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불교도 바그너? 

매년 5월 중순에는 '부처님 오신 날'이 있다. 불교는 서양 고전음악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기독교 관련 음악을 쓴 서양 작곡가는 많다. 불교도인 서양 작곡가가 있을까? 불교적 내용을 음악화한 작곡가가 있을까?

▎[파르지팔]의 등장인물인 파르지팔과 쿤드리. 쿤드리는 매혹적 여인으로 파르지팔을 유혹하나, 파르지팔은 거부한다. 파르지팔은 팜파탈에게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보임으로써 그녀의 고통에 찬 윤회의 삶을 끝낸다. 애초에 저주를 통해 윤회를 거듭해올 수밖에 없었던 그녀였다. 쿤드리는 윤회의 종지를 행복하게 받아들인다. / 사진:위키피디아
20세기 이전 서양 고전음악가 중 불교도를 자처했던 이는 없다. 혹시 불교를 믿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대상은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다. 이 독일 작곡가가 불교적 내용으로 오페라를 쓰려고 했다. 바그너는 1856~58년 무렵 불교에 관심을 가졌고, [Die Sieger]라는 오페라의 초안을 잡았다. '승리자들'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초안에는 오페라 대본을 위한 기본적 이야기 구조와 등장인물만 적혀 있을 뿐, 음악적 요소들은 없다.

바그너는 파리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교수 외젠 뷔르누프(Eugène Burnouf)가 1844년에 발표한 『불교사 입문』 속 한 이야기에 주목했다. (오늘날, 콜레주 드 프랑스는 일종의 열린 대학으로, 이 대학의 교수가 강의하는 과목은 누구나 들을 수 있다.) 뷔르누프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 전문가로서 엄밀한 번역과 연구를 통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 학술 가치가 있는 연구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그에 힘입어 프랑스는 유럽에서 불교 연구를 선도하는 나라가 됐다.

바그너는 『불교사 입문』 속에서 고대 인도의 최하층 계급에 속하는 여인과 승려의 금지된 사랑을 부처가 허락하고 축복했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시체를 처리하는 여인 프라크리티는 부처의 제자인 승려 아난다를 사모했는데, 당시 인도는 엄격한 신분사회였기에 최하층의 카스트에 속하는 이와 다른 카스트에 속하는 이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프라크리티는 인도의 카스트 사회 속에서 파리아(Paraiyar), 즉 불가촉천민에 해당한다.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천민은 사람들로부터 경멸당하고 사회악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승려를 비롯한 성직자와 학자는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에 속했다. 카스트 제도가 금지하는 사랑은 부처를 따르는 승려들도 배척했지만, 이야기 속 부처는 그들의 순수한 결합을 허락했고, 더 나아가 프라크리티를 수도승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는 파격을 보였다.

교훈적이지만 흥미를 자극할 상업적 소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야기다. 이전에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들은 나름대로 흥미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에 기초한다. 젊은 바그너에게 처음으로 대중적 성공을 가져다준 작품은 1842년에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연주된 오페라 [리엔치]였다. 리엔치(Rienzi)는 14세기 로마의 개혁적 지도자(집정관)였고, [리엔치]는 그의 비극적 삶을 다루었다. 드레스덴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독일 시민들은 [리엔치]를 통해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 듣고 싶었던 것을 들었다. 민주주의나 자유 혹은 정의와 같은 것. 바그너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 이것들이다. 당시 독일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산층이 막 성장하고 있었고, 이들은 민주주의나 자유 혹은 정의라는 관념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반면 지배층은 이런 관념들에 냉소적이었다. 1830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은 유럽 전체에, 특히 독일에 영향을 주었고, 이 오페라가 공연된 1842년은 이 영향을 받던 시기이자 그로부터 6년 후인 1848년에 발생하게 될 또 다른 혁명을 기다리는 불온한 시기였다. 이런 시대에 [리엔치]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에 힘입어 30세 바그너는 드레스덴 궁정악단의 지휘자가 됐다. 그가 마음에 품은 불온한 생각을 끝내 드러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는 그것을 작품은 물론 행동으로도 드러냈다. 1848년, 프랑스에서 복고 왕정을 무너뜨리는 혁명이 일어났고 공화국이 수립됐다. 이웃 나라 독일의 작은 도시 드레스덴에까지 소식은 전해졌다. 1849년 5월, 드레스덴 시민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개혁적 요구를 거절했던 작센 왕을 향한 혁명운동을 시작했다. 바그너는 혁명 이전부터 (왕의 관점에서) 불온한 활동을 했고 드레스덴 혁명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드레스덴 혁명은 진압됐고, 바그너는 드레스덴을 떠나야만 했다. 정부는 그를 현상 수배했다.

