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심장이라 불리는 잘츠부르크는 대주교청을 구심점으로 하는 활발한 문화의 중심지로, 각지에서 몰려든 뛰어난 음악가들이 고용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이곳의 수준 높은 문화 환경과 빼어난 자연 및 도시환경은 이곳에서 태어난 어린 모차르트가 음악적으로 성장해나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잘차흐강과 잘츠부르크.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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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잘츠부르크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차르트의 도시로 모든 사람에게 각인되어 있다. 유럽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인구가 16만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이 작은 도시는 동유럽과 서유럽, 남유럽과 북유럽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잘차흐(Salzach)강이 흐르는 잘츠부르크 시가지는 세 개의 푸른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우뚝 솟은 중세의 호엔잘츠부르크 요새를 배경으로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바로크 건축물과 정원이 이 도시에 매력을 더해준다. 호엔잘츠부르크 요새에 올라서면 시가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알프스산맥을 배경으로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알프스의 샘물같이 맑고 경쾌한 노래가 어디선가 들릴 듯하다. 이러한 환경에서 1756년 1월 27일 음악의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가 태어났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J. S. Bach)가 죽은 지 5년이 지난 다음이었다.20세기 초반, 극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유럽의 심장 중의 심장, 잘츠부르크]라는 글에서,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같은 대음악가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잘츠부르크는 서쪽의 스위스와 동쪽의 슬라브 국가들 중간에, 또 북쪽의 독일과 남쪽의 롬바르디아(밀라노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북부지방)의 중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잘츠부르크는 도시와 시골의 중간이며, 과거와 현재의 중간이며, 바로크 황후의 기품과 순박한 농민과 같은 모습의 중간이다. 모차르트는 바로 이러한 모든 양상을 타고났다. 중부유럽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찾아볼 수 있으랴.”
기품 있는 바로크풍의 도시
▎영웅이나 수호신 같은 모습의 모차르트 동상.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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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Salzburg)는 ‘소금의 도성(都城)’이란 뜻인데 거대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소금광산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소금광산에서 얻는 수익과 알프스산맥을 경유하는 교역의 대가로 잘츠부르크는 중세에 부유한 도시로 발전했다. 이 ‘소금의 도시’를 기품 있는 바로크풍의 도시로 개조한 주인공은 라이테나우 대주교(1587~1612)였다. 그는 젊은 시절에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로마 시가지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하는 일을 보좌하다가 잘츠부르크의 대주교가 된 후에는 로마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시가지 중심부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했다. 그 일환으로 베네치아의 유명한 건축가 스카모치에게 대성당 설계를 맡겼다. 대성당 공사는 후임 호에넴스(1574~1619) 대주교 때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새로 건축 책임을 맡은 이탈리아 건축가 솔라리는 기존의 설계를 상당 부분 수정해 162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했다. 그러니까 모차르트가 태어나기 약 130년 전에 이곳에 처음으로 이탈리아로부터 바로크 양식의 건축이 본격적으로 이식되었다. 모차르트는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후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다.
