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PJ살롱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09) 

구속할 수 없는 정신 

버번과 켄터키 사람들의 자유를 찾아 떠난 위스키 여행, 그 두 번째 이야기.

▎버번위스키를 대표하는 유서 깊은 짐빔(Jim Beam) 증류소.
켄터키 정신을 대변하는 무하마드 알리

어렵게 도착한 켄터키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 버번의 수도인 루이빌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다만 사방으로 내 시야에 아무런 산이 보이지 않는 미국 중부 특유의 풍광은 늘 산이 있는 지형에 익숙한 내게는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금융, 제련, 석유 등 버번 이외에도 여러 가지 산업이 조화롭게 발달한 켄터키의 활력을 오가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보며 체감했다.

켄터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사람 좋아 보이는, KFC의 샌더스 대령일 것이다. 하지만 켄터키 현지에서 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이구동성으로 이 사람을 이야기할 것이다. 바로 무하마드 알리! 우리가 아는 세계 챔피언 캐시어스 클레이 바로 그 사람이며, 루이빌 국제공항의 공식 명칭도 무하마드 알리 국제공항이다. 1970년대 대한민국 ‘국민학생’들이 가지고 놀던 양철 딱지 중 가장 높은 계급의 딱지가 그의 본명인 클레이일 정도로 그는 당시 전 세계적인 스타였다. 루이빌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가도 무하마드 알리 블리바드인 것처럼, 그는 켄터키와 켄터키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켄터키주의 슬로건이 바로 그의 ‘구속할 수 없는 정신(Unbridled Spirit)’에서 나왔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복싱 세계 챔피언까지 오르며 개인적으로는 안주할 수 있는 미국 주류사회로의 편입을 거부하며, 일생 동안 자유와 평등의 의지를 불태운 것이 아마도 켄터키인들의 마음속 어딘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구속할 수 없는 정신’이 바로 미국 사회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전쟁이었던 금주법 시대의 한가운데 있었던 버번의 입장과 같은 것이다.


1933년 수정 헌법 21조가 비준돼 요란했던 금주법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주류와 비주류 간 차별과 대립이 온존했던 1940년대에 켄터키 루이빌에서 태어난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루이빌 빈민가의 청년은 인종차별에 반대하여 올림픽 금메달을 루이빌강에 던져버렸다고 알려졌다. 그 후 베트남 반전 운동부터 세계 챔피언 타이틀 박탈까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업적을 인정받아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센테니얼 스타디움에 섰을 때 마침내 모든 미국인, 특히 고향인 켄터키인들로부터 그간의 삶을 인정받고 그제서야 그들의 영웅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아직도 그때, 센테니얼 스타디움에 있던 모든 미국인이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보낸 감동의 기립 박수를 잊지 못한다.

우드포드 리저브의 매력 속으로


▎무하마드 알리는 루이빌에서 가장 번하한 중심가의 이름을 무하마드 알리 블리바드로 명명할 정도로 켄터키와 켄터키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루이빌에서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규모의 켄터키 더비 경마가 열리고, 루이빌 남쪽에는 처칠다운스(Churchill Downs)라는 경마장이 있다. 그래서 켄터키에 온 첫날 저녁은 경마장 내에 있는 유서 깊은 Matt Winn’s라는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 먹기로 했다.

이곳의 이름이 처칠다운스라고 하길래 처칠이 죽은 곳인가 싶어 관계자들에게 물어보니 단지 창업자의 가족이 처칠과 같은 성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미국이나 영국에 있는 큰 경마장은 대부분 지명이나 창업자의 이름 뒤에 다운스를 붙여 그 명칭으로 쓴다. 다운스(Downs)는 잉글랜드 남부의 낮은 구릉지대를 뜻하는데, 말 달리기에 최적이라 그리 불린다. 켄터키 더비는 매년 5월 첫째 토요일에 열리는, 3살짜리 서더브레드 경주마들의 대회인데, 이 한 주 동안은 루이빌의 모든 것이 켄터키 더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할리우드 스타부터 재력가, 유력 정치인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와 만나고 즐기고 자신이 베팅한 경주마에 대고 소리를 질러 댄다.

