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agement

Home>포브스>Management

강승모 한국석유공업 부회장 

60년 지속가능 경영의 조건 

장진원 기자
한국석유공업은 창립 이후 60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석유공업 제조사로서 명성을 이어왔다. 국내 1위 산업용 아스팔트 제조사를 넘어 최근에는 친환경 신사업으로 100년 기업의 저력을 다지고 있다. 창업 3세인 강승모 부회장이 지난 20년간 쌓아온 제조 경쟁력 확보가 그 원천으로 평가받는다.

1962년은 한국의 경제·산업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편 역사적인 해다. 경제부흥을 목표로 내건 박정희 정부는 1962년을 기점으로 이른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에 나섰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대표되는 6차 계획(1987~1991),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한 마지막 7차 계획(1992~1996)에 이르기까지 민관이 함께 이뤄낸 경제·사회 발전 계획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룬 초석이 됐다.

경제개발계획의 첫 단추를 끼웠던 1962년은 산업화라 부를 만한 인프라 자체가 태부족인 시대였다. 당시 정부가 내세운 1차 계획의 골자도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 닦기였다. 이 기간 동안 전력과 석탄·석유 등 에너지원 확보, 이를 위한 기간산업 확충에 주력했던 배경이다. 국내 최초 정유사인 대한석유공사(현 SK)가 울산에 설립된 해도 그해였다. 원유를 수입해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 같은 원료로 정제하는 기술이 1962년 들어 비로소 한국에도 도입됐다.

2년 뒤 1964년 설립된 한국석유공업도 당시 막 발아하기 시작한 석유화학산업에 발을 디뎠다. 당시 정부와 석유공사는 원유 정제 후 생산된 다양한 석유 원료를 처리할 거래처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유공장에서 생산된 원료를 가공해 2차 상품을 만들어내는 산업 기반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한국석유공업 창업주인 고(故) 강관석 회장은 ‘아스팔트’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았다.

아스팔트는 원유 정제 과정 중 가장 마지막에 남는 찌꺼기다. 당시 강 회장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블론(blown) 아스팔트(산업용 아스팔트)를 국산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섭씨 200도가 넘는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어 만든 제품으로, 도로 포장용 등에 쓰이는 스트레이트 아스팔트에 비해 탄성력과 내열성, 충격 저항성 등이 월등했다. 정유공장에서 생산한 물질을 원료로 2차 가공품을 만드는 다운스트림(downstream) 공정이 한국석유공업의 블론 아스팔트를 계기로 국내에 본격 개화된 셈이다.

한국 최초의 산업용 아스팔트


▎강승모 부회장이 산업용 아스팔트가 적용된 도로 포장 모형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서울 이촌동 본사에서 만난 강승모 한국석유공업 부회장은 “국내에 없어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제품을 국산화한 것 자체가, 당시 산업 여건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과였다”고 자평했다. 강 부회장은 강관석 창업주와 2대 강봉구 회장의 뒤를 이은 창업 3세다.

“창업주께선 회사 설립 전 당시 교통부, 지금의 한국철도공사에서 16년간 건설 담당 공무원으로 일하셨어요. ‘외국에선 기차가 석탄이 아닌 아스팔트로 달린다더라’는 말씀을 우연히 듣고 산업용 아스팔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셨다고 합니다. 당시 기관차 연료로 쓰던 조개탄을 만들려면 재료를 굳히는 점결제가 필요했는데, 수입품인 콜타르 피치에 전량 의존했어요. 이를 우리가 제조한 아스팔트 피치로 전량 교체했죠. 당시 국내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제품이었어요.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도 컸다고 합니다.”

블론 아스팔트로 석유화학 가공산업 시대를 연 지 2년 후인 1967년, 한국석유공업은 또 한 번 제품 국산화에 성공했다. 바로 솔벤트다. 솔벤트는 다른 물질을 용해할 때 사용하는 화학용제를 말한다. 가정에서 흔히 쓰는 매니큐어 제거액이나 페인트 시너를 비롯해 산업용 세척제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쓰임새가 다양하다. 강 부회장은 “솔벤트도 휘발유를 원료로 한 다운스트림 제품”이라며 “세척용 휘발유로 이해하면 쉽다”고 설명했다.

