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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텍필립 스위스 매뉴팩처 현장취재 - 시계 명가의 심장을 확인하다 

 

스위스 최고급 시계 브랜드 파텍필립이 자사의 매뉴팩처를 한국 언론에 최초로 공개했다. 다이얼을 제작하는 공장부터 시계의 핵심 부품을 만드는 무브먼트 공장, 그리고 파텍필립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박물관까지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확인한 것은 장인의 숨결이 담긴 최고의 기술력이었다.

▎제네바 플랑 레 와트에 위치한 파텍필립 본사. 파텍필립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에서는 숙련된 시계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시계를 생산한다.
스위스의 가장 서쪽, 프랑스·독일과 국경을 이루는 주라(Jura) 산맥의 해발 1000m 위에는 작은 도시가 하나 있다. 그곳은 이름도 생소한 라 쇼드 퐁(La Chaux de Fonds). 우리로 치면 강원도 정선이나 인제쯤 되는 지역이다. 한국에서 장장 13시간을 날아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해 자동차로 또 다시 2시간 정도를 달리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스위스를 많이 여행해 본 사람들에게도 조금은 낯선 도시. 그러나 파텍필립을 비롯한 최고급 명품 시계가 생산되는 스위스 시계 산업의 메카이자 스위스 내에 있는 불어권 도시 중에서는 세 번째로 큰 도시에 속한다. 또 라 쇼드 퐁이 속한 뉴사텔(Neuchatel) 주의 이웃 도시 르 로클(Le Locle)과 함께 건립된 ‘시계 제조 계획 도시’로서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수세기를 이어온 정교한 시계 기술과 단일 산업을 한결같이 유지하고 보존해온 마을의 전문성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16세기, 프랑스의 시계 장인들은 종교박해를 피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완만한 산세와 고요한 자연환경, 그리고 유난히 겨울이 길고 걸어 다닐 수 없을 만큼 눈이 많이 내리는 탓에 마을 주민들은 길고 지루한 겨울 동안 시계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각자의 집에서 가내수공업 형태로 일하는 시계공들이 많아지면서 라 쇼드 퐁에는 1750년대부터 시계 산업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백 년이 넘는 스위스 시계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간 곳, 그곳에서 파텍필립의 매뉴팩처와 마주했다.

가는 곳, 눈길 닿는 곳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국적인 정취와 깨끗한 자연환경이 인상적인 주라 산맥의 험한 산길을 오르면 파텍필립 시계의 다이얼을 만드는 ‘카드란 플뤼키거(Cadrans Fluckiger)’ 매뉴팩처에 도착한다. 1860년 설립되어 2004년 파텍필립 소유가 된 이곳은 하이엔드 다이얼과 인덱스, 장식들을 생산하는 전문 공장이다. 특히 손목시계의 다이얼에 인덱스를 만들어 넣는 공정만 500가지가 넘으며, 모든 인덱스는 100% 금으로 만들어진다.

전통과 혁신의 완벽한 공존


▎1851년 제1회 런던 만국 박람회에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파텍필립의 포켓워치를 구매했다. 파텍필립의 ‘열쇠 없는 시계(Keyless-winding)’는 세계 최초로 시계 자체에 부착된 용두를 사용하여 태엽을 감도록 설계됐다.
알렉세이 마크로브 파텍필립 본사 전문 가이드의 진행으로 시작된 프리젠테이션에서는 이 매뉴팩처의 오랜 역사와 발전 과정, 주요 제품과 특허 기술 등이 소개됐다. 알렉세이 가이드는 “파텍필립의 시계 다이얼은 천연 진주 중 가장 좋은 부분만 선별해 만들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80% 이상이 제작 과정에서 버려진다”며 “다이얼 하나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4~5개월”이라고 말했다.

다이얼 공장에서 그리 멀리 않은 르 크레 뒤 로클(Le Cret du Locle)에는 ‘뉴 프로덕트 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2010년 기존에 흩어져 있던 시계 제조 공장들을 인수해 하나의 건물에 새롭게 통합했다고 한다. 18,000㎡ 규모의 부지에는 시계 케이스 제조업체(Calame & Cie), 폴리싱 업체(Poli-Art SA), 보석 세팅 업체(SHG, Sertissage Haut de Gamme)가 나란히 들어서 있다. 이 센터에서는 육안으로는 도저히 확인이 어려운 미세한 부품들이 수백에서 수천 개 사용되고 있었으며, 장인들은 루페 너머로 작은 부품 하나하나의 공정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특히 금 소재의 케이스에 독특한 문양을 넣고, 0.03g의 미세한 부품을 연마하고, 최고의 다이아몬드와 보석을 세팅하는 곳인 만큼 친절한 미소를 보이던 장인들은 낯선 이방인들의 호기심 과한 소란에 이따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또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연구소에나 있을 법한 흰 가운으로 갈아입어야만 작업실에 출입할 수 있었으며, 철저한 경비와 보안으로 인해 작업실까지 들어가는 데 보통 5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스위스 최고의 시계 장인으로 꼽히는 파텍필립의 폴 부클랭이 현미경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며 꼼꼼하게 조립 작업을 하고 있다.
보석 세팅 작업실에서 만난 베르사드 로만 장인은 “파텍필립은 보석 세팅 시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시계 케이스에 길을 내고 고정시킨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품들은 모두 제네바 플랑 레 와트(Plan-les-Ouates)에 위치한 파텍필립 본사 매뉴팩처로 옮겨져 조립된다.

