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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호적수(5) ‘모범생’ 의상과 ‘아웃사이더’ 원효] 그들의 경쟁은 ‘배척’ 아닌 ‘보완’ 이었다 

 

가는 길 달랐지만 존중 속에서 불교이론 심화, 민중종교 이룬 고승들

▎의상대사 영정과 원효대사 영정
한국 불교가 수많은 고승을 배출했지만 학문의 깊이나 수행의 수준, 후대에 끼친 영향 면에서 모두 압도적이었던 인물은 원효, 의상, 지눌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이 중에서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은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절친한 선후배이자 벗이었고,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경쟁자였다.

기록에 따르면 원효와 의상은 보덕 화상의 문하에서 [열반경]과 [유마경]을 공부했다. 그리고는 650년, 육로를 통해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나섰다. 목적은 서로 달랐는데 의상은 화엄(華嚴)사상을 공부하고 싶었고, 원효는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의 유식(唯識)학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변방의 경비대에게 첩자로 오인되어 추방당하고 만다.

661년, 이번에는 바닷길을 통해 유학을 시도했는데 중도에 원효가 그만두었다. 원효가 캄캄한 밤 해골에 담긴 물을 달게 마신 후, “모든 것이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내는 바에 달려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은 사건이 바로 이때 벌어졌다(정확한 시기나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원효는 이 땅에서 불법을 찾겠다며 발길을 돌렸고, 의상은 “외롭게 홀로 나아갔지만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라는 각오로 당나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커리큘럼 구축한 의상, 민중 속으로 들어간 원효

이후 두 사람의 행로는 달라졌다.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으로부터 화엄사상을 전수받은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해동 화엄종을 확립하기 위해 주력했다. 부석사·해인사·옥천사·범어사·화엄사 등 열 곳의 절에 가르침을 전수하였으며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다. 의상은 신라 불교 교단의 중심이 되었는데 오진·지통·표훈·진장 등 신라 불교를 수놓았던 고승들이 이른바 ‘의상의 10대 제자’에 속한다.

원효는 어땠을까? 원효는 교단을 키우거나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그는 승복을 벗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광대들이 쓰는 박에 ‘무애(無碍, 얽매이지 않고 거리낄 것이 없음)’라는 이름을 붙이고, 박을 두드리며 부처의 가르침이 담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삼국유사]는 “그가 여러 촌락을 떠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상이 기존의 틀 안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파해갔다면 원효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포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을 두고 흔히 의상은 귀족불교, 원효는 서민불교를 추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의상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를 받았고, 왕이 그에게 노비를 하사하자 불법(佛法)은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원효 못지않게 평등을 중시했으며, 민중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기 위해 노력한 이가 바로 의상이다. 또한 화엄학의 요지를 210자로 집약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만들고, 경전을 해설할 때 우리말 구어의 표기법인 이두를 사용하는 등 불교의 교리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두 사람의 지지자들은 이런 상대편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의상의 사상이 화엄종 중심이고 원효는 여러 종파의 이론, 나아가 도가 사상까지 통섭했기 때문에 이념적인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로의 성향과 방식이 탐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쪽을 높이고 다른 한쪽을 낮추는 일화가 전해오는 것은 그래서이다.

먼저 [삼국유사]에 수록된 이야기다. 의상이 바다와 맞닿은 어느 산에 관음보살이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찾아가 7일 동안 치성을 드리니 허공에서 수정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가 내려졌다. 다시 7일간 기도하니 관음보살이 나타나“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당을 짓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그리하여 지은 절이 강원도 양양에 위치한 낙산사(洛山寺). 관음보살이 사는 곳으로 알려진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원효가 등장한다. 자신도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싶었던 원효는 낙산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 관음보살이 두 번이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시험했지만 끝내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 일화는 기록마다 다르게 표현되어 있고, 학자들의 해석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무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삼국유사의 서술 자체에 한정하여 본다면, 의상은 관음보살을 보았고 원효는 보질 못했으니 의상의 도력이 원효보다 높은 것같이 느껴진다.

다음으로, 경북 경산 원효암에서 전해오는 일화를 보자. 하루는 의상이 원효를 점심식사에 초대했다고 한다. 의상은 평소 하늘에서 보내주는 공양으로 끼니를 해결하였는데, 원효에게 이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데 그날따라 하늘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원효가 돌아가자 그제야 공양을 날라주는 선녀들이 의상을 찾아왔다. 원효를 호위하는 신장(神將)들 때문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면서 말이다. 여기서는 원효의 도력이 의상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중과 문도가 만들어낸 경쟁과 대립 구도

이 두 일화는 두 사람이 경쟁관계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의상을 지지하는 쪽이 삼국유사의 일화를 지었다면, 원효를 지지하는 쪽이 원효암의 일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원효와 의상이 직접 아웅다웅 다투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두 사람의 문도들이 대립하고 있었고,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원효와 의상, 본인들은 어땠을까? 앞서 설명했듯이 두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기반이 되는 사유체계가 다르고, 관심을 둔 학문이 달랐다. 교리를 연구하는 방식, 교단 확대와 제자 육성에 대한 인식이 같지 않았고, 어떻게 포교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와 의상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효는 의상과 토론하며 의심스러운 부분을 해소했고, 의상은 원효의 학설을 수용하기도 했다.

요컨대, 원효와 의상의 경쟁은 ‘배척’이 아닌 ‘보완’이었다. 성(聖)과 속(俗), 교단과 대중, 이론과 실천에서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를 보였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신라의 불교가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민중을 위한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51호 (202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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