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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영의 팝콘 심리학] 코로나19로 본 ‘신뢰 대 불신’의 첫 단추 

 

방역망 도피·저항은 ‘뒤집힌 세계관’ 탓… 사실(fact)은 증명 전담인 과학에 맡겨야

▎8월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역 앞 동화면세점 앞에 보수단체 집회가 열렸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Erikson)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처음 직면하는 질문이 신뢰 vs 불신(trust vs mistrust)의 문제라고 봤다. 여기서 신뢰는 단순히 누구를 믿을까 말까의 문제를 넘어서 어떤 세계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를 발견하느냐의 문제다.

우리가 어떤 기기를 처음 조작하던 때를 생각해보자. 어떤 버튼을 눌러봤는데 내가 예상한 것과 완전히 달리 작동하면 당황스럽고 좌절한다. 그런 일이 자꾸 벌어지면 사용자들은 아예 그 기기를 포기한다. “저건 나랑 안 맞아” “속 터져서 쓸 수가 없네” 등의 평가가 뒤따른다. 반면에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의 의도대로 작동하는 버튼을 발견하면 안도감과 기쁨을 느낀다. 용기를 얻은 사용자는 이제 그 ‘확실한’ 버튼을 발판으로 나머지 버튼의 기능들을 탐색해간다. 그러다가 실패를 해서 풀이 죽으면 처음의 그 버튼으로 되돌아와 그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이거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어!” 스스로를 다독이며 새로운 탐색을 준비한다.

갓난아기에게 세상은 수많은 버튼으로 가득한 기기와 마찬가지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아기에게 이건 생존의 문제라는 점이다. 아기가 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적절히 영양분을 공급받고 청결과 위생을 유지하고 적절한 온도와 충분한 수면, 안전을 보장받는 등이 그것이다. 아이는 이를 세상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해 여러 버튼들을 눌러본다. 눈에 보이는 온갖 상대에게 울어도 보고 웃어도 보고 버둥거리는 거다.

생각대로 안 될 때면 불신의 경험이 생긴다. 여기서 불신이란 “믿지 못해” 보다는 “내가 틀렸네” 혹은 “이 버튼의 기능은 아직 뭔지 모르지만 내가 기대한 그건 아니야” 정도에 가깝다. 그러다가 필요한 것을 만족스럽게 제공받았을 때 아이는 세상을 작동시키는 원리 하나를 발견한다. 그것이 ‘신뢰’다. 당연히 신뢰의 첫 번째 대상은 양육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양육자도 늘 믿을 수는 없다. 자리에 없거나, 바쁘거나, 초보양육자라는 등등의 이유로 아기의 요구에 제때 응하지 못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신뢰와 불신의 체계는 계속 수정 보완된다.

잘못된 신뢰의 결과는 ‘공동체의 가해자’

신뢰와 불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뭐가 틀렸는지를 알아야 뭐가 맞는지 변별할 수 있다. 이 세상 모두를 신뢰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뢰가 뭔지도 모르는 셈이다. 어쨌든 이 신뢰 대 불신은 우리가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딛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발판, 세상을 이해하는 첫 단추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믿음의 뿌리를 두는 대표 영역이 과학과 종교다. 그런데 과학과 종교는 신뢰와 불신을 결정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과학은 신뢰의 조건만이 아니라 불신의 조건도 명시한다. 모든 과학 연구는 특정한 결과가 나오면 연구자의 가설이 틀리고, 다른 결과가 나오면 맞는 것이라고 미리 정해놓고 시작한다. 신뢰와 불신을 명확히 가리지 않으면 그 다음단계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렇지 않다. 종교적 믿음은 검증이 불가능하다. 신의 존재 혹은 부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라. 어떤 사건이든 그것이 신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신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증거를 보고 스승의 부활을 믿을지 말지 결정하겠다던 예수의 제자 도마는 종교인이 아니라 과학자의 자세를 가졌던 셈이다.

