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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19) 미·중 관계정상화] 적에게 손 내밀 땐 ‘화해’ 시그널 먼저 

 

첨예한 입장 차 봉합한 대표 담판… 현재 생각 인정, 미래 합의 모색 돋보여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72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는 모습 . /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1971년 7월 9일 오전 3시 30분, 파키스탄을 방문 중이던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가 숙소를 빠져 나왔다. 배탈이 났다며 기자들을 따돌린 바로 다음날 새벽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는 파키스탄 외무장관이 직접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키신저가 극비리에 향한 곳은 중국 베이징.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미·중 관계정상화의 시작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과 중국의 고위 당국자가 만날 거라는 예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 세 사람이 모여 2차 세계대전의 방향과 전후 처리를 논의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은 오랫동안 중화민국(대만)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이는 장제스가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후 대만으로 탈출한 뒤에도 계속됐는데 1954년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이 대만에 주둔하기도 했다. 더구나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에서 격렬하게 맞서 싸운 ‘적국(敵國)’으로, 미국은 중국을 정식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가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의 악수를 공개적으로 거부한 것은 두 나라의 냉랭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미국이 도대체 왜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양극(兩極) 냉전체제 아래서 경쟁을 벌이고 있던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공산주의 진영에서 소련 다음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소련과 사이가 좋지 않던 중국을 통해 공산진영을 분열시키려 한 것이다. 다극체제가 세력 균형에 도움이 된다는 전략적 판단도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출구전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베트남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국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적국과 속마음 주고 받은 핑퐁 외교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1972년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는 모습. /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중국도 미국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68년 소련은 체코를 침공해 ‘프라하의 봄’을 진압했다. 그러면서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 필요 시(공산주의가 위협받을 때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소련 마음대로라는 의미다)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음을 천명한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했는데, 중국은 이를 자국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1969년에 이르러서는 전바오섬, 신장 위구르 자치구 등지에서 소련과 국경 충돌이 이어졌다. 소련의 군사 공격에 대비해 대규모 동원령을 내릴 정도로 중국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따라서 미국과 손을 잡음으로써 소련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양국의 협상은 쉽지 않았다. 적대한 세월이 워낙 오래됐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었다. 둘을 연결시켜 줄 대화채널조차 마땅치 않았다. 이에 미국과 중국은 먼저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는 시그널을 서로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1970년 7월 중국은 간첩 혐의로 억류하고 있던 미국인 목사를 석방하고,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을 다룬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를 초청했다. 마오쩌둥은 스노를 통해 미국인의 중국 방문을 허용할 것이며,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을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닉슨도 [TIME]과 가진 인터뷰에서 “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에 가는 것이다. 내가 어렵더라도 우리 아이들은 갈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 1971년 3월에는 미국인의 중국 여행을 허용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던 미국 선수단이 중국 선수단의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핑퐁 외교’다. 미국 선수단 20여 명의 일주일간에 걸친 방문은 미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을, 중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됐다. 서두에서 소개한 키신저의 중국행은 바로 이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튼 중국에 도착한 키신저는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연달아 회담을 갖고, 미·중 관계 개선을 위한 쟁점들에 관해 논의했다. 1972년 2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는 데에도 합의한다. 이 소식이 공식발표 되자 세계는 크게 들떴다. 냉전의 긴장을 녹여 줄 평화의 훈풍이 불어오고 있다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키신저는 같은 해 10월 20일에는 중국을 공개적으로 방문해 실무 협의를 진행했는데, 10월 25일 미국의 협조 아래 중국이 UN에 가입하고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차지한다.(대만 추방 결의안이 통과되기 직전 대만은 자진 탈퇴를 선언했다.) 뉴욕에 UN 중국 대표부도 설치되었다. 공식적인 대화채널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양국 사이에는 매우 민감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대만’이다. 중국은 미국이 대만은 중국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대만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철수하길 원했다. 미국 또한 국익을 위해 대만을 버릴 각오가 돼있었지만(실제로도 그랬고), 그렇다고 중국의 요구를 곧바로 수용한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함께 싸운 동맹국을 배신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제 여론의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모두 어떻게든 관계 개선을 이뤄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양국이 선택한 방식은 조금씩 양보하는 가운데 서로의 주장을 병기(倂記)하는 것이었다.

자국 이익 위해 전쟁 혈맹도 저버린 협약

양국의 합의문인 ‘상하이 코뮈니케(Shanghai Communiqué)’에 중국은 대만을 중국의 한 성(省)이라고 적었고, 미국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중국인은 모두, 중국은 하나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간주하는 것을 인지한다’라고 적었다. 당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잘 알겠고, (내 생각은 어찌됐건 간에) 그를 존중하겠다는 의미다. 첨예하게 이견이 갈려 합의가 어려울 때 이를 봉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1972년 2월 예정대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큰 환영을 받았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미국 내 정치적 혼란 때문에 한동안 미뤄지긴 했지만, 1979년 양국은 공식으로 수교를 맺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 과정은 간극이 큰 당사자들이 담판을 벌일 때 필요한 요소들을 잘 보여준다. 신뢰가 없고 감정이 나쁜 상황에서 갑자기 만나자고 하고, 이제부터 잘 지내보자고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꾸준히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조금씩 서로를 향해 움직이면서 상대방에게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생각의 차이를 억지로 좁히려 드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다. 현재의 생각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미래의 합의를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과 중국은 이런 과정을 거친 덕분에 오랜 적대관계를 매끄럽게 청산하고 수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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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호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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