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FEATURES - 창업 이래 50년 가꾼 조직문화의 힘, 과장에 위임한 권한 사장도 침해 못해 

삼성전자의 성공 DNA ② 신경영 전 삼성그룹의 유산 

이필재 포브스코리아 경영전문기자
신경영 전 이미 국내 정상이었던 삼성그룹의 훌륭한 유산은 삼성전자 성공 DNA의 한 인자였다. 삼성은 일찍이 기업문화가 탄탄했다.



삼성전자는 과거 일본 소니를 끊임없이 벤치마킹했다. 이데이 노부유키 소니 회장은 훗날 임직원에게 “삼성을 배우라”고 주문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지난해 미국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는 삼성의 브랜드 가치를 세계 9위로 평가했다. 그러나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삼성은 인터브랜드의 평가 대상 기업 리스트에도 오르지 못했다.


▎2011년 가을 대구시 중구 인교동 삼성상회 옛터에서 ‘삼성상회 터 기념공간’ 준공식이 열렸다.
신경영 후 삼성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그 모태는 1938년 간판을 단 대구의 작은 상회(삼성상회)였다. 이건희 회장의 아버지 고 이병철(호암·湖巖) 삼성 창업주는 『호암자전』에 이렇게 썼다. “창업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미 이룩해 놓은 사업을 지켜 간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어렵다.”

1987년 호암의 작고로 삼성 CEO에 취임한 이 회장은 제2 창업을 선언했고, 삼성을 국내 제일의 기업에서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신경영 전 이미 국내 정상의 기업이었던 삼성엔 좋은 유산이 축적돼 있었다. 이 찬란한 유산은 삼성전자의 성공 DNA의 한 인자가 됐다.

우선 삼성은 일찍이 앞선 경영 이념을 갖췄다. ‘사업보국(事業報國)·인재제일·합리추구’. 사업보국에 대해 호암은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지난 40여 년 간 사업보국을 주창해 왔다. 나는 인간사회에서 최고의 미덕은 봉사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경영하는 기업의 사명도 의심할 여지없이 국가·국민, 그리고 인류에 대하여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현대 기업의 지속가능성의 요건인 상생 경영의 기틀이 그의 이런 선견에 이미 담겨 있었던 셈이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사업보국을 인류사회에의 공헌으로 확장한다. 이건희 회장의 사람 욕심은 정평이 나 있지만 호암의 인재관을 계승한 것이다. 호암은 1980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최고경영자연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성그룹의 모태인 주식회사 삼성상회. 1938년 3월 1일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대구시 서문시장 근처 수동(현 인교동)에 지상 4층, 지하 1층 목조건물로 지었는데 1997년 헐렸다(왼쪽). 이병철 회장이 쓴 삼성의 경영이념(오른쪽).
“기업은 사람이다. 세상에는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유포되고 있지만 돈을 버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이다. 삼성이 발전한 것도 결국 남보다 유능한 인재를 많이 기용한 결과다. 나는 지금까지 내 손으로 수표나 전표에 도장을 찍거나 물건을 직접 산 적이 없다. 도장을 찍고 비즈니스를 할 사람을 찾고 기르는 것이 나의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일생의 한 80%를 인재를 모으고 기르고 육성하느라 보냈다.”

호암은 삼성의 최고교육책임자

호암이 교육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병마와 싸우다 쓰러질때까지 삼성종합연수원장을 자처한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삼성의 CEO이자 최고교육책임자(CLO·Chief Learning Officer)였다. 그 열매는 최고를 지향하고 잘 훈련된 삼성맨이었다. 생전의 호암은 사장단에게 세세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원가, 수출 실적, 시장점유율, 이익률 같은 것이었다. 이 전형적인 단답형 질문에 답하려면 회사 현황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사장이 구체적인 숫자까지 챙기니 임원들도 덩달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호암은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쪽에 잉어 한 마리의 원가를 묻는가 하면 안양컨트리클럽 사장에게 최적의 목욕탕 물 온도를 물어보기도 했다.

이런 경영 스타일은 일종의 용인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암은 조직 운용술도 뛰어났다. 일례로 같은 내용의 지시를 여러 팀에 동시에 내려 팀끼리 경쟁하는 한편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엉뚱한 보고를 한 팀장은 나중에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인재의 삼성’은 이렇듯 호암 시대에 이미 삼성에 뿌리내린 핵심 가치였다. 삼성은 1957년 국내 최초로 공개채용 제도를 실시했다. 그때까지는 삼성도 임의 채용, 연고 채용을 했었다. 공채 도입 후 부득이하게 연고 채용을 했을 땐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줬다. 삼성 비서실에 근무한 한 전직 임원의 회고.