이렇게 신뢰와 불신을 결정하는 원칙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과학과 종교의 담당 영역은 구별된다. 개인의 자유인 태도나 가치관은 증명과 무관한 종교의 영역이었다. 종교는 이 영역에서 공동체의 번영과 안녕에 큰 기여를 해 왔다. 특히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 한다”는 태도는 많은 이들을 어둠에서 구해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자선과 봉사활동의 많은 부분은 헌신적인 종교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반면에 사실(fact)은 증명 전담인 과학의 영역이다. 일정한 조건을 통해 증명이 된 다음엔 모두가 인정을 해야 소통이나 합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은 사실을 확인하는 모든 곳에 필요하다.

문제는 종교가 과학의 영역까지 끼어들 때다. 예를 들어, 정부의 정책이나 철학을 싫어하거나 비판하는 건 종교가 개입할 수 있는 가치관이나 태도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 정부가 북한(혹은 중국)에 나라를 갖다 바치려 한다거나, 지난 번 총선 혹은 그 전의 대선은 모두 북한(혹은 중국)에 의해 조작되었다거나,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특정 종교를 탄압하고 제거하려 드는데 왜냐하면 그 종교야 말로 이 나라의 적화통일을 막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라거나, 우리 목사님이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은 모두 신의 계시 덕분이라는 식의 논리는 검증의 대상인 사실을 검증 불가능한 종교적 명제로 바꾼다.

신뢰와 불신의 첫 단추를 이렇게 끼우면 그 다음이 문제다. 불신해야 할 대상을 신뢰하니 신뢰해야 할 것들을 오히려 못 믿고 신뢰와 불신의 체계가 완전히 거꾸로 뒤집힌다. 그러면 남들과 공유하는 사실이 없으니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다음으로 소통을 통해 유지되어 온 관계들이 망가지며, 결국 사회와 공동체가 타격을 받는다. 공동체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공동체의 가해자가 된다. 우리는 지금 그런 잘못된 신뢰의 결과를 체험하는 중이다.

대다수의 상식에서 벗어난 특정 교회의 행동

한동안 아슬아슬한 통제의 영역에 있던 코로나19가 다시 위험 수준으로 커지고 있다. 물론 근본적인 이유는 무증상 감염자다. 정부가 경제활동을 활성화하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소위 말하는 ‘깜깜이 감염’이 늘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에도 시작은 그런 깜깜이 감염이었다. 하지만 이를 대확산으로 키우는데 가장 많이 기여(?)한 곳은 다들 아시듯 특정 교회다. 놀라운 건 그 교회 구성원들의 행동이 대다수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점이다. 근원은 신뢰 대 불신의 첫 단추에 있다.

그냥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가진 종교인이라면 방역당국에는 당연히 협조할 것이다. 정부는 미워도 방역수칙을 따르는 게 공동체와 이웃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 테니까. 하지만 뒤집힌 세계관을 가진 종교인들은 ‘정부가 해당교회에 바이러스를 뿌렸다’거나, ‘현재 바이러스 검사는 종교탄압의 목적으로 모두 조작 된다’는 주장을 ‘사실’로 믿는다. 이들은 당연히 정부의 방역망으로부터 도피하고 저항하며 우리 사회를 더 큰 위험에 빠트린다.

우리만 이 꼴은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이 될까. 미국에서는 각종 코로나19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방역수칙에 저항하면서 매일 수만 명대 확진자를 배출하고 있고, 유럽에서는 난데없이 5G 통신 중계기가 코로나19 바이러스 증상의 원인이라고 믿는 이들이 중계기를 파괴하는 중이다. 이들도 어린아이 시절에는 틀린 버튼이 뭔지 감별할 수 있었을 텐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 필자는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석사를, 온라인게임 유저 한·일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험인간], [심리학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등을 썼고 [심리원리],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1550호 (20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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