처칠다운스에 도착하니 워낙 부지가 넓어 입구에서부터 직원이 마중 나와 전동차로 레스토랑이 있는 본관까지 에스코트해줬다. 도착해서 메뉴를 훑어보다가 먼저 처칠다운스에서 유래한 칵테일로 유명한 민트 줄렙을 주문했다. 민트 줄렙은 다른 버번으로도 만들 수 있지만, 원조인 이곳에서는 반드시 우드포드 리저브라는 버번을 사용해서 만든다. 이를테면 켄터키 더비 공식 지정 칵테일이고 위스키인 셈이다. 우드포드 리저브는 해마다 켄터키 더비 스페셜 릴리스를 발매하는데, 그해의 우승마를 주제로 바뀌는 라벨의 디자인이 역동적이라 이를 모으는 수집가도 많다. 나는 늘 좋은 위스키는 좋은 사람들과 그때그때 마셔버리는 편이라, 남아 있는 것이 없는데 최근 선물받은 2020년 스페셜 릴리스 한 병을 언제 오픈할까 고민 중이다. 참고로 이해의 우승마는 ‘진짜배기’라는 뜻의 오센틱( Authentic)이다.

베르사유에 있는 우드포드 리저브는 켄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증류소이다. 그렇다. 바로 프랑스 베르사유와 같은 지명이다. 현재의 루이지애나주를 포함해 미국 중부 전체를 칭할 때의 구(舊) 루이지애나에는 정말 많은 프랑스식 지명이 있지만 그 이름에 걸맞은 풍광은 사실 많지 않다. 반면, 베르사유는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면 될 정도로 자연과 증류소가 하나로 녹아든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규모의 켄터키 더비 경마가 열리는 처칠다운스(Churchill Downs) 경마장.
전편에서 위스키로우(Whiskey row)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증류소가 올드포레스터라고 했는데, 소유주인 브라운포맨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버번이 바로 이 우드포드 리저브이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버번이 올드포레스터라면, 우드포드 리저브는 스카치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맛이다. 그 이유는 증류기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곳은 다른 버번 증류소가 사용하는 대량생산을 위한 일반적인 칼럼식 증류기가 아닌, 주로 스코틀랜드 싱글몰트 증류소에서 쓰는 허쉬 미니 초콜릿 같은 물방울 모양의 포트 스틸(Pot Still) 증류기를 사용한다. 다른 버번보다 좀 더 미묘하고 섬세한 맛을 끌어내기 위하여 웬만한 스카치 증류소보다도 증류기의 목을 더 길게 하고, 증류 횟수도 일반적인 스카치나 버번의 2회가 아닌 총 3회에 걸쳐 증류한다. 그리하여 한 땀 한 땀 버번의 정수를 모아낸, 그야말로 부드러움의 끝판왕이다.

민트 줄렙을 주문하니 웨이터가 나를 보고 ‘뭘 좀 아네’ 하는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매년 켄터키 더비 주간에 처칠다운스의 경주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이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는 프리미엄이 1만 달러가 넘는다며 공치사를 한다. 아마도 팁을 좀 두둑하게 달라는 뜻일 게다. 지금 미국에서는 팁으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고 어차피 주어야 할 팁이기에 대신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고 사진도 여러 장 부탁했다. 이 친구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농담이 아니라 이 자리의 뷰가 너무 좋아 엄청난 재력가나 할리우드 스타라면 그 시즌에 그 정도는 충분히 지갑을 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스테이크와 곁들이 음식 모두 훌륭했지만, 역시 내게는 스테이크와 함께하는 버번 한잔이 가장 좋았다. 내가 무척 좋아하지만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알싸하면서 진한 맛의 I.W.Harper라는 위스키를 주문했는데 역시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늦은 밤에 나오면서 해 질 녘부터 식사를 하느라 바라만 보고 있었던 근사한 경주 트랙과 민트 줄렙, 서더브레드 경주마들의 삶을 좀 더 느껴보고자, 다음 날 아침의 처칠다운스 투어를 예약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주한 짐빔 증류소