“연고 채용으로 입사하면 인사카드에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급이 늦었습니다. 예를 들어 명문대 법대를 나온 권부의 실력자 아들이 사법시험에 연거푸 낙방한 후 삼성 공채에 응시한다고 치죠. 그 아버지가 삼성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내 아들이 시험을 친다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어요. 그러면 일단 채용한 후 인사카드에 연고 채용이라고 표시합니다. 이건 불이익을 주라는 메시지나 다름없어요. 몇 년 일하다 나가기를 바라는 거죠.

7년 지나 과장 승진할 때까지는 당사자도 잘 몰라요. 그러다 진급에 누락되면 비로소 알게 되죠. 그땐 시간이 많이 흘러 그 아버지도 권부를 떠난 후에요. 명문대 법대 출신이니 어쩌면 아버지가 전화를 걸지 않았어도 합격했을지 몰라요. 그랬다면 그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겠죠. 이 과정을 지켜봐 삼성의 구성원들은 어쩌다 누가 연고 채용으로 들어와도 오래 못 버틴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압니다.”

말하자면 불가피한 연고 채용이 투명성·공정성 등 공채제도의 가치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일종의 방화벽을 친 것이다. 공채 도입으로 삼성에서는 공정하고 체계적인 인사관리가 시작됐고 경영 관리 전반의 시스템화가 가속됐다.

합리 추구는 요행이나 편법에 기대지 않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CEO의 이런 자세는 경영진의 전문성과 경영의 시스템화를 가져왔다. 삼성은 일본의 최신 경영 기법과 시스템을 들여와 국내 실정에 맞게 개량했다. 일본식 경영은 시장점유율을 중시하고 비관련 다각화 및 수직 계열화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또 제조 경쟁력과 품질, 운영의 효율성을 강조한다.

신경영 전 삼성의 주력 사업은 이렇게 제조 현장에서 생산성과 품질 제고가 중요한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일본식 경영이 잘 맞는 환경이었다. 삼성이 신경영 후 일본식 경영과 미국식 경영을 접목한 패러독스 경영을 펼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일본식 경영이 이미 삼성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교적인 분위기의 집안에서 성장한 이건희 회장으로서는 아버지가 만든 일본식 경영 시스템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식 경영은 나름의 강점이 있어 사실 폐기할 이유도 없었다. 패러독스 경영은 그런 점에서 삼성으로서는 운명적인 선택이었던 셈이다.

삼성식 패러독스 경영은 송재용·이경묵 서울대 경영대 교수가 2011년 세계 최고 권위의 경영 저널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은 한국 학자의 첫 논문 ‘삼성 성장의 패러독스(The Paradox of Samsung’s Rise)’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개념은 이 회장이 1997년 낸 『이건희 에세이』에 등장한다.

“세계적인 우수 기업이나 장수한 기업들은 상반되는 요소를 조화시키는 ‘패러독스 경영’에 강하다. 내가 신경영을 주창하면서 질(質) 경영을 강조하니까 앞으로 양(量) 경영은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았다. 기업 경영에서는 질과 양, 매출과 이익 어느 한 쪽을 포기할 수 없다. 어느 한 쪽에만 의존하는 경영은 반대 차로를 보지 않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 외견상 상충되는 경영 요소를 잘 조화시키지 못하는 기업은 일류 기업이 되기 어렵다.”

1959년 삼성에 비서실이 생겼다. 호암은 비서실을 통해 그룹을 장악했다. 비서실은 ‘관리의 삼성’의 본산이었다. 이건희 시대 개막 후 비서실은 삼성식 경영의 중추라 할 만하다(148쪽 참조). 비서실 재무팀에 4년 간 근무한 천주욱 전 동부제철 사장은 “신경영이란 관리의 삼성으로 표상되는 물량 위주의 경영에서 질 경영으로 대전환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 시절엔 물량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제화 이전 보호 무역을 하던 시절엔 꼼꼼하게 챙길수록, 즉 관리를 잘할수록 이익이 많이 나는 구조였습니다. 호은 회의를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철저하게 실적을 챙겼습니다. 아울러 경쟁사들의 실적은 어떤지 물었죠. 그런데 이건희 회장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이제 관리의 삼성은 아니다’라고 선언한 겁니다.”

