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회화 작가라면 캔버스에 붓으로 물감을 여러 번 덧입혀 작업을 완성할 테지만, 작가 오세열(76)은 다르다. 캔버스에 물감을 나이프로 수차례 문대 배경색을 만들고, 물감이 꾸덕꾸덕해지면 날카로운 도구로 표현하고자 하는 문양을 긁어낸다. 캔버스를 몸이라고 생각한다는 작가에게 이 같은 작업은 자신의 몸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나 마찬가지일 터다. 그는 왜 이런 방법으로 작업을 하는 것일까. 게다가 그가 긁어내는 문양은 1부터 10까지 숫자의 무한 반복 아니면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는 사람의 모습들이다. 그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토록 캔버스를 사각사각 긁어내는 것일까.
▎‘무제’(2018) 앞에 선 작가 오세열. / 사진:학고재 |
|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작업을 합니다. 캔버스를 몸이라 생각하고 못이나 면도칼로 긁어내지요. 그렇게 제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좀 독특해요. 정상이 없죠. 팔이나 다리가 하나뿐이거나 얼굴도 눈만 있거나…. 다 외롭고 고단한 사람들이에요.”해방둥이의 다섯 살 여름은 지옥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경기도 아산만으로 피난을 가야 했던 꼬마는 그곳에서 7년을 살면서 부모 잃고 생고생하는 아이들을 지천으로 보았다.“전쟁 후의 세상에는 힘든 아이가 많았어요. 변방과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 부모를 떠나 방황하는 아이들, 마음이 어두울 수밖에 없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요즘도 비슷해요. 혼자 외롭게 사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주위에서 품어주어야 합니다.”
전쟁고아 향한 공감, 현대인의 상실감 건드려
▎‘무제(Untitled)’(2019), 캔버스에 혼합매체, 72×90cm |
|
팔도 하나, 다리도 하나뿐인 그의 인물들은 하지만 어색하지 않다. 비정상이지만 어색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질서가 잘 잡혀야 편안한 마음이 든다”는 작가는 “잘 그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잘 그리려다 보면 금세 싫증이 나기 때문”이란다. “뭘 그려야겠다 마음먹고 그리지는 않아요. 그게 끝까지 유지되지 않더라고. 정물 그리려다 인물이 되기도 하고, 아니면 추상이 되기도 하니까. 가끔 긴장해요. 나도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릴지 몰라서.”오 작가는 서라벌예술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목원대에서 오랜 세월 교편을 잡았다. 서른아홉이던 1984년 유럽의 대표적인 아트페어로 꼽히는 프랑스 파리의 피악(FIAC)에 남관, 박서보, 김기린, 이우환 작가와 함께 작품을 선보였는데, 당시 유일하게 작품을 팔아 화제가 됐다. “할 줄 아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뿐”이라는 작가는 “오래 그리다 보면 그림 그리는 기술이 좋아지고 빨라지는데, ‘기술자’가 되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럼 그에게 작가란 어떤 사람일까.“작가는 발상과 표현으로 싸움을 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평생의 고민거리죠. 한두 번 보고 마는 그림이 아니라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그림을 그려야 해요. 관람객이 전시장에 딱 들어와서 한 바퀴 도는 시간이 5분이냐 1시간이냐는 오로지 작가에게 달려 있거든요. 작가는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해요. 어떤 작품은 멀리서는 별로인데 가까이서 보면 괜찮은 게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고. 멀리서도 좋고 가까이서도 좋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어야겠죠.”
그러면서 그는 작품의 ‘숙성된 밀도’를 중요한 점으로 꼽았다. “겉절이보다 묵은지”이고 “오래된 된장이 더 구수하다”는 것이다. 그가 여러 가지 물감을 섞은 뒤 나이프로 차곡차곡 6~7번씩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발라 만들어낸 바탕색은 바로 이런 ‘묵은지 색’이자 ‘된장 색’이다. “쫀득하고 조밀하며 촉각적이면서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각을 동반하는 표면…. 이 피부가 그림의 핵심적인 근간을 이룬다. … 유채의 번들거림을 지우고 무광의 것으로 만드는 한편 자신만의 독특한 질감을 이루는 일… 일종의 ‘물감의 오브제화’이기도 하다.”(미술평론가 박영택, 전시 서문 중)
▎학고재 전시장 전경. |
|
그는 이 밑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급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모든 작업을 혼자서 한다는 작가는 “하찮아 보이는 바탕색에도 그리는 사람의 혼(魂)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여 창작자는 없는 것을 있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사람입니다. 하찮은 물건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발견을 하고 발상을 하는 것이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하지요.”
