐 나왔다. 프랭클의 공간과 양준일의 공간, 그리고 나의 공간. 나는 이 공간에서 오늘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필자는 연세대 객원 교수, 심리과학 이노베이션 연구소 전문연구원이다.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을, 연세대에서 심리학(학사·박사)을 공부했다. SK텔레콤 매니저,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넷스케이프(Netscape) QA 엔지니어를 역임했다. 연세대에서 사회와 인간 행동을 강의하고 유튜브 한입심리학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1525호 (2020.03.16)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