무엇보다 삼성엔 양질의 고유 기업문화가 있었다. 문화적 인프라다. 조직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자부심·응집력·청렴성, 자기 직무에 대한 확실한 권한 행사 같은 것이다. 삼성에서는 상급자가 하급자의 권한을 침해할 수 없다. 천주욱 전 사장의 회고.

“삼성물산 사장이라도 복사지 납품업체를 교체하라고 지시 못합니다. 복사지 납품사 결정은 총무과장에게 위임된 권한이기 때문이죠. 사장이 그런 지시를 했다가는 감사에서 걸려 불이익을 당하게 돼요.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공통점 중 하나가 감사팀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겁니다.”

삼성맨의 충성심은 정평이 있다. 천 전 사장은 “과거 사채를 동결한다는 정부의 긴급조치 발표를 듣고 신혼여행 중 돌아온 과장도 있었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삼성맨들은 자신과 가족보다 일과 회사가 우선입니다. 학연·지연보다 헌신적으로 일하는 자세를 중시해 삼성에 몇 년 다니면 동창을 잃는다고 할 정도예요. 또 다른 대기업과 달리 위로 갈수록 일을 많이 합니다. 군대처럼 위계질서가 뚜렷한 것도 삼성 조직문화의 특성이죠.”




삼성 신경영은 참 경영

엘리트 조직인 삼성에 비명문대·지방대 출신 CEO가 적지 않은 것도 이런 기업문화와 무관치 않다. 신종균 삼성전자 IT·모바일 부문 사장은 인하공전을 거쳐 광운대 전자공학과를 나왔다. 한양대 통신공학과를 졸업한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 부문 사장은 울릉도 출신이다. 삼성은 스펙이 화려한 사람보다 비전과 기술 감각이 있고 치열하게 일하는 사람이 보상 받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천 전 사장은 “만일 삼성이 아니라 다른 그룹을 물려받았다면 이건희 회장도 이만한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경영도 이 회장이 애초에 확실한 청사진을 다 그린 건 아니예요. 선문답처럼 수시로 이야기한 걸 체계화한 비서실 사람들도 한몫했죠.”

그만큼 신경영 전 삼성의 전통과 유산은 독보적인 것이었다. 삼성 비서실 비서팀에 근무했던 박종인 중앙신용정보 상임고문은 “이병철 회장이 50년 간 가꾼 삼성의 좋은 조직 문화가 이건희 회장에게 힘이 됐다”고 말했다. “상명하복적 충성, 열심히 일하는 문화, 청렴한 조직, 활성화된 감사 기능이 그 요체라고 봅니다.”

‘관리의 삼성’은 부작용도 낳았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이 저항에 부닥치자 이렇게 말했다. “뛸 사람은 뛰고, 걸을 사람은 걸어요. 걷기도 싫으면 그냥 놀아요. 안 내쫓을 테니. 하지만 남의 발목은 잡지 말아요.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을 옆으로 돌려놓나?”

일부의 집단 이기주의를 질타한 것으로, 삼성에서는 이를 ‘뒷다리론’이라고 한다. 비서실 출신의 한 인사는 당시 뒷다리를 잡은 사람이 주로 관리쪽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계열사 사업부가 투자 계획을 세우면 관리부서에서 일단 제동부터 걸었어요. 끗발을 세운 거죠.”

이건희 회장은 이런 폐단을 막으려 관리손익을 폐지했고 잘나가는 관리 출신 인력을 일선 현업에 재배치했다. 취임 2년 후 반도체 쪽에서 큰돈이 벌리자 전 계열사의 부실을 털어냈다. 그 덕에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관행이었던 밀어내기와 가짜 보험계약도 근절시켰다. 정도 경영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천 전 사장은 그런 의미에서 “신경영은 참 경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은 시운도 따랐다고 했다. “디지털 시대가 본격화하기 전 오너십의 승계가 이뤄졌습니다. 이 승계가 10년만 늦었어도 삼성전자가 퍼스트 무버(First Mover)자리를 넘보기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외환위기가 촉발한 자동차 사업 매각,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 개방도 삼성으로서는 천운과 같은 것이었다. 삼성전자는 전 세대의 정신적 유산을 앞으로도 이어갈 것인가? ‘승자의 저주’를 과연 피할 수 있을까? 퍼스트 무버가 위기의식을 유지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201309호 (201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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