대성당 뒤쪽에는 모차르트 광장이 펼쳐진다. 이 광장에 세워진 모차르트 동상은 마치 ‘잘츠부르크의 수호성인’ 같다. 이 동상은 뮌헨의 조각가 슈반탈러가 쟁쟁한 이탈리아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842년에 제작했다. 모차르트를 영웅적이고 신격화된 모습으로 표현했는데, 후기 고전주의 조각의 학구적인 엄정함 속에서 ‘모차르트’라는 인간의 참모습은 별로 느낄 수 없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아래의 잘츠부르크 시가지 중심. 왼쪽이 대성당이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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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태어난 집은 잘차흐강 변 안쪽 길 게트라이데가쎄(Getreidegasse) 9번지에 있다. 이 길은 잘츠부르크에서 제일가는 번화가이지만 좁은 골목길이다. 그것은 이 길이 중세에 조성된 이래 확장되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왔기 때문이다. 사실 게트라이데가쎄는 1140년경에 처음 조성되었으니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길에는 부유한 상인들, 귀족들, 관리들이 거주하는 건물들이 들어섰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집 건물 벽에는 ‘Mozarts Geburtshaus(모차르트 생가)’라는 큼직한 청동글씨가 백화점 간판처럼 부착되어 있다. 이 건물 앞 작은 광장에서는 늘 모차르트 순례자들의 긴 행렬을 볼 수 있어서, 좁은 게트라이데가쎄에서 모차르트 생가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모차르트 생가 건물은 1703년부터 하게나우어라는 상인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는 1747년에 남부 독일의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에서 온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인 레오폴트 모차르트 부부에게 이 건물의 4층을 세주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8년 동안 자녀를 일곱이나 낳았으나, 그중 막내인 볼프강과 누나 마리아 안나[애칭 난네를(Nannerl)]만 살아남았다. 한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교향곡과 협주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업적 중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것은 『바이올린 주법』의 출간이다. 이 책은 아들 볼프강이 태어난 해인 1756년에 출간되었고, 지금까지도 매우 훌륭한 바이올린 교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잘츠부르크가 낳은 모차르트, 모차르트가 낳은 잘츠부르크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공연장 앞에 모인 관객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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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에서는 모차르트와 관계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신성시되는 듯하다. 그래서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상표로 쓰는 ‘모차르트 초콜릿’도 이곳을 찾는 음악 순례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기념품이 된다. 또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걸고 연중 내내 열리는 여러 음악제는 연기를 뿜어내지 않는 잘츠부르크의 고유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중 특히 1920년에 시작된 잘츠부르크 여름 페스티벌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잘츠부르크가 낳은 위대한 아들을 기념하는 음악제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려는 계획은 1920년 이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야 연출가이자 흥행사 막스 라인하르트,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중심으로 서서히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는 바람에 유럽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바다가 없는 작은 내륙국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전후 이런 암울한 시기에 페스티벌은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 국민의 가치 상실을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페스티벌 기획자들은 이 대담한 프로젝트를 실현할 최적의 장소로 자연 풍광이 아름답고 건축적 매력도 갖춘 잘츠부르크를 선택했다.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표현처럼 잘츠부르크는 ‘유럽의 심장 중의 심장’이기 때문이었다. 이 페스티벌은 그 후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발전해 올해 101주년을 맞았다. 그렇다면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를 낳았고,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낳았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게트라이데가쎄 9번지 모차르트 생가.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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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35년이라는 모차르트의 짧은 생애 동안 잘츠부르크는 그의 주된 활동 무대가 아니었다. 그는 22세 때 신임 콜로레도 대주교의 궁정음악가로 고용되었지만 숨통을 조이는 듯한 대주교의 입김에서 벗어나 파리와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새 일자리를 찾다가 1781년에 고향을 완전히 떠났다. 10년 후 35세에 죽음을 맞을 때까지 고용된 음악가가 아니라 ‘프리랜스 음악가’로서 제국의 수도 빈(Wien)을 활동 무대로 삼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 잘츠부르크는 그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면 모차르트는 본의 아니게 잘츠부르크의 ‘수호성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모차르트 초콜릿과 기념품.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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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잘츠부르크는 ‘인간 모차르트만 낳았지 음악가 모차르트를 낳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잘츠부르크는 대주교청을 구심점으로 하는 활발한 문화 중심지로, 각지에서 몰려든 뛰어난 음악가들이 고용되어 활동하고 있었으니 이런 수준 높은 문화 환경이 어린 모차르트가 음악적으로 성장해나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또 빼어난 자연과 품위 있는 도시환경도 간과할 수 없다. 잘츠부르크를 전체적으로 보면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자연과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큰 틀 속에서 조화롭게 공존하는데, 이러한 도시의 모습과 모차르트의 음악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즉, 자연미, 친밀함과 웅장함의 우아한 조합,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조화 등이 아닐까?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