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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선의 심리학 공간] ‘봉테일’의 정수(精髓)는 공감 능력 

 

방송국 막내 스태프의 노고 위로한 거장… 연출능력과 균형·조화 이뤄

▎지난 2월 16일 봉준호 감독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직후 기자단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 지나간 봉준호 감독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왠 뒷북이냐고 한소리 들을 테지만 못다 한 봉 감독 이야기가 있다. 돌아보면 지난 2월 오스카상 덕분에 기대와 환희, 여운을 차례로 느끼며 설레는 시간을 보냈다. 촌스럽다고 핀잔하거나, ‘국뽕’에 취했냐는 비아냥거려도 할 수 없다. ‘봉 하이브! 미친 해외 반응!’ ‘거장의 한마디에 세계가 열광.’ 이런 얘기를 들으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장면은 서너 번쯤 돌려봤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봉준호가 상을 받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다. 실제적 이득이 손톱만큼도 없는데 남이 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내가 흥분할 이유가 무엇인가. 봉 감독을 대놓고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슬쩍 민망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봉 감독의 모교인(필자의 모교이기도 한) 연세대는 교정 곳곳에 ‘동문 봉준호 감독 아카데미상 수상 축하’ 플래카드를 걸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플래카드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봉 감독은 학교가 이러고 있는 걸 알기나 할까?”

그런데 이런 논리적 자각과는 별개로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촌스럽긴 해도 모교의 ‘자랑질’을 탓하고 싶지 않다. 우리 딸, 아들이 가요제 대상을 받았다고, 명문 대학에 합격했다고 마을 어귀에, 집 담벼락에 대문짝만한 현수막을 거는 부모를 누가 탓할 수 있는가. 봉 감독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마치 제 일처럼 아카데미 경사를 기뻐하는 것은 국뽕 부작용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심리적 과정이다. 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는 이 현상을 ‘반사된 영광 누리기(Basking in Reflected Glory)’로 설명했다. 우리의 감독, 봉준호의 영광은 곧 나의 영광이다.

못다 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작정하고 ‘반사된 영광’을 누려보자. 한국 최초로 오스카상을 받은 우리나라 감독에게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기대하는 심리적 역량이 있다. 이미 검증된 디렉팅 역량에 준하는 ‘사람됨’이다. 능력뿐 아니라 봉준호의 내면도 ‘진짜배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그의 금의환향 순간이었다. 지난 2월 16일 귀국한 그가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짧은 소감을 밝혔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필자는 적잖이 놀랐다. ‘아, 이 사람! 이런 사람이었구나!’ 한 인간의 내면이 쉬익 드러나는 결정적인 장면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작년 5월 칸부터 여러 차례 수고스럽게 해드려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미국에서 긴 일정이었는데 홀가분하게 마무리돼서 이제 조용히 본업인 창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쁜 마음입니다. 아까 박수도 쳐 주셨는데 감사하고 오히려 코로나바이러스를 훌륭하게 극복하고 계신 국민들께 박수를 쳐드리고 싶습니다.”

말의 내용도 훈훈하지만 ‘결정적’ 장면은 마지막 찰나였다. 귀국 소감을 밝힌 후 자리를 뜨기 직전 봉 감독은 젊은 스태프의 어깨를 두 번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팔 아프겠어요.” 통상, 인터뷰에는 무선 마이크 다발이 등장한다. 봉 감독이 발언을 이어가는 동안 무릎을 꿇고 마이크 묶음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벌 서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던 젊은 친구에게 세계적 거장이 나지막하게 인사를 건넨 것이다. 오스카상 수상 때도 없었던 후광이 봉 감독의 독특한 헤어스타일 위로 펼쳐지는 듯했다. 아카데미급 매너라서가 아니다. 심리학 관점에서 봤을 때, 그 상황에서 봉 감독이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고 돌아왔다. “내가 손가락 하나를 까닥하면 할리우드 스타들도 한걸음에 달려올 걸.” 이것이 봉준호의 속내인들 어떤가. 상당히 현실적인 판단이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플래시로 꽉 채워진 45일 간의 북미 캠페인. 그 여정의 끝에서 금의환향의 상징인 수백 대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권력의 정점에 있는 순간에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친구, 팔이 아프겠는 걸.”

권력이 없는 필자에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인사다. 그러나 프랑스 칸에서 시작돼 멈추지 않는 박수와 칭송이 일상이 되어버린 봉 감독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권력자가 되면 사람이 변할까? 변한다. 나는 아니라고? 미안하지만 권력을 얻으면 나도 변한다.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의 심리적 체계는 확연히 구분된다. 심리학자 대커 켈트너에 따르면 권력의 부작용 중 하나가 자기중심성(self-focus), 즉 공감 능력의 상실이다. 공감의 기초가 되는 신경 네트워크인 거울 뉴런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젊은 스태프가 마이크 다발을 치켜들고 있을 때 이를 보기만 해도 내가 팔이 아픈 것처럼 느끼는 것은 거울 뉴런이 환하게 불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타인의 행동과 마음 상태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공감의 기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권력자가 되면 거울 뉴런이 어두워진다. 타인의 아픔에 무감해진다. ‘갑질’ 논란을 일으키는 권력자들을 보며 종종 이런 의문이 든다. “저 사람들, 혹시 어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잘못된 데가 있다면 아마 거울 뉴런일 것이다.

권력 얻을수록 ‘거울 뉴런’ 닦아야

신예 감독 시절부터 예민하게 빛났던 그의 거울 뉴런은 권력의 정점에서 손상을 입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다. 그의 마음에 수직적 구조의 밑단에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다. 아파하는 사람을 모른 척 하지 않는 그의 공감 능력은 사실 감독으로서 그의 초기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흥행에 참패한 상황에서 ‘살인의 추억’을 준비하던 봉 감독이 인기 배우 송강호를 캐스팅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송강호가 첫 번째 영화를 말아먹은 초짜 감독을 선택한 이유는 널리 알려진 대로 무명시절 송 배우가 ‘모텔 선인장’의 오디션에 탈락했을 때, 당시 조감독이던 봉준호가 삐삐에 남긴 위로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이번 작품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좋은 기회에 다시 뵙고 싶다며, 예의바르고 진심어린 메시지를 길게 남겨놓은 거예요.” 오디션 결과조차 통보해주지 않던 시절, 무시를 견뎌온 무명배우는 이 사건을 잊지 못했다.

놀라운 연출 능력과 탁월한 공감 능력, 이 두 역량의 균형과 조화. 봉준호의 차기작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컴퓨터가 인간의 전문성을 대체할 4차산업혁명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감 리더십이다.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장면도 ‘팔 아프겠어요’ 장면만큼 마음을 울리진 못했다. 가장 작은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도 마음을 나눠주는 능력, 이것이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의 정수(精髓)다.

- 조지선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심리과학 이노베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 필자는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을, 연세대에서 심리학(박사·학사)을 전공했다. SK텔레콤 매니저,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아메리카 온라인(AOL) 수석 QA 엔지니어, 넷스케이프(Netscape) QA 엔지니어를 역임했다. 연세대에서 사회와 인간행동을 강의하고 유튜브 ‘한입심리학’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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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9호 (202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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