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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Eisenstadt)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활동한 시골 도시 

평화로운 바로크풍의 시골 도시 아이젠슈타트의 역사에서 예술적으로 가장 위대한 시기는 그가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일한 30년이다. ‘교향곡의 아버지’, ‘현악4중주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하이든은 음악사에서 볼 때 ‘귀족의 고용인으로서의 음악가’라는 사회적 체제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순응한 마지막 대가였다.

▎아이젠슈타트의 중심을 이루는 에스테르하지 궁. / 사진:정태남
오스트리아 동쪽 끝에 있는 부르겐란트주(州)는 헝가리와 경계를 이룬다. 부르겐란트의 주도 아이젠슈타트는 수도 빈에서 남동쪽으로 80㎞가량 떨어져 있고 인구는 1만3000명 조금 넘는다. 아이젠슈타트는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이 30년 동안 활동한 곳이다. ‘아이젠슈타트(Eisenstadt)’는 ‘철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름만 들으면 하늘에 연기가 자욱한 산업도시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곳은 도시명이 주는 딱딱한 어감과 달리 매우 매력적이고 평화로운 시골 도시다. 또 이곳의 순박한 사람들과 예로부터 내려오는 아기자기한 집들, 주변에 펼쳐진 한없이 넓은 포도밭, 목장, 광활한 숲, 호수 등은 이 시골 도시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하이든이 활동하던 당시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하이든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리라.

아이젠슈타트 시내에 들어서면 하이든 음악회 포스터가 유난히 많이 보인다. 하이든 거리, 하이든 집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이든 와인도 눈에 띈다. 이 도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건물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전인데, 궁전 안에 들어서면 하이든의 이름을 딴 음악당 하이든잘(Haydnsaal 하이든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이젠슈타트 중심부에서는 에스테르하지 궁(Schloss Esterházy)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도시에서 꼭 봐야 할 곳 중에서 하이든이 살았던 집도 빼놓을 수 없다. 오스트리아 국기와 꽃으로 예쁘게 단장된 이 집은 ‘하이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앞길은 그의 이름을 딴 ‘하이든 거리’인데 에스테르하지 궁과 직선으로 연결된다. 에스테르하지 궁은 헝가리계 명문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본산이었다.

하이든과 에스테르하지 가문


▎하이든이 30년 동안 봉직한 에스테르하지 궁 / 사진:정태남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탈리아에서는 대중이 오로지 오페라에만 빠져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 간 우열을 다투는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독일의 경우, 음악의 중심지였던 드레스덴에서는 교향곡보다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더 각광을 받았고, 북부 프로이센에서는 프리트리히 대왕이 베를린을 음악의 중심지로 만들었지만 왕 자신은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 음악에 심취했다.

반면에 오스트리아에서는 ‘교향곡’이라는 새로운 기악 예술이 확립되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기악 음악에 빠져 있었으며, 빈의 궁정은 음악가와 그들의 음악을 적극 후원했다. 당시 부유한 귀족들은 대부분 사립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들의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도 악기를 다루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또 그들은 예술적 야심이 대단하여, 저택 내에 호화스러운 오페라극장이나 연주실을 두기도 했고, 귀족 가문들은 오케스트라로 서로 경쟁했다. 이러한 귀족 가문들 중에서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가장 부유하고 권세가 있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하이든이 이 막강한 가문과 처음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그가 29세 때였다.

