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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EENK 대표 

잉크로 그리는 미래 

정소나 기자
소재의 대비·은은한 컬러 팔레트·드라마틱한 실루엣을 앞세워 패션계를 평정한 브랜드가 있다. 액세서리로 시작해 짧은 시간 안에 파리패션위크에서 컬렉션을 선보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을 준비하는 잉크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혜미 대표는 지난해 취향과 정체성이 집약된 플래그십 스토어 ‘메종 잉크’를 오픈했다.
이태원 인근의 언덕을 오르면 얇은 벽돌을 쌓아 만든 세모난 건물이 나타난다. 건축가 승효상의 사무소인 이로재(Iroje)가 내부를 디자인한 잉크의 플래그십 스토어 ‘메종 잉크’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방과 슈즈가 자리한 작은 계단, 프라이빗하게 쇼핑을 즐길 수 있는 널찍한 피팅룸, 박민하 작가의 그림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벤치, 오래된 책의 냄새를 풍기는 디퓨저 등 잉크의 컬렉션을 다채롭게 만끽할 수 있는 공간과 요소들이 이어진다.

지난 2022년 5월 오픈한 ‘메종 잉크’는 패션 브랜드 잉크를 이끄는 이혜미 대표가 자신의 취향과 브랜드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공간이다.

잉크는 한섬, 제일모직, 코오롱 등에서 10여 년 동안 디자이너로 활동해온 이혜미 대표가 알파벳을 키워드로 하는 일명 ‘레터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이는 패션 브랜드다. 그가 이끄는 잉크는 패션 피플 사이에서 먼저 감각을 인정받아 출시하는 아이템마다 인기를 모으며 어느새 글로벌 시장에서 러브콜을 받는 토털 패션 브랜드로 성장했다.

지난 5월 12일, 메종 잉크에서 패션과 문화, 의류와 오브제의 영역을 대담하고도 즐겁게 넘나드는 디자이너 이혜미 대표를 만났다.

잉크(EENK)라는 브랜드 네임이 독특하다.

어릴 적 아버지가 인쇄소를 운영하셨다. 잉크 냄새를 맡으며 활자를 많이 보며 자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자라오며 쭉 영향을 줬던 것 같다. 인쇄소에 놀러가면 볼 수 있는 폰트나 광고 이미지에 매료되었고, 자연스레 활자나 이미지를 인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INK’를 브랜드 이름으로 떠올렸다. 여기에 비주얼적인 면모와 언어유희를 더해 ‘I’를 내 이름에 가장 많이 쓰이는 알파벳 E 두 개로 바꾸어 브랜드명을 정했다. 브랜드를 통해 취향과 감성을 공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매 시즌 알파벳을 활용한 레터 프로젝트를 메인으로 브랜드를 전개 중인데.

폰트 자체에 담긴 디자인적 요소를 활용해 브랜드를 전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레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A에서 Z까지 알파벳 이니셜을 중심으로 순차적으로 테마나 아이템을 정하고, 그다음 알파벳 순서에 대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콘셉트다. 스물여섯 글자가 완성되는 순간을 위해 A를 남겨두고 2014년, B for Beanie라는 타이틀로 비니를 장식적으로 커스터마징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H와 I까지 핸드백과 아이폰 케이스를 선보이며 액세서리 아이템을 전개했고, I for Indigo, J for Jean 캡슐 컬렉션을 론칭해 의류 라인도 첫선을 보였다. 2018 FW 시즌에 본격적으로 K for Knit 컬렉션으로 서울패션위크 제너레이션 넥스트에서 첫 런웨이를 선보이며 토털 컬렉션을 전개하게 됐다. 얼마 전 열린 파리패션위크 2023 FW 컬렉션에서는 정의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에 헌정하는 X for the letter X를 선보였다. 이처럼 알파벳에서 영감을 받은 테마의 컬렉션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며 레터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

레터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가 있나.


