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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영 팝콘 심리학] 문화의 힘은 다양한 교류에서 나온다 

 

남의 것을 받아들여 소화할 능력이 없다면 ‘내 것도 네 것’

▎‘빨갛다고 다 중국의 것이 아닙니다. 김치는 한국에서 시작한 한국 고유의 전통음식입니다’라고 쓴 디지털 캠페인. / 사진:반크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의 저자 제임스 클리어(J.Clear)는 습관을 형성하기 위한 마음자세로 정체성(identity)을 들었다. 담배를 끊으려면 “담배를 끊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나는 흡연자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이런 인용이 없더라도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개념이고 믿음이다. 우리가 하는 생각, 말과 행동의 대부분은 각자의 정체성을 향해 간다. 정체성이 기초공사라면 행동이나 습관은 그 신념의 기반 위에 올려진 건축물인 셈이다.

아동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을 정의해야 하는 청소년기에 정체성은 특히 중요한 문제다. 청소년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공부를 잘하거나 게임 순위를 올리는 것도 정체성 문제다. 비행이나 범죄 조차도 정체성과 관계가 있다. 어린 나이에 술이나 담배에 손대는 아이들 중에 처음부터 좋아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그걸 통해서 자신이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확인 받고 싶어서 시작한다.

정체성이 제 구실을 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요소는 갖추어야 한다. 첫 번째는 동시적인 고유성이다. 적어도 지금 현재 기준으로 남들에게는 없고 나에게만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으로 나와 남을 구별할 수 있을 테니까. 지문이나 유전자 같은 것이 정체성의 기본 요소인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내 고유의 가치관이나 철학 같은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두 번째는 통시적인 연속성이다. 그 고유한 특성이 지금까지 내 것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내 것이리라는 보장이다. 누군가의 성품이나 재능 같은 것이 정체성의 소재가 되는 이유도 그런 특성은 잘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이든 오랫동안 꾸준히 드러낸 특성일수록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된다.

정체성은 자아를 찾아가는 중간정산과 같아


▎중국이 김치산업 국제표준으로 지원하고 있는 절임 야채인 파오차이. / 사진:중국 환구망 캡처
이 정체성은 어떻게 만들어갈까? 심리학자 에릭슨(E. Erikson)은 정체성은 일종의 중간 정산 같은 것이라고 봤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 우리가 성장하며 겪은 경험들, 예를 들어 나에게 있어 세상은 어떤 곳이며, 그 세상에서 나는 또 어떤 존재인가. 내 느낌이나 생각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세상이 나에게 허용한 선은 어디까지인지, 내가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경험들을 정리하다 보면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이 경험이 통합적으로 정리가 되면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과 잘 맞는지, 어떤 분위기나 어떤 일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게 된다. 이 감각이 있어야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고, 남들과도 뿌듯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정체성이 이렇게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가장 쉽게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그냥 경계선을 그어 버리는 것이다. 그 경계선은 대개 내가 속한 집단과 나머지 집단 사이를 가로지른다. 소위 말하는 집단 정체성(group identity)이다. 이 때문에 정체성 확보에 여념 없는 청소년들은 구별하고 무리 짓기를 좋아한다. 당연히 남자와 여자, 우리 반과 남의 반, 우리 학교와 남의 학교, 우리 동네와 남의 동네 같은 경계선도 언제든 가져다 내 정체성으로 이용한다. 또래 아이들이 모인 학교에서는 이 집단 정체성이 중요하다. 서로 비슷할수록 정체성을 찾기 위해 더 차별을 해야 하는 거다. 그래서 학급 내에서 계급을 만들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폭력이나 비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요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정체성 문제가 떠오르고 있다. 중국의 어린 국수주의자들이 온라인에서 억지를 부리고, 그로 인해 벌어진 논쟁의 불씨를 주변에서 부채질하면서 키운 결과다. 이 문화 정체성 전쟁의 유탄은 대중문화로까지 번지고 있다. 줄거리나 소품 등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중국 색채를 너무 심하게 띠었다는 이유로 시작 몇 회 만에 끝나버린 사극드라마도 결국은 민족 정체성의 문제였다. 1990년대 일본에서 한국의 김치를 ‘기무치’라는 이름으로 제품화하면서 우리 고유 문화를 일본에 빼앗긴다는 언론의 호들갑이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아시아 문화의 대표는 중국과 일본이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 음식점을 찾을 수 있게 된 건 아주 오래 전부터다. 1970년대 이소룡에서 시작된 홍콩 영화 유행은 역시 헐리우드에 큰 흔적을 남겼다. 일본은 대중문화 분야에서 특히 애니메이션으로 전 세계를 제패했다. 헐리우드에서 만든 [퍼시픽림] 이나 [고질라] 같은 영화는 일본 문화의 직계 후손이다. 지금도 [진격의 거인] 같은 애니매이션은 유럽의 중년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은 대중문화에서부터 주요 산업, 학술분야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따라가기에 바빴었다. 그러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중국이 한국의 문화정체성을 탐내는 지금 상황은 격세지감일 뿐이다.

의미 없는 아전인수는 문화 고유성도 잃어

사실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국의 신세대 홍위병들은 별로 좋지 않은 전략을 쓰고 있다. 남의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면 정체성의 기본 요소인 고유성이 무너진다. 중국 고유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거다. 과거의 어떤 시점에는 자기 것이었다고 우기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민주주의에서부터 시작해 서구 문화 체계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의 발원지이지만 이를 스스로 자랑스레 여길지언정 결코 현재의 서구 문명이 전부 내 것이라고 우기지는 않는다. 그런 아무 의미 없는 주장을 늘어놔 봤자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 더 부각될 뿐이니까.

한류가 지금처럼 커지기 시작한 건 90년대 말, 김대중 정부가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한 이후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에는 다들 한국이 일본 대중문화에 점령당할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났다. 문화는 원래 교류할수록 더 다양해진다. 다양성은 문화의 잠재력이 된다. 나를 키우려면 경계선을 그을 것이 아니라 교류를 해야 하는 이유다. 남의 것을 받아들여 내 정체성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남의 것을 제 것이라 주장해도 그저 우스꽝스러워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중국이 한국의 김치나 한복을 빼앗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쪽 국수주의자들에 대응한다고 우리까지 편협해지는 상황이 더 걱정된다. 그건 한류의 에너지원인 다양성을 잃는 길이기 때문이다. 혹여 이것이 문화 정체성의 전쟁이라면, 모쪼록 여유 있는 자가 누구고 편협하고 조악한 자가 누구인지를 판별하는 싸움으로 여겼으면 좋겠다.

※ 필자는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석사를, 온라인게임 유저 한·일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험인간], [심리학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등을 썼고 [심리원리],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1579호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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