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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스페인 사군토(Sagunto) 

한니발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군툼 포위전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란후에스 협주곡]을 작곡한 호아킨 로드리고의 고향 사군토의 옛 이름은 사군툼(Saguntum)으로, 로마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하는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의 도화선이 된 ‘사군툼 포위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지중해 소도시 사군토 시가지. / 사진:정태남
스페인 동해안의 유서 깊은 도시 발렌시아(Valencia)에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사군토(Sagunto)로 향한다. 사군토는 에브로강이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대략 100㎞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행정구역상 발렌시아에 속하는 사군토는 웬만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아주 작은 도시이다.

호아킨 로드리고의 고향


사군토에 도착하여 이 도시의 심장부인 크로니스타 샤브레 광장에 들어서자 어느 악대가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연주를 마친 악대 지휘자에게 이 곡에 대해 물어보니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가 작곡한 [사군토 찬가]라고 한다. 로드리고는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란후에스 협주곡]의 작곡자로 유명한데 왜 그가 이 무명의 도시를 찬양하는 곡을 썼을까? 그 이유는 사군토가 바로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 광장에는 로드리고 생가가 보존되어 있고, 그에게 바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 조각된 로드리고의 옆모습과 기타의 형상이 눈길을 끈다.

베토벤은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했다. 그만큼 기타는 다양한 음색을 낼 수 있는 악기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타는 클래식기타이다. 그런데 연주 악기로서 기타는 다른 악기에 비해 음량이 부족하다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기 때문에 소규모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더라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항상 문제였다. 이러한 이유로 기타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단지 소품 연주를 위한 악기로만 취급받아왔으며, 대부분의 음악가도 기타를 오케스트라와 협연이 가능한 악기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호아킨 로드리고는 달랐다. 그는 다른 음악가들이 보지 못했던 기타가 지닌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기타를 위한 곡을 많이 작곡했으며 기타의 특질을 깊이 이해하여 기타와 오케스트라가 협연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아놓았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최고의 클래식기타 명곡 중 하나로 손꼽히는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란후에스 협주곡]이다.


▎사군토 역에서 본 사군토의 언덕. / 사진:정태남


1901년에 사군토에서 태어난 로드리고는 어렸을 때 디프테리아를 앓고 나서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이런 난관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작곡가로 발돋움했다. 또 빛이 없는 어둠의 세계에서 기타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주역이라 할 수 있다.


▎작곡가 로드리고 기념비. / 사진:정태남
작곡가 로드리고의 고향이라는 사실 외에 사군토에는 여행자들을 유혹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광장 너머 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 로마의 반원형 극장과 성곽 유적을 보면 이곳이 역사의 뿌리가 매우 깊은 곳임을 직감할 수 있다. 사군토의 옛 이름은 사군툼(Saguntum)으로, 로마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즉, 제2차 포에니전쟁(BC 218~201)의 도화선이 된 ‘사군툼 포위전’이 벌어진 곳이니 말이다. 언덕 위에 올라서서 여기저기 흩어진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살펴보면서 그 당시의 상황을 머리에 한번 떠올려본다.

사군툼 공방전


▎고대 로마의 유적이 있는 언덕으로 오르는 길. / 사진:정태남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로마는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도시국가에 불과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세력을 키워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나서는, 바다로 눈을 돌려 지중해의 제해권과 교역권을 장악하고 있던 부유한 강대국 카르타고와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33년까지 약 130년 동안 세 차례 전쟁을 벌였는데 이것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한다.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은 로마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에서 격돌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이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 강화조약에 서명해야만 했다. 즉, 시칠리아를 완전히 포기하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것이다. 또 이 조약에는 카르타고가 로마의 동맹국에는 절대로 싸움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도 있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섬을 잃었지만 오래전부터 확보하고 있던 히스파니아(Hispania, 스페인의 옛 지명)를 본격적으로 개척하여 로마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도 남을 정도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히스파니아 개척의 주역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와 싸웠던 하밀카르 바르카 장군. 그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장남의 이름은 한니발(Hannibal), ‘바알(Baal) 신의 아들’이란 뜻이다. 로마에 대해 적개심에 불타던 한니발은 26세에 총사령관이 되어 감히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로마와 동맹시 간의 연합체제를 와해한 다음 로마를 고사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갈리아(현재의 프랑스) 남부를 우회한 다음 알프스산을 넘어 직접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하는 전략을 구상했던 것이다.


▎언덕 위 로마의 유적 사이로 보이는 사군토 시가지 중심. / 사진:정태남
제1차 포에니 전쟁 후 히스파니아에서 로마와 카르타고의 경계선은 에브로강으로 확정되었는데,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군툼의 위치는 에브로강 이남, 즉 로마의 방어선 밖이었다. 한니발은 먼저 눈엣가시 같은 사굼툼을 노려봤다. 당시 사군툼은 부유한 도시였기 때문에 한니발은 이곳을 먼저 점령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또 이곳에서 약탈한 엄청난 전리품으로 본국 카르타고에 있는 전쟁반대론자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도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전격적으로 사군툼을 포위 공격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굳건한 성곽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사군툼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니발 군대가 방어망을 하나씩 하나씩 뚫고 들어가자 사군툼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로마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질 무렵 한니발은 사군툼 시민들에게 목숨은 살려줄 테니 무장 해제하고 옷 두 벌만 갖고 모두 떠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도시를 스스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니발은 사군툼을 완전히 함락하고 성인들이란 성인은 모조리 처형했다. 이리하여 난공불락의 사군툼은 8개월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일부 복원된 로마의 반원형 극장 유적과 그 너머 보이는 로마의 유적 위에 세워진 중세 성곽. / 사진:정태남
동맹시가 침략을 당했을 때 동맹의 맹주인 로마는 이 문제를 외교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상대방과 협상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음을 나중에 깨닫고 마침내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시작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한다.

한니발은 기다렸다는 듯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동생 하스드루발에게 히스파니아를 지키게 하고 거의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과 50마리가 넘는 코끼리를 이끌고 에브로강을 건넌 다음 대장정을 시작했다. 한니발의 침공으로 로마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여러 번 맞았고 또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결국에는 히스파니아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여 한니발의 기세를 완전히 꺾었다.

한편 한니발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바알 신전에 가서 로마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곤 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후세에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즉, 로마 측은 전쟁을 도발한 자가 바로 한니발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또 카르타고 측도 바르카 가문이 개인적으로 품은 원한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을 강조하여 국가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사군토 언덕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은 모두 그 당시의 유적은 아니고 후세에 세워진 로마 건축물들이지만, 그래도 그 처절했던 아비규환의 전투 상황을 상상하게 해준다. 게다가 날씨가 흐려서 그 처절함이 더욱더 깊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로드리고의 [사군토 찬가]는 혹시 그 당시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버티던 사군툼 시민들의 정신을 찬양한 음악이 아닐까 하는 억측도 해본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

202302호 (2023.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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