“당시 석유공사에서 일하던 엔지니어들은 거의 외국인이었어요. 그들에게 솔벤트 공장 설계를 의뢰했더니 말도 안 되는 거액을 불렀다더군요. 결국 직접 생산설비를 설계하고 만들었죠. ‘탱크 터진다’며 도망갔던 외국인들이 머쓱하게 설비는 잘 돌아갔고, 국내 최초로 솔벤트 생산에 성공했어요.”

한국에서 처음 생산된 산업용 아스팔트와 솔벤트는 산업 고도화와 경제성장의 단물을 흠뻑 빨아들였다. 제품을 내놓기가 무섭게 시장에 팔려나갔다. 거래처들은 현금을 보자기로 싸 들고 와서 미리 입금했고 며칠이 지난 후에야 겨우 물건을 받아갔다. 대호황이었다. “당시 울산과 부산 간 도로에 노란색 탱크로리가 떴다 하면 으레 한국석유공업 유조차라 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는 게 강 부회장의 설명이다.

“한국석유공업 솔벤트를 줄인 ‘한솔’은 아예 보통명사가 됐어요. ‘솔벤트 주세요’가 아니라 ‘한솔 주세요’로 통했죠.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은 솔벤트는 몰라도 한솔은 알아요. 우리 사보 제호도 ‘한솔’이었는데, 같은 이름을 쓰는 그룹사가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한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1964년 울산 공장에서 시작한 한국석유공업은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한국 경제·산업의 태동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석유화학산업이라는 한 우물을 파온 저력이 짐작되는 연혁이다. 60년 세월 동안 승승장구해온 것만은 아니다. 부침도 적지 않았다. 강 부회장은 1964년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업사를 호황기와 쇠퇴기, 회복기로 나눠 설명했다.

‘제조’라는 기본으로 돌아가다

창업 직후부터 1980년대 초까지 20여 년간 한국석유공업은 그야말로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던 호황기를 지나 1980년대 들어서자 경영환경이 급변했다. 당시는 그간 잠재되어 있던 노사갈등이 민주화 바람을 타고 분출되던 시기였다. 창업주와 함께 회사를 일궈온 2대 강봉구 회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선언하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강 부회장은 결과적으로 이 시기를 ‘20년 쇠퇴기’라고 표현했다.

“오너십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가장 큰 차이가 뭘까요. 바로 장기 비전이에요. 전문경영인은 실적, 즉 단기 수익에 집중하기 쉽죠. 우리도 전문경영인 체제가 들어선 이후 제조보다 유통에 힘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실적이 올랐을지 몰라도, 제조 기반이라는 회사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몰랐죠.”

위기의 징후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석유공업의 사업 구조는 매출 중 제조가 20%인 데 비해 유통이 80%에 달했다. 기술력으로 승부했던 제조사가 어느새 경제위기 같은 외부 요인에 휘둘리기 쉬운 허약 체질로 바뀌어 있었다.

강 부회장이 회사에 합류한 건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1995년이었다. 대학 졸업 후 가업을 잇겠다는 각오로 입사했지만 회사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탄탄한 기술력과 제품으로 신뢰받던 기업이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시장 경쟁력에서 밀려나는 게 자명했어요. 무엇보다 연구개발(R&D) 조직이 와해된 게 뼈아팠습니다. 부친과 제가 가장 먼저 한 조치가 바로 R&D 조직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죠. 무너진 코어를 다시 세우는 게 최우선이었어요.”

강 부회장은 “핵심 제품인 아스팔트의 경쟁력이 살아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회고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스팔트 시장에 이렇다 할 경쟁자도 많지 않았다. 강 부회장은 창립 이후 40여 년간 쌓아온 산업용 아스팔트의 경쟁력을 해외 수출로 잇겠다는 복안을 짰다.

“이 회사에 미래 사업이란 없구나. 입사 당시 솔직한 제 심정이었어요. 침체된 회사에 무어라도 활로를 뚫어야만 했어요. 기획실장을 맡아 1997년 무역팀을 신설했어요. 창립 후 첫 무역 조직이었는데, 처음엔 으레 그렇듯 모두가 회의적이었습니다.”