하이든은 1732년에 수도 빈에서 동쪽으로 45㎞ 떨어진 작은 도시 하인부르크 근교의 작은 시골 마을 로라우(Rohrau)에서 태어났고, 6세 때 하인부르크에서 소년 성가대원이 되었다. 8세가 되던 1740년, 빈에 있는 슈테판 대성당의 음악감독이 우연히 하인부르크에 들렀다가 소년 성가대에서 어린 하이든이 부르는 노래에 감명을 받고는 당장 그를 빈으로 데려갔다. 하이든은 슈테판 대성당 소년 성가대에서 봉직하다가 17세 때 변성기를 맞아 소년 성가대를 그만둬야 했고, 그다음에는 혼자서 매우 힘들게 살아가야 했다. 그는 음악 선생, 떠돌이 악단 연주자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가 보헤미아 귀족 모르친 백작의 오케스트라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재정 압박으로 이 오케스트라가 해산되자 모르친 백작은 하이든을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에게 소개했다. 이리하여 1761년에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오케스트라를 맡게 되면서 풍족한 급료를 받았다. 단, 후작이 의뢰하는 음악은 무엇이든지 작곡해야만 했으며 그의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하이든잘(하이든홀) 입구. / 사진:정태남
그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작곡한 교향곡이 바로 [교향곡 6번]이다. 이 곡은 1악장의 첫 부분 아다지오가 아침 해가 돋는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여 나중에 ‘아침’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이 작품에 이어서 그는 교향곡 7번, 8번을 작곡했는데, 이 두 교향곡에는 ‘정오’, ‘저녁’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하이든은 이 세 개의 교향곡을 작곡할 때 오케스트라 단원 중 뛰어난 독주자들의 실력도 고려했으며 동시에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취향에도 맞고 또 그가 직접 연주할 수도 있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762년,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사망하자 동생인 니콜라우스 후작이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못지않은 웅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또 그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고 싶었는지 기존의 에스테르하지 별장을 대대적으로 손보아 오페라극장, 연주실, 예배당, 넓은 정원 등을 갖춘 웅장한 궁으로 증축했고 기존 에스테르하지 오케스트라를 크게 확대했다.


▎하이든 와인. / 사진:정태남
그는 음악에도 매우 소질이 있어서 바리톤(Baryton)이라는 악기를 즐겨 연주했는데, 하이든은 그를 위하여 바리톤 음악 200여 곡을 썼다. 하이든은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가 사망한 1790년까지 일하는 동안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특권과 지위가 주어진 ‘존경받는 하인’이었다. 그렇지만 영향력이 있는 귀족 가문에 속해 있었던 덕택에, 그의 작품은 가장 권위 있게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다.

아이젠슈타트의 ‘수호성인’


▎하이든의 영묘가 있는 베르크 성당. / 사진:정태남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같은 시대를 살았다. 모차르트보다 24살 연상이었던 하이든은 불안정하고 불규칙적인 생활을 한 모차르트와 달리 참을성 있고 겸손했으며, 일생을 평탄하게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순응했다. 즉, 음악사에서 볼 때 하이든은 ‘귀족의 고용인으로서의 음악가’라는 사회적 체제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순응한 마지막 대가였다.

약 30년 동안 계속된 아이젠슈타트 시기가 끝난 다음 하이든은 자유로운 몸으로 더 넓은 세계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영국을 두 차례 방문했다. 런던에서 그는 대규모 걸작을 발표하여 영국 청중을 사로잡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국왕 조지 3세로부터 영국에 영주하라는 제의까지 받았다. 아이젠슈타트에서는 ‘하인 신분’이었지만 말년에는 모든 계층으로부터 존경받는 유명 인사가 되었으니 엄청나게 신분이 상승했던 셈이다.


▎에스테르하지 궁과 연결된 하이든 거리. 오른쪽이 하이든의 집이다. / 사진:정태남
그는 평생 100개가 넘는 교향곡을 썼고 또 현악4중주를 확립했기 때문에 ‘교향곡의 아버지’, ‘ 현악4중주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는 교향곡뿐만 아니라 협주곡, 현악4중주와 소나타 등 고전주의 형식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낭만파의 싹을 트게 했으니 모차르트, 베토벤에 이어 슈베르트도 그에게 음악적으로 많은 빚을 진 셈이다.

그는 1809년 빈에서 7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고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세월이 흐른 1954년에 그의 유골은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 성당에 특별히 마련된 영묘에 안장되었다. 어떻게 보면 하이든은 마치 수호성인처럼 이 시골 도시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아이젠슈타트(Eisenstdat)’라는 도시명을 아예 ‘하이든슈타트(Haydnstadt, 하이든도시)’로 바꾸는 것이 좋을 듯싶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도 여러 권이 있다. (culturebox@naver.com)

202205호 (202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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