▎World Wild West라는 콘셉트로 진행된 2023 SS 캠페인 이미지와 컬렉션 룩. 웨스턴 시대의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에서 영감을 받았다.
프로젝트를 준비할 당시, H&M을 비롯한 패스트 패션이 우리나라에 막 유입돼 패션계가 잔뜩 긴장할 때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소모되는 디자인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더해지는 아이템을 선보여 수집하고 소장하는 기쁨을 전하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 알파벳 A로 아카이브 전시를 할 때 B부터 Z까지 모든 아이템을 컬렉팅한 사람들을 만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레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알파벳 K를 활용해 선보인 니트 컬렉션을 잊을 수 없다. 서울패션위크 제너레이션 넥스트의 런웨이는 지원을 하고 심사를 거쳐 선발이 돼야 오를 수 있는 무대이다. 그런데 그 당시 MD 실장의 착오로 본의 아니게 패션위크에 신청이 됐고, 쇼를 할 수 있는 브랜드로 덜컥 선발 됐다. 이것도 기회라는 생각으로 급하게 컬렉션을 준비했다.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큰 부담 없이 첫 쇼를 무대에 올렸다. 우연한 기회에 준비한 컬렉션이 큰 호응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는 계기도 됐고, 액세서리 브랜드에서 RTW 브랜드로 인식될 수 있는 큰 전환점이 됐다. 지금도 그 컬렉션 옷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 요즘에도 자주 입곤 한다.

파리패션위크에 데뷔하며 글로벌 브랜드로의 도약을 알렸다.

2022 FW 컬렉션부터 서울패션위크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쇼를 준비 중이었다. 그때 서울시가 파리패션위크 공식 트레이드 쇼인 ‘트라노이’와 협약을 맺고 K패션의 유럽 진출을 지원 하기 시작했는데, 쇼를 진행할 수 있는 4개 브랜드 중 하나로 뽑혀 파리의 브롱냐르 궁에서 쇼를 진행하게 됐다. 2019년에 분더숍에서 개최한 쇼가 마지막이어서 코로나 이후 첫 쇼이기도 했지만, 파리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는 모든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 쇼가 끝나고 곧장 서울에 전화해 다음 시즌에는 파리에서 단독 쇼를 하겠노라고 선포했다. 때마침 운이 좋았는지 캠페인 이미지 촬영을 함께 진행했던 뉴욕의 유명한 스타일리스트가 우리와 작업하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냈다. 다음 쇼를 파리에서 하라는 신호라고 믿으며 열심히 준비했고, 지난 시즌에 이어 2023 SS 시즌에도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유럽 시장에서 새로운 바이어들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2022 FW 파리패션위크에서 싱어송라이터 ‘카를라 브루니’가 등장해 화제를 모았는데.

파리에서 신인으로 데뷔 컬렉션을 치르는 만큼 뭔가 주목을 끌 수 있는 마케팅적인 포인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월드 와일드 웨스트(World Wild West)’라는 슬로건에 어울리도록 뮤지션의 라이브 퍼포먼스로 쇼의 분위기를 웨스턴 시대의 무드로 물들이고 싶었는데, 극적으로 카를라 브루니와의 협업이 성사됐다. 이렇게 유명한 분이 흔쾌히 패션쇼에 함께해줄 만큼 패션 시장이 열려 있다는 것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파리 첫 런웨이에는 300명 넘는 관중과 바이어가 참석했고, 공간의 제약으로 쇼에 입장하지 못한 관중도 다수였을 정도로 기대 이상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코로나 시기에 오히려 국내 매출이 성장했다.

코로나 때 외출을 자제하고, 재택근무가 늘면서 편안한 스타일이 대세였다. 잉크는 편하게 입는 옷이 아니라 멋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는 브랜드이기에 특히 긴장을 많이 했다. 그런데 오히려 패션에 대한 갈증이 쌓여서인지 지난해 전년 대비 25%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매출이 늘었다.

국내를 넘어 중국, 홍콩 등 해외에서의 반응이 뜨거운데.