바그너는 파리와 스위스의 취리히 등지에서 10년에 걸쳐 망명 생활을 했다.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망명 생활 9년 차였다. 망명 생활은 당연히 좋지 않았고, 정치적 이상주의자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유럽의 정세는 이 이상주의자를 더욱 괴롭게 했다. 프랑스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1851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을 전복하고 황제가 된 사실에 충격을 받은 바그너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 그 쿠데타가 일어난 날로부터 자신의 시간이 더는 흐르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음악과 정치의 영역에서 혁명가였던 바그너는 서서히 염세주의자가 되어갔고, 그런 상황에서 우연히 알게 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저작들이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는 꽤 지적인 사람으로서,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이나 프루동 등이 쓴 철학 책들을 탐독했는데, 이제 그 독서욕이 불교적 철학을 제시한 쇼펜하우어의 책들을 대상으로 타오르게 된 것이다. 1854년 가을, 바그너는 독일어권 최고 문장가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었다. 1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바그너는 여러 차례 완독했다. 바그너의 혁명 동지들 일부는 세계를 구할 사명감에 불타는 혁명가가 세계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것을 불편하게 여겼고, 배신자로 간주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를 탐독한 바그너의 독서는 자연스레 불교와 힌두교 자료의 독서로 이어졌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불교 철학과 비슷한 주장을 했던가? 철학자 김진에 따르면 쇼펜하우어의 표상은 의지가 드러난 것으로서,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세계에는 많은 (비인격적이며 충동적이며 맹목적인) 의지가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신체는 의지의 표상이다. 치아와 식도는 배고픔이라는 의지가 발현된 것이고, 생식기는 성적 의지를 객관화한 것이다(!). 의지가 실현되는 이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까? 나에게서 벗어나면 된다. 인간은 '나'라는 개체성의 환상에서 벗어나며 우리의 눈을 가리는 개체라는 장막을 걷어 올려서 자신과 타인의 구분을 지양해야 한다. 구분을 던져버리면 타인의 고통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동고(同苦, Mitleid)의 감정이라 불렀는데, 이러한 생각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일치한다(김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읽기』).


▎프러시아와 작센 왕국의 군대가 1849년에 드레스덴에서 봉기한 시민을 진압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 사진:위키피디아
쇼펜하우어가 불교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으며, 그의 철학과 불교가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사실 불교는 신도 5억 명 모두에게 서로 다른 모습일 것이다. 유럽인들에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뷔르누프 이전부터 유럽인들은 불교를 염세주의와 절멸, 심지어 자살을 권하는 종교 혹은 철학으로 보았고, 장황한 허무주의 이론으로 이해된 불교는 많은 유럽인에게 경멸과 멸시, 조롱의 대상이 됐다. 그러한 유럽인들에게 종교 혹은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권하는 도덕적이고 현명한 행동 양식은 잘 보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1840년에 수립된 프랑스 정부에서 교육청 장관을 역임하고 철학교육을 법제화했던 빅토르 쿠쟁에게 불교는 무(無)를 숭배하는 부정적 종교다. 불교는 존재가 아닌 무를 숭배하며, 영원을 추구하기보다 소멸을 염원한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 이런 생각을 할까? 불교도들은 기독교로 개종되어야 한다. 개종은 19세기 유럽의 철학자들에게 오류에 대한 진실의 승리, 부동성에 대한 활동성의 승리, 여성적이며 모순적인 연약한 천성에 대한 남성적이며 논리적인 강한 천성의 승리, 파괴에 대한 건설의 승리,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승리를 의미했다(로제-폴 드 르와, 『철학자들과 붓다』)

[승리자들]에서의 승리는 이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홍기삼 동국대 총장은 바그너가 이 오페라 제목을 ‘승리자들’이라고 명명한 근거로 『법구경』을 인용한다 (매경춘추, ‘바그너의 불교 오페라’).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모든 승리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은 전장에서 수천의 적을 무찌르기보다 어렵다.” 바그너는 [승리자들]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에서 불교적 요소들과 생각을 은밀히 표현했다. 이 난해한 오페라의 웅장한 전주곡은 50대 이상의 어르신들에게는 익숙한 멜로디일 것이다. 조용한 [성배 동기]가 끝난 후 등장하는 웅장한 [신앙의 동기]는 금관악기에 의한 팡파르다. 1970년대 M모 방송사의 9시 뉴스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된 곡이다. 성배와 같이 기독교적 의미가 있는 요소들이 등장하는 [파르지팔]에는 숨겨진 불교적 요소들도 존재한다. 이 곡의 작곡가 바그너가 기독교도였는지 불교도였는지에 대한 학술적 논쟁이 있다. 바그너는 이 오페라에서 성장하는 파르지팔을 그렸고,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성장의 원동력임을 보여주었다. 그가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구원해주는 이는 불행한 윤회를 거듭하는 한 여인이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은 인간은 물론 포유류가 가지는 위대한 감정이다. 그 감정으로 스스로 승리자가 될 수 있고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106호 (2021.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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