파텍필립 본사 매뉴팩처는 1996년 제네바 플랑 레 와트 지역에 흩어져 있던 10군데의 워크숍을 통합해 완성됐다. 파텍필립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에서는 거의 대부분 수작업으로 시계를 생산하고 있다. 무브먼트 장인, 밴드 기술자, 에나멜 세공사, 인그레이버, 보석 세공사 등 시계와 관련된 모든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이곳은 장인의 숨결이 담긴 최고의 기술력으로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보석 세공사의 다이아몬드 세팅 모습. 파텍필립은 보석 세팅 시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시계 케이스에 일일이 길을 내 고정시킨다.
파텍필립의 시계에는 개당 600∼2000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대당 수억원을 호가하는 기계 400대와 1600명의 숙련공이 1년에 58,000개의 시계를 만드는데 이 중 기계식 시계는 49,000개, 나머지 9000개는 쿼츠 시계다. 또 기본 18가지의 칼리버를 활용해 55가지의 무브먼트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시계 생산을 위해 연간 1500만 개 이상의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무브먼트 부속품을 자체 조립하는 공정뿐만이 아닌 무브먼트 제조에 필요한 모든 부속품인 메인 플레이트와 브리지, 스크루 등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 부속품까지도 전부 자체 생산한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파텍필립은 2009년부터 ‘제네바 실’을 사용하는 대신 자체 품질 인증 마크인 ‘파텍필립 실’을 채택하고 있다. 제네바 실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 그 이상을 충족시켜야만 얻을 수 있는 이 인증에 대한 파텍필립의 자부심은 실로 대단하다. 본사에서 만난 이브 카바디니 파텍필립 부사장은 “수백 배 확대 가능한 현미경으로 보지 않으면 구분조차 안 되는 디테일에 파텍필립은 매달린다”며 “그런 최고를 향한 도전과 집념이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시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알렉세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매뉴팩처 곳곳을 둘러봤다. 수많은 장인들이 완벽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파텍필립의 디테일에 대한 집념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파텍필립 175주년 기념 시계인 ‘그랜드 마스터 차임(Grandmaster Chime)’은 32억 원이라는 가격에 걸맞게 1700여 개 부품으로 구성되는데, 8년의 개발 기간, 2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딱 7피스만 출시됐다. 무려 20개의 컴플리케이션 기능이 탑재됐다는 점과 6개의 특허를 획득했다는 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이런 작업들이 전부 기계가 아닌 장인의 손끝에서 이뤄진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파텍필립은 시계 전문가들과 업계 관계자들이 인정하는 최고급 시계 회사다. 시계 브랜드 중 유일하게 4대째 대를 이어 가업을 잇고 있다. 열쇠로 태엽을 감지 않아도 시계가 작동하는 ‘와인딩 기술’을 1851년 세계 최초로 개발했으며, 1989년에는 창립 150주년을 기념해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회중시계로 알려진 ‘칼리버 89’ 시계를 출시했다.

또 2000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종소리를 내는 미닛 리피터를 비롯해 퍼페추얼 캘린더, 문페이즈, 스카이 차트 등 6개의 특허 기술을 보유한 ‘스타 칼리버 2000’을 선보였으며, 2001년에는 투르비옹 이스케이프먼트를 비롯해 12가지의 컴플리케이션 기능을 구현해낸 ‘스카이문 투르비옹’을 공개했다.

현존 최고의 시계 사원


▎미닛 리피터를 비롯해 퍼페추얼 캘린더, 문페이즈, 스카이 차트 등 6개의 특허 기술을 보유한 스타 칼리버 2000 시계.
이처럼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파텍필립의 전설적인 시계들을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제네바 시내에 위치한 파텍필립 박물관이다. 스위스 시계 유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은 2001년 처음 문을 열었다. 1919년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4층 건물 안에는 오랜 세월을 머금은 유럽의 다양한 시계들이 전시돼 있다. 16세기부터 최근에 만들어진 시계까지 그 숫자가 무려 2000개가 넘는다.

그래서 파텍필립 박물관은 시계 애호가들로부터 ‘살아있는 시계의 사원’이라 불린다. 박물관에서는 1839년 파텍필립이 설립된 때부터 지금까지 파텍필립이 제작한 시계 컬렉션들도 만나볼 수 있다. 알렉세이 가이드는 “박물관에서는 언제인지 가늠조차 안 되는 시간 속에 있었던 명작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우선 1층에는 과거 시계 장인들이 사용했던 시계 제작 도구와 제조 방식을 소개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월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든 책상들과 그 위에 자리한 다양한 도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두 시계 제작에 실제 사용됐던 것들인데 재봉틀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파텍필립 박물관에서는 500년 전부터 최근에 만들어진 다양한 시계들을 만날 수 있다.(왼쪽) / 4층에는 8000여 권의 시계 관련 서적을 비롯해 파텍필립 창립자와 각종 특허 관련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가운데) / 1800년대의 회중시계들. 다양한 문양들이 형형색색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16~19세기 앤티크 컬렉션과 파텍필립 시계들로 꾸며진 2·3층은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다. 유럽의 시계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1800년대의 회중시계들. 귀족들의 장신구로 사용되었던 이 시계들은 작품 그 자체였다. 꽃과 나비는 물론 여인들의 화려한 모습이 형형색색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경외감마저 든다.

4층에는 8000여 권의 시계 관련 서적, 파텍필립 창립자와 각종 특허 관련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1700년대에 독일에서 발간된 최초의 어린이 시계 교육 책은 파텍필립이 시계 역사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황홀한 시계의 자태에 매료되어 박물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두 시간은 금세 지나버린다. 지금 다시 곱씹어 봐도 그곳에는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175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파텍필립 가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단지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술만이 아니었다. 시계를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장인들의 예술혼도 함께 녹아들어 있었다.

- 제네바(스위스)=오승일 포브스코리아 기자

201507호 (201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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