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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국 핀테크 고도화 경쟁] 빠르게 뿌리 내리는 핀테크로 ‘현금 없는 사회’ 

 

규제 풀고 클러스터 조성해 활성화 유도… 화폐 분리로 IT 플랫폼 독립국 가능성도

▎중국 시내의 한 지하철 개찰구다. 중국은 대중교통과 소매점 곳곳에 QR코드 리더기가 설치돼 손쉽게 페이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신용카드는 부자를 위한 것이고, 모바일 결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2019년 1월 24일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모바일 결제가 다른 결제 수단보다 우월하며, 당위적 우위에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실제 중국에서 모바일 결제가 신용카드 결제를 제압함으로써 이를 증명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마윈의 말마따나 실제 중국은 QR코드의 나라다. 스마트폰 인증과 같은 보안 수단임은 물론이고 페이서비스 등 여러 지급·결제에 사용된다. 편의점·자판기·공유자전거, 심지어 노점상들까지 QR코드 단말을 갖고 있다. 중국의 모바일 결제 규모는 9300조원(2017년 기준)으로 전체 거래의 60%나 차지했다. 독일 국내총생산(GDP)의 2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미 중국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소매 거래가 모바일 페이서비스에 락인(Lock-in) 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동남아시아의 1위 승차공유 업체 ‘그랩’은 지난해 말 싱가포르에 인터넷은행을 설립했다. 그랩이 말레이시아·필리핀 등 동남아 8개국에서 얻는 많은 양의 결제는 그랩페이를 통해 이뤄지고 있고, 축적된 자본과 데이터는 신용관리·대출·보험 등 금융 서비스로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랩의 은행업 진출은 당연한 수순이라는 관측이 일찌감치 제기됐다. 그랩은 승차공유를 넘어 핀테크까지 아우르는 온·오프라인 플랫폼 유니콘으로 거듭난 셈이다.

세계적으로 핀테크 조류가 신속하고 거칠게 흘러가고 있다. 플랫폼으로 발전한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이 e커머스·배달·음악·영화 등 다양한 콘텐트에 자신의 페이서비스를 심어 사용자를 늘려가고 있다. 이들 사용자를 대상으로 투자·보험·대출 등 서비스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간결한 유저인터페이스(UI)와 함께 지문인식·QR코드 등 새로운 형태의 보안·인증 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과거 데이터와 업무 관행, 거래 방식을 중시하던 기존 상업은행들은 경쟁과 진화에서 밀리는 모양새다. 이에 핀테크 도입에 지지부진하던 뉴욕과 런던·홍콩·싱가포르 등 국제 금융 중심지에서도 핀테크 기업 투자를 늘리는 한편, 새로운 시스템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미 FDIC, 핀테크 기업에 첫 ‘은행 면허’ 부여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3월 18일 모바일 결제 및 금융회사 ‘스퀘어(Square)’에 은행 업무 면허를 부여했다. 스퀘어가 은행업 면허를 신청한 지 4년 만이다. 미국의 핀테크 기업이 은행업 면허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총자산 규모가 작고, 대출채권을 투자자에게 매각하는 형태로 제한되지만 엄연한 은행 면허다. FDIC가 핀테크 혁신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온라인 기반 은행 등 핀테크의 필요성도 주목받고 있다. 미국의 페이 기업들은 소매점 결제에 대해 일부 수수료를 받는 한편, 재고 관리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국 정부는 3500억 달러(약 430조원) 규모의 중소기업 대출 지원에 나서기로 하면서, 페이팔·스퀘어 등 비대면·간편 결제 서비스 수요가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에 비해 JP모건·씨티그룹 등 기존 금융 대기업들은 경기 악화로 대출 회수에 어려움이 생기며 대손충당금 증액 등 실적 악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현금과 신용카드 사용이 보편화한 미국에서는 그간 페이 등 핀테크 기업이 자리를 잡지 못했으나, 앞으로 입지가 확대될 수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소비자의 요구를 파악하면서 수익의 균형을 맞추는 데 고삐를 좨야 한다”며 “코로나19로 핀테크 기업 없이는 미국 금융이 성립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됐다. (핀테크가) 미래 금융을 선점할 가능성이 크다”는 월가 관계자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경제학적으로도 이런 핀테크 도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미국 재무부장관을 역임한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2013년 국제통화기금(IMF) 연설에서 중앙은행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저금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진단한 바 있다. 인구 증가 속도의 둔화와 저성장, 투자성향의 감소, 저금리로 저축이 늘어나고 자연이자율이 떨어질 것이란 설명이다. 이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제자 앨빈 한센 하버드대 교수의 구조적 장기침체이론에서 비롯된 분석이다. 구조화된 경기침체와 노동력의 감소는 현재 일손 부족에 시달리는 일본처럼 경제체제의 심각한 위기를 부른다. 이는 곧 거래 방식을 간소화·효율화할 수 있는 신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자극한다. 새로운 정보통신기술과 비즈니스모델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에 주요국들은 규제개혁을 통해 이런 전환을 가로막는 허들을 제거하고 있다. 미국은 아직 사용자들이 전통적 금융시스템에 길들어 있지만, 그간 규제개혁과 막대한 투자로 산업의 성숙도는 높다. 페이팔·애플페이 등을 통한 모바일 간편결제 시스템이 구축돼 있고, 찰스슈왑 등은 로보어드바이저 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자랑한다. 미국은 금산분리, 일반인의 크라우드펀딩 금지 등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금융 규제를 가진 나라다. 다만 핀테크에서는 규제의 비용편익분석 등을 통해 비합리적 규제를 완화하고 있고, 규정상 금지하지 않은 비즈니스라면 허용하고 있다. 열린 규제 환경에 투자도 활발하다. 피치북에 따르면 2018년 미국 핀테크 기업 투자액은 같은 해 중국과 영국을 합한 것과 비슷한 500억 달러(약 61조원)에 달했다.