중국 시장이 가장 많이 성장했는데 코로나 사태 중에도 매년 꾸준히 매출이 늘었다. 이번 시즌부터 일본 시장에도 진출했는데 일본을 대표하는 3대 편집숍에 모두 입점했고, 2023 FW부터 오프라인에서도 잉크 제품을 만날 수 있다. 홍콩 IT와 레인 크로포드 등에도 입점하는 등 아시아 시장에서는 인지도가 높아져 매년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계속해서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고, 파리패션위크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유럽 진출을 추진 중이다.

지난 연말 국내 매출과 해외 수출, 고용 성장과 기업 경영 능력을 평가하는 ‘대한민국 패션대상’ 행사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은.

가문의 영광이다. (웃음) 처음엔 수상 소식을 전혀 모르고 행사에 참석했다. 입장하니 맨 앞자리로 안내했고 유명 패션 기업 대표님과 함께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벌써 이런 상을 받아도 되나 싶어 협회에 내게 상을 주는 이유를 물었더니 ‘패션계 인사들의 추천을 많이 받았다’라고 답해주셨다. 지난 몇 년간 쉼 없이 열심히 내달린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국내 최초로 VR 컬렉션을 진행한 것도 패션계에서 핫 이슈였다.

공들여 준비한 청담동 쇼룸 오픈을 앞두고 코로나가 터졌다. 사람들을 초대할 수도 없고, 쇼룸에서 진행하려 했던 컬렉션도 할 수 없으니 쇼룸 오픈을 VR로 해보면 좋을 듯했다. 때마침 뜻을 같이하는 홍보 대행사를 만났다. 그들의 도움으로 청담동 쇼룸을 온라인에서 그대로 구현하고 2020 FW 룩을 버추얼 컬렉션으로 소개했다.

VR 키트가 담긴 인비테이션을 전달해 홍보를 하고 오픈을 했는데 사이트를 운영한 이후로 최대 방문객 수를 경신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고 자연스럽게 매출도 올랐다. 디지털 패션의 선구자라는 찬사를 안겨준 잊을 수 없는 프로젝트다.

짧은 시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하다.

팀워크가 가장 큰 힘이다. 잉크에는 나와 비슷한 경력의 실장급 팀원이 5명이나 있다. 다들 쟁쟁한 패션 회사 출신으로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로는 업무 퀄리티가 굉장히 높은 편이다. 나 혼자라면 절대 이만큼 성장할 수 없었다. 힘들 때마다 의논할 수 있는 실장들이 있어 큰 힘이 됐다. 실장들이 각 팀의 업무 퀄리티를 전반적으로 끌어올리고, 업무 욕심이 남다른 팀원들이 최선을 다해 뒷받침한 덕분에 시너지효과를 내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브랜드와 잉크의 차별점은.

실루엣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싶다. 지금까지 패턴을 카피해서 그대로 쓰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뭔가 참고하고 싶은 패턴이 있으면 패턴을 뜬 다음 가봉을 보면서 우리 식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실루엣을 만든다. 매 시즌 출시되는 더블 재킷도 매번 새로 패턴을 뜨고 가봉을 다시 보는 식이다. 아이템 하나에 패턴을 기본 4~5번 수정해 상품으로 출시할 정도로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퀄리티만은 타협할 수 없어 대충 만드는 옷이 없다.

가까운 미래에 계획하는 일이 있다면.

5월 25일에 오랜만에 서울에서 쇼를 진행한다. 2023 FW 컬렉션에서 협업했던 권오상 작가의 롯데 갤러리 개인전 오프닝에 맞춰 다시 한번 패션쇼를 개최하고, 작가님의 작품 요소를 적용한 컬래버레이션 아이템을 편집숍 엘리든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글로벌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이 3건 정도 예정 되어 있고, 맨즈 라인 론칭도 계획 중이다.

앞으로의 목표를 들려달라.

디렉터가 나이 들면서 함께 나이 드는 브랜드가 아니라 늘 젊고 신선한 브랜드로 남고 싶다. 또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해 시대를 거듭해도 사라지지 않는 하우스 브랜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인 디자이너를 육성하는 펀드를 만들어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을 지원하고 멘토링을 해주는 역할도 꼭 해보고 싶다.

- 정소나 기자 jung.sona@joongang.co.kr _ 사진 최기웅 기자

202306호 (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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