부도와 폐업이 속출했던 IMF 환란 시절, 무역에 방점을 둔 강 부회장의 전략은 외려 전화위복을 일군 신의 한 수가 됐다. 산업용 아스팔트 생산설비와 기술이 없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홍콩 등 동남아 시장을 타깃으로 건축용 아스팔트 자재 수출에 나섰다. 이전까지 전무했던 수출 실적은 1998년 백만불 수출의탑 수상을 시작으로 2008년 오백만불 수출의탑, 2017년 삼천만불 수출의탑 수상까지 이어졌다. 강 부회장은 “올해 오천만불 수출의탑 수상을 기대한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현재 한국석유공업의 전체 매출 중 수출 비중은 20%까지 올라섰다.

기업의 성장과 쇠퇴, 이를 극복하는 회복의 과정은 한국석유공업 60년사에 압축판처럼 녹아 있다.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할 오너십,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는 판단력, 과감하면서도 꾸준한 혁신 등 지속가능한 경영의 조건이 60년 기업사 곳곳에 배어 있다. 수출로 경영 체질 혁신에 나선 강 부회장은 뒤이어 ‘초심’과 ‘친환경’이란 화두를 꺼내 들었다.

“돌이켜보면 60년 전 아스팔트와 솔벤트가 모두 국내 최초였어요. 다시 한번 한국에 없는 제품을 내놓자, 단 모든 초점을 친환경에 맞추자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ESG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석유화학이나 철강산업부터 위기를 맞을 거라 예상했지만, 인류 문명이 존속하는 한 결코 사라지진 않을 산업이죠. 그렇다면 남들보다 더 깨끗하게 만들자, 그러면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열릴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현재 한국석유공업의 주요 사업 부문은 아스팔트, 합성수지, 케미컬 등이다. 강 부회장은 기존 사업의 경쟁력을 더욱 내실 있게 다지면서, 이를 바탕으로 한 신사업 추진에 힘을 쏟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R&D 조직을 재건하며 약해진 제조 역량을 끌어올린 결과가 20여 년 후 성장의 결실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최근 야심 차게 선보인 아스팔트콘크리트 철도 궤도 사업이 대표적이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과 공동 개발한 아스팔트콘크리트 궤도는 자갈이나 콘크리트 같은 기존 궤도에 비해 경제성, 시공성, 신속성, 친환경 측면에서 월등하다. 초기 건설비용과 유지보수 비용 면에서도 비교하기 어렵다. 기계화 시공으로 신속하고 정밀한 시공이 가능하고, 경화 시간이 짧아 시공 후 24시간 안에 이용할 수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콘크리트 궤도 대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3분의 1 수준에 불과해 친환경적이다. 아스팔트콘크리트 궤도의 우수성은 이미 이탈리아와 독일 등 유럽 시장에서 검증됐다.

한국석유공업은 지난 2016년 국내 최초로 경북선, 중부내륙선 일부 구간에 아스팔트콘크리트 궤도의 시험 시공을 완료했다. 국가철도공단에서 성능 검증 조건부 적합 승인도 받았다. 지난해에는 포스코 내부 건널목을 아스팔트콘크리트 기술로 시공해 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800톤짜리 차량 두 대, 즉 1600톤의 무게를 견딘 시공은 아스팔트 궤도의 우수한 성능과 회사의 기술력을 국내 시장에 제대로 알린 기회가 됐다. 강 부회장은 향후 인도, 동남아 시장으로 아스팔트콘크리트 궤도 사업을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친환경 리사이클 사업도 주요한 미래 먹거리다. 현재 국내 핵심 산업인 반도체와 이차전지 생산에 사용되는 화학용제는 거의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데,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신제, 즉 새 제품과 리사이클 제품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최근에는 ESG 기업 활동에 대한 법적 움직임이 강화되면서 친환경 사업의 핵심인 리사이클 용제를 찾는 수요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한국석유공업은 이런 트렌드에 발맞춰 지난 2022년 울산 공장에 250억원 투자를 단행해 그해 3분기부터 다이메틸폼아마이드(DMF)를 상업 생산하고 있다. 세계 최대 폴리이미드(PI) 생산 기업인 PI첨단소재에서 PI필름 생산 시 중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데 사용되는 용제다.