중국 역시 핀테크 규제가 희박하다. 중국 정부는 탈세 등 지하경제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스마트폰 보급률 상승과 더불어 페이서비스의 확대를 유도했다. 정부는 시장 간섭을 최소화함으로써 알리바바 등 사업주들이 자유롭게 생태계를 넓힐 수 있도록 도왔다. 중국 인민은행은 안정적 지급결제망 구축을 위해 리스크 예방, 채널 다변화, 관리·감독, 생태계 개선 등 관리 능력 강화에 정책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영국도 금융행위감독청(FCA)을 중심으로 2014년 일찌감치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했다. 더불어 핀테크 전략 분야 발굴, 기술 표준을 잡기 위한 해외 기업과의 협력 강화, 소규모 핀테크 기업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공동 플랫폼 개발 등에 나서고 있다. 또 영국의 금융 중심지 카나리 워프에 유럽 최대 핀테크 클러스터 ‘레벨 39’를 조성해 HSBC·바클레이즈 등 대형 금융회사와 핀테크 스타트업 간에 협업을 지원하고 있다.

신흥국 “탈세·금융소외 막자” 금융 규제에 철퇴


몸이 가볍거나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자리하지 못한 신흥국들은 선진국보다 공격적으로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싱가포르통화청(MAS)은 가상은행 면허 5건을 발급한 상태며, 2021년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나선다. 또 새로운 금융서비스의 빠른 테스트 및 도입을 위해 샌드박스 익스프레스 제도를 2016년부터 운영했다. 새로운 금융 서비스 승인 과정을 21일로 줄여 혁신 기업의 등장을 촉진하고 있다. 베트남도 2016년 비현금 결제 시스템 구축 계획을 밝히고, 국민의 비현금 결제를 장려하고 있다. 이를 위한 결제시스템과 사용자 보호를 위한 효과적 메커니즘 개발에 나서는 한편 부정부패와 금융 관련 범죄를 방지할 계획이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은 보고서에서 “정보보호 규제는 모호한 표현과 조항이 많고, 복잡한 솔루션으로 사용자 경험을 저해할 수 있다”며 “정보보호를 위한 과도한 프로그램은 서비스와 애플리케이션에 악재로 작용해 전체적 산업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핀테크가 발전하면 앞으로 화폐 자체가 전자화될 거란 관측도 나온다. 온라인 경제 생태계 확산과 세계화 가속, 핀테크 기술의 침투가 깊어지면 앞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가 화폐가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1년 매출이 한 나라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거대 기업이 많은 파트너를 확보해 글로벌 시장에서 페이 서비스를 도입해, 독자적 경제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 페이스북이 준비 중인 암호화폐 ‘리브라’가 대표적이다. 구글·애플·아마존 등도 잠재 후보로 거론된다. 실제 국내에도 카카오페이·네이버페이 등 여러 서비스를 동시에 이용하거나 자동결제를 연동해 놓는 사용자가 늘고 있다.

다만 이런 시나리오는 국가의 화폐발행권에 도전하는 행위라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을 수도 있다. 리브라도 페이팔·비자·마스터카드·스트라이프 등 강력한 파트너사를 확보했지만, 미국 정부의 반발에 부딪히며 현재 다수의 파트너사가 이탈한 상태다.

이런 가운데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들도 암호화폐 등 전자화된 화폐 발행에 욕심을 드러내고 있다.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면 화폐의 시뇨리지(주조차익)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고, 화폐의 유통 경로를 탐색함으로써 통화 정책을 극대화할 수 있어서다.

이에 중국 인민은행은 이르면 올 상반기 중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내놓는다. 선전과 쑤저우에서 시범 운용하며,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가 아닌 디지털 통화다. 텐센트·알리바바 등 공룡 IT 기업들을 사업자에 넣어 실제 유통을 활성화할 계획이다. 이런 조치는 중국이 미국의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낳는다.

한편 한국은행도 CBDC 발행을 검토 중이다. 블록체인 방식 도입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화폐 거래와 관련한 정보의 무결성을 확보하는 측면에서 유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1532호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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