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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날 특집기획] 점자 표기, ‘테라’ 되고 ‘스타우트’ 어려운 이유는 

 

김설아 기자 kim.seolah@joongang.co.kr
주세법상 캔 몸통 규격화돼 점자 표기 공간 부족… “마케팅 수단 아닌 보편적 정보 제공 측면에서 봐야”

▎롯데칠성음료가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성 향상을 위해 생수 ‘아이시스8.0’ 및 ‘아이시스에코’에 점자를 넣었다. / 사진:롯데칠성음료
생수 브랜드 ‘아이시스8.0’과 ‘아이시스 에코’. 이달 초부터 이들 페트병 몸체 상단에 점자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단순 ‘생수’가 아닌 브랜드명인 ‘아이시스’로 표기된 점자다.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성 향상을 위해서다. 점자 해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점자 높이와 간격도 표준 규격에 맞췄다. 롯데칠성음료는 생수 브랜드를 시작으로 페트병 음료 제품에도 점자 표기를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생리대 브랜드 ‘허그미’는 지난달 업계 최초로 점자 생리대를 출시했다. 기존 생리대 4종과 오버나이트 패키지에 브랜드와 제품명이 표기된 점자를 넣었다. 시각장애인 여성이 원하는 생리대를 바로 찾을 수 있도록 기획한 제품.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 측의 의견을 담아 기본적인 제품 정보를 담았다. 시각장애인을 비롯해 공동체 가치에 기여하는 제품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비락식혜·칠성사이다·코카콜라·테라 등 점자 표기에 동참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시각장애인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부족한 게 현실이다. 음료나 맥주 등 제품에 대한 기본적인 분류가 가능하다고 해도 이게 어떤 브랜드 제품인지, 제조 일자는 언제고 유통기한은 언제까지 인지 세부적인 정보까지는 알 수 없다.

일상에서 흔히 소비하는 음료와 과자·라면 등 식품에 국한된 게 아니다. 휴지·생리대 등 생필품을 사거나 화장품·의약품을 구매할 때도 마찬가지다. 시각장애인들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제품에 대한 점자 정보는 사실상 전무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업체들은 공통적으로 ▲비용 ▲자동화 공정 ▲공간과 재질의 한계 등을 이유로 꼽았다. 우선 비용 문제다. 음료 캔의 경우 점자를 넣을 경우 캔 뚜껑을 찍는 금형을 추가로 제작해야 한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2000만원 남짓이다. 만약 여러가지 음료에 ‘음료’가 아닌 제품명에 대한 분류까지 이뤄진다면 금형 비용에만 수억원을 별도로 투자해야 하는 셈이다.

금형 비용 약 2000만원… 생산라인 교체도 부담


▎서울의 한 대형마트 라면 매대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
생산라인도 바꿔야 한다. 음료업계 1위인 롯데칠성음료는 2008년부터 90여 개의 음료 캔 품목(2020년 기준)에 ‘음료’ 점자를 새겨오고 있다. 종류는 모두 다르지만 음료 캔 뚜껑을 덮는 과정은 모두 동일한 자동화 공정시스템을 따른다. 만약 개별 음료마다 다른 점자가 새겨진 뚜껑을 덮을 경우 생산라인을 종류에 따라 바꿔야 하는 부수적인 업무가 발생한다.

롯데칠성음료는 이미 일부 생산라인에 변화를 준 경험이 있다. 2017년 칠성사이다·밀키스·펩시콜라 등 탄산음료 제품에 음료 대신 ‘탄산’ 점자를 넣으면서다. 점자 표기 세분화의 필요성에 앞장서는 취지였지만 당시 생산 라인 틀을 바꾸고 라인을 교체하는 등 시간과 유지보수 비용 측면에서 회사는 적지 않은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이번 생수 페트병에 아이시스 점자를 표기할 때도 2주 이상 공장 가동을 멈추고 생산라인을 바꿔야 했다”며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성 향상을 위해 선도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기업 입장에선) 비용적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롯데칠성음료를 제외한 음료·주류 제조사들이 점자 표기에 소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공간적 제약도 뒤따른다. 캔 제품에 대한 여분 공간의 한계 때문에 많은 글자 수를 넣을 수 없다. 비용을 추가해 설비를 바꾸고 브랜드명 점자를 표기한다고 해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부분 음료 제품에 ‘음료’ 또는 ‘탄산’, 맥주 제품에 ‘맥주’ 라고 2음절만 표기된 데는 이런 뒷배경이 깔려있다. 맥주 ‘테라’에 업계 최초로 맥주와 브랜드명 점자가 동시에 반영된 것은 테라의 짧은 이름 때문이라는 게 하이트진로 측 설명이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주세법상 캔 맥주 뚜껑과 몸통 등에 뭐가 들어가는지가 모두 규격화 돼 있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사실상 많지 않다”면서 “테라는 짧은 이름이라 점자 반영이 가능했고, 만약 스타우트 제품이었다면 브랜드명 표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도 “억지로 브랜드명을 넣는다고 해도 시각장애인들이 촉지할 수 있는 규격화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무용지물”이라고 덧붙였다.

라면·제과 업체는 재질의 한계를 이유로 꼽았다. 농심은 포장지에 따른 품질 안전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농심 관계자는 “라면이나 과자 제품은 기본적으로 비닐이 얇고 반듯하지 않아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하는 점자 특성을 살릴 수 없다”며 “이 경우 안에 내용물에 대한 품질 안전성도 담보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제과 기업 오리온도 비슷한 입장이다. 포장지 특성상 점자를 반영하기 어렵고, 오래된 대량 설비들이 많아 점자 장치를 덧붙이거나 설비를 바꾸는 데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오리온 관계자는 “과자 포장은 중착필름이라는 아주 얇은 재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점자를 찍기 위해 압인을 하다 보면 워낙 얇아 천공이 생기는 등 이차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식품이다 보니 품질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장애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간·재질의 한계… “품질 안전성 보장 어려워”

업계는 사실상 전 제품의 점자화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기준과 규격에 맞춰야하고 제품에 대한 재질, 생산 설비, 공간 등 여러 부분에서 동시다발적 검토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당장의 점자 제품 표기를 실천하는 것보다 점자 필요성에 대한 기업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품에 대한 알 권리와 더불어 스스로 고른 뒤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등 시각장애인이 제품에 대해 알아야 할 기본적 권리를 인지하는 것이다.

점자 표기를 단순 마케팅적 측면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석수, 블랙보리, 진로 토닉워터, 하이트제로 0.00 등을 주력으로 하는 하이트진로음료는 현재 전 제품에 점자 표기가 없다. 2007년 퓨리스 생수에 점자 표기를 넣으면서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쳤지만 이후 리뉴얼을 하면서 점자 표기를 돌연 없앤 것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점자 마케팅이 비용 대비 효과가 없어 리뉴얼을 하면서 새롭게 찍어낼 필요성을 못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하이트진로음료 관계자는 “과거 점자 표기 자체를 아예 안 해온 것은 아니다”라며 “향후 전 제품에 점자 표기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연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팀 실장은 “기업 입장에서 보면 점자 표기가 그저 추가 비용이거나 새로운 인력을 들여 지출해야 하는 마이너스적인 요소로 여겨질 수 있다”면서도 “점자가 시각장애인에게만 필요한 방해요소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모두가 알아야 하는 보편적인 정보를 얻는다는 개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1581호 (202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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