지난 3월에는 롯데정밀화학과 사업 협약을 맺었다. 한국석유공업이 디메틸아세트아미드(DMAc) 생산에 필요한 원료인 디메틸아민(DMA)을 롯데정밀화학에서 안정적으로 공급받는다는 내용이다. DMAc는 폴리이미드 생산에 필요한 핵심 소재다.

폴리이미드는 최근 디스플레이, 태양전지, 반도체 등 전기·전자와 IT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소재로 떠올랐다. 지금까지 한국은 폴리이미드 제조를 위해 DMAc 전량을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해 썼다. 한국석유공업이 올해부터 DMAc 생산에 나서면, 60년 전 산업용 아스팔트와 솔벤트 국산화에 처음 성공했듯이 첨단소재 부문에서 또 한 번의 이정표를 세우게 될 전망이다. 강 부회장은 “10년 후 매출과 이익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주요 사업으로 성장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신뢰, 60년 역사의 또 다른 바탕


▎아스팔트를 원료로 제작한 방수시트 제품군을 소개하는 강승모 부회장.
일찍이 1977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한국석유공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배당을 거른 적이 없다. 임직원 월급을 미룬 적도, 깎은 적도 없다. 외환위기 때도, 심지어 적자일 때도 그랬다. 강 부회장은 “창업주 때부터 주주와 직원, 거래처를 위한 경영이 일종의 강박처럼 자리 잡은 것 같다”며 웃었다.

“제조와 유통을 함께하니 거래처가 3122개사, 취급 아이템도 2617개에 달합니다. 모든 이해관계자가 ‘한국석유공업은 믿을 만한 회사다, 저들이 만든 제품은 믿고 쓸 수 있다’는 신뢰를 줄 때만 가능한 숫자라고 생각해요. 수많은 부침을 겪었지만 지난 60년간 경쟁력을 잃지 않은 건 결국 시장의 신뢰 덕분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인터뷰 말미에 미래 비전을 묻자 강 부회장은 신뢰라는 키워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기존 사업의 경쟁력을 잇고 신사업의 비전을 실현하는 바탕에는 주주, 직원, 거래처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신뢰가 깔려 있다는 설명이었다. 1997년 첫 수출 과정은 한국석유공업 특유의 신뢰경영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싱가포르에 처음으로 아스팔트 방수 시트를 수출하게 됐어요. 780롤을 컨테이너에 싣고 떠났는데, 배가 적도를 지나는 동안 뜨거운 온도에 모두 녹아버린 거예요. 계약서상으로는 별문제 없었지만 당장 ‘전량 교체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거래처에서 도리어 미안해할 정도였죠. ‘앞으로도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100% 처리해주겠다’고 덧붙였어요. 저희를 신뢰했는지, 그 후 다른 거래처들을 소개해줘 수출선이 더 늘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에요.”

한국석유공업은 꼼수를 쓰지 않는 기업으로도 업계에서 정평이 나 있다. 석유화학 비즈니스는 유가에 따라 사업 실적이 크게 좌우된다. 물건이 배에 실려 오는 동안에도 원가가 달라지고, 며칠만 창고에 쌓아둬도 가격이 몇 배로 치솟기도 한다. 강 부회장은 “값이 떨어질 것 같으면 ‘좀 있다 가져가라’ 하고, 반대면 ‘빨리 가져가라’고 한다”며 실소를 터뜨렸다. 화재로 공장이 전소된 거래처에선 물건값을 안 받기도, 부도가 난 거래처는 회사 채권팀이 대신 일을 처리해주기도 했다. “모두가 잘돼야 더 잘 산다”는 모토는 창업주 이후 60년을 이어온 한국석유공업의 유산이다.

아스팔트를 원료로 제작한 방수시트 제품군을 소개하는 강승모 부회장. “친환경 경영과 제품도 마찬가지 개념입니다. 거래처들이 친환경 회사가 되도록 돕는 기업이 되자는 게 우리의 목표예요. 우리와 함께하는 모든 관계자와 기업이 친환경화할 수 있도록 돕는 서포터이자 프로바이더가 미래 한국석유공업의 비전입니다. 한국의 ‘넘버원 에코솔루션 프로바이더’가 한국석유공업을 100년 기업으로 이끄는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겁니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405호 (2024.04.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