버려진 것들에 새 생명… “어눌한 해학미”
▎‘무제(Untitled)’(2016-2020), 함지박에 혼합매체, 53×45cm. |
|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시작된 ‘오세열-은유의 섬’(4월 8일~5월 5일)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은 가장 먼저 노란색 바탕에 반복되는 숫자와 검정 토끼 머리가 눈길을 끄는 ‘무제’(2021)를 보게 된다. 작가의 작업실은 경기도 양평 용문사 근처에 있는데, 지난해 가을 용문사 은행나무 잎이 절 주변을 한가득 메운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처럼, 그의 작품에는 1부터 10까지 숫자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왜 이렇게 숫자를 적는 것일까.“다들 숫자에 파묻혀 사는 삶 아닌가요. 우리가 살면서 숫자를 떠나 살 수는 없잖아요. 숫자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고. 특별한 의미를 담았다기보다는 떨쳐내고 싶어도 떨쳐낼 수 없는 것이기에 계속 반복해서 적은 것입니다. 1부터 10까지만 썼는데, 11부터는 별 의미가 없기에 그냥 1부터 10까지만 반복하고 있어요.”작품 하나 가득 숫자만 있으면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그래서 숫자 사이사이에 문득 붙어 있는 단추나 작은 플라스틱 숟가락이나 인쇄물 조각은 신선하다. 그가 길을 걷다가 주운 물건들이다.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땅에 떨어진 쓰레기 조각 중에 재미난 것들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누군가 버린 것, 그 의미 없는 것들에 생명을 준다고 할까. 나는 뜻밖의 것을 찾는 재미가 있고, 그들은 존재로서 새로운 가치를 얻으니 기쁠 것이고.”
아, 낙서 같은 작가의 작품이 가슴속을 파고드는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우리가 애써 외면해왔던, 모든 버려진 것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왔던 것이다. 전쟁통 고아의 상심은 고독한 현대인의 심상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거리에 버려진 물건들은 더는 효용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대인의 불안과 허무함일 터다.
▎‘무제(Untitled)’(2021), 캔버스에 혼합매체, 112×145.5cm. |
|
옛날 국민학교 교실에 걸려 있던 칠판처럼 보이는 진녹색 화면도 자주 등장하는데,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를 떠올렸다. 어느 날 “나와서 칠판에 그림을 그려보라”는 선생님 말씀에 신이 나서 하얀 백묵으로 칠판을 가득 메웠던 기쁨이다. 칠판의 색을 빌려온 것일 뿐 칠판을 그리려 한 것은 아니라는 작가는 낙서에 얽힌 추억이 선 긋기 취미로 이어졌다고 털어놓았다. “선을 긋는 게 재미있어요. 공간이 보이면 막 선을 긋고 싶더라고.”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인 ‘무제’(2021)는 선 작업을 새롭게 표현한 작품이다. 마치 아스팔트 위에 쌓인 눈을 굵은 가지로 쓱쓱 치워간 듯한 모습인데, “새로운 시도가 꽤 마음에 들었다”는 작가는 “더 큰 화면에 연작으로 만들어볼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그런가 하면 캔버스가 아닌 함지박 안에 그림을 그린 ‘무제’(2016~2020)에서는 고향의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사진 3). 그는 캔버스 뒤에 나무 합판을 덧대 단단하게 고정한 뒤 바탕색을 칠하는데, 함지박은 이미 그 자체로 단단한 지지체이기 때문이다. 우찬규 학고재 대표는 “화면 안에서 콜라주 형식으로 활용되던 오브제가 화면 그 자체로 확장된, 형식과 내용이 하나의 몸으로 뒤섞인 ‘회화-조각’”이라고 귀띔했다. 미술평론가인 박영택 경기대 교수는 오세열 작가의 작품을 두고 “어눌하고 해학적이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림의 경지를 펼쳐 보이지만 그것은 상당히 노련하게 가공된, 매우 세련된 조형미로 버무려져 있다”고 상찬한다.그는 실제 나이와 그림 나이가 반비례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일흔일곱에 그린 그림이 ‘젊어 보인다’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잖아요. 그러려면 갖고 있는 ‘기술’은 될 수 있는 대로 버려야 해요. 새로운 실험은 자꾸 해야 하고요.”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