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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밸리에 부는 노조 바람, VC‧스타트업 '대략난감' 

 

김다린 기자 kim.darin@joongang.co.kr
카카오뱅크 이어 게임기업 웹젠도 노조 설립
투자금 쥔 VC업계는 '노조 불온시' 분위기 팽배


▎IT 업계에 노동조합 설립 바람이 불고 있다.
4월 5일, 중견게임 기업 웹젠에 노동조합이 생겼다. 게임회사로선 넥슨, 스마일게이트, 엑스엘게임즈에 이은 네 번째 노조 설립이다. 설립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사측의 ‘연봉 인상 결정’ 때문이다.

웹젠은 올해 초 번진 넥슨발 연봉인상 릴레이에 동참한 기업 중 하나다. 임직원 평균 보수를 2000만원이나 올리겠다고 밝혔다. 그럴만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 2940억원, 영업이익 1082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각각 67.0%, 109.0% 증가한 수치다.

그런데 정작 임직원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인상 폭이 개인별로 크게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웹젠 노조는 “불투명한 조직 운영을 개방, 회사가 평가 기준을 공개하도록 해 노사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는 최근 IT업계에 부는 노조 설립 바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018년 네이버와 넥슨·스마일게이트·카카오에 노조가 잇따라 설립됐는데, 최근엔 인터넷은행인 카카오뱅크와 1세대 IT기업인 한글과컴퓨터도 노조를 만들었다.

이들이 요구하는 건 ‘공정한 성과 배분’이다. IT업계는 지난해 코로나19 수혜를 톡톡히 누렸다. 사회적 거리두기 등 ‘언택트(비대면)’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관련 플랫폼이나 제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문제는 이들 기업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음에도 업무 환경 개선과 정당한 성과 보상을 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국내 IT 업계는 그간 ‘노조 무풍지대’로 통했다. 수평적 조직문화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확보 등을 장점으로 내세워 수많은 인재를 흡수해왔다. 가령 카카오는 ‘2020년 대학생이 꼽은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 1위에 올랐다. 수년간 1위를 차지해온 삼성전자 등 전통의 대기업을 제쳤다.

하지만 직원들의 속내는 달랐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조직 분위기는 옛말이 됐다는 거다.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문화가 관료화됐고, 임금 상승률도 낮아져 만족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 입사한 직원은 거액의 스톡옵션이나 조기 승진 등의 혜택을 받았지만, 최근 입사한 이들은 이런 혜택도 누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IT업계의 노조 설립 열풍은 이름난 기업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리테일업계의 한 스타트업 대표는 최근 직원들로부터 난감한 요구를 받았다. “창업멤버 중 한 명이 최근 노동조합을 설립하겠다고 밝혀왔다. 강성 쟁의를 하겠다는 건 아니고 동등한 위치, 평등한 테이블에서 소통하고 싶다는 취지였다. 평소에 직원들과 터놓고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경영진을 대하는 데는 걸림돌이 있겠다 싶어 설립을 독려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찜찜한 기분도 들었다. 나중에 회사 규모가 커지면 상급 단체에 가입해 기존의 강성 노조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겠냐는 우려가 있다.”

이런 바람을 눈치채고 먼저 대처하는 스타트업 경영진도 있었다. 한 물류 스타트업은 최근 노사협의회 설치를 추진 중이다. 노사협의회는 노동조합이 없는 기업에서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드는 기구다. 30인 이상의 기업은 노사협의회를 의무적으로 만들도록 강제하고 있지만, 이 회사의 직원 수는 아직 30인을 넘지 않는다. 기업이 먼저 임직원 권익 보호에 앞장서겠다는 제스처를 보인 셈이다.

빅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불던 노조 설립 바람이 밑단의 스타트업에도 번지면, 업계 전체의 노동조건을 끌어올릴 수 있다. 앞서 중견·대기업으로 성장한 IT기업의 사례에서 보듯, 직원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경영자의 선의에만 기댈 순 없는 노릇이다. 스타트업도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직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어서다.

스타트업으로 번진 노조 설립, 해결 난제도 많아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꼽히는 판교엔 노조를 설립하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려되는 부작용도 적지 않다. 특히 스타트업 생태계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는 VC업계가 노조를 바라보는 시선이 문제다. VC업계는 노조를 불온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높은 임금과 두터운 복지, 정년을 일일이 보장하다 보면 언제 기업이 성장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VC업계 관계자는 “근무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취지는 긍정한다”면서도 “하지만 기존 대기업처럼 경직된 노조 문화가 스타트업의 혁신성을 떨어뜨릴 조짐이 보인다면 우리로선 투자를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장기에 놓인 스타트업이 가장 시급한 요소는 ‘자금 조달’이다. 제아무리 잠재력이 뛰어난 제품과 기술이라도 제때 투자를 받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게 스타트업 생태계의 냉혹한 현실이다. 노조를 만들고도 초심을 지키며 끊임없이 혁신하는 스타트업이 나올 수 있을까. 스타트업으로 번진 노조 설립 바람이 해결해야 할 난제다.

1583호 (202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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