▎50센트 동전을 바닥으로 삼고 구리를 두드려 만든 수제 위스키 잔.
이튿날 아침 호텔 입구에서 전날 밤 발레파킹으로 맡긴 내 렌터카를 기다리고 있는데, 20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벨맨에게 물어보니 차가 방전되어서 충전 중이라고 했다. 어쩐지 어제 그 젊은 친구가 좀 덜렁거린다 싶더니만, 아마도 라이트를 켜두고 문을 닫은 것 같다. 투어 예약 시간이 다 되어 더는 못 기다린다고 하니, 정말 미안하다면서 자신들의 잘못이니 호텔 셔틀버스로 처칠다운스까지 데려다주고, 충전이 끝나면 내 차도 처칠다운스로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처칠다운스 투어가 끝나고 30분을 기다려도 호텔에서 차가 오지 않기에 또다시 전화를 해보았더니 차가 또 방전되었다는 것이다. 한참을 더 기다려 자동차를 받았는데, 이제는 친해진 그 벨맨이 내게 오늘 어딜 갈 거냐고 물으며 이 차로는 멀리 가지 말라고 했다. 결국 그 벨맨의 말을 믿고 공항에 있는 렌터카 회사로 찾아가 차를 반납하고 새로운 차를 골랐다. 미국 차 대신 이번엔 믿을 수 있는 익숙한 소나타로 바꿔 예정보다 늦었지만 서둘러 바즈타운으로 달려갔다. 여행 시작부터 계획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여기는 켄터키가 아닌가. 여러 가지 일이 있더라도 켄터키의 버번으로 호흡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바즈타운,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도시라는 버번의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웬걸 또다시 엄청난 폭우가 몰아쳐 소나타 앞 유리가 깨질 듯 빗방울이 거세지고 앞이 안 보여 운전을 못 할 지경이 되었다. 급한 대로 비를 피해 가장 가까이 있는 증류소에 들어갔는데 이곳이 바로 짐빔(Jim Beam)이었다. 유서 깊은 이 증류소에는 외관부터 근사한 ‘The Kitchen Table’이라는 바가 있는데, 나처럼 비를 피해 들어온 듯한 현지인도 많았다. 비를 맞고 조금 쌀쌀해진 터라 다들 따뜻한 수프와 치킨을 먹고 있어서 나도 같은 것을 주문해보았다.

‘Kentucky Burgoo’라는 수프는 채소와 고기를 넣고 끓인 전형적인 남부 음식인데, 우리의 김치찌개처럼 집집마다 지방마다 다른 레시피로 은근히 자존심을 세우는 음식이라 꽤 맛있었다. 정말 맛있었던 것은 같이 시킨 ‘진짜’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었다. 치킨을 반 마리만 시켰지만 역시 미국이라 한국의 치킨보다 두 배는 큰 사이즈였다. 잘 튀긴 닭고기에 꿀 소스를 겉에 입힌 일종의 양념치킨이었는데 내 입맛에 정말 잘 맞았다. 치킨 무 대신 바닥에 깔린 그린빈이 제대로 된 마리아주를 보여주었고, 짐빔 하이볼 한잔이 든든하게 받쳐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한 끼가 완성되었다. 수프와 치킨, 두 가지 모두에 넉넉히 짐빔 버번이 들어갔다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으니, KFC를 만든 샌더스 대령도 이보다 맛있는 레시피를 만드느라 머리를 많이 썼을 것 같다.


▎146회 켄터키더비 스페셜 릴리스(2020) 위스키, 이때 우승마의 이름이 오센틱(Authentic)이다.
금주법으로 대표되는 미국 사회 주류(WASP)와 비주류의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여전히 승자를 예측할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모든 미국 대통령의 성씨가 알파벳의 모음이 아닌 자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WASP가 아닌 라틴계나 아일랜드, 다른 유럽계들은 모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바로 WASP가 아닌 첫 번째 미국 대통령인 케네디의 성씨가 모음인 Y로 끝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케네디는 백인이지만 아일랜드계이고 가톨릭이라 WASP가 아니다. 지폐의 말석에 끼기에는 너무 최근의 사람이라, 사후 50센트 동전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 케네디 동전은 미국인들에겐 행운을 준다고 알려져 보이는 대로 주머니로 들어가 거의 유통되지 않는 동전이 되었다. 나도 바로 이 50센트 동전을 바닥으로 삼고 구리를 두드려 만든 수제 위스키 잔 4개를 가지고 있다.

꽤 오래전에 처음으로 모 그룹에서 관리자를 대상으로 위스키 강의를 하고 두둑히 받은 강사료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고민하다가, 절반은 단골 바에서 좋은 위스키 한 병을 사고, 나머지는 이 케네디 동전으로 위스키 잔 4개를 주문하여 집에 2개, 단골 바에 2개를 두었다. 날씨 좋은 주말이 되면 단골 바에 가서 올드포레스터와 우드포드 리저브를 한 잔씩 따라 두고 켄터키의 추억을 되새김해야겠다. 왜 미국인들은 이렇게 좋은 버번들을 두고 마시지 말자고 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알 듯 말 듯 하지만, 버번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니까 버번에게 물어봐야겠다. 일요일 오후 단골 바에서 내 잔으로 버번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행복에 감사하며.

※ 박병진 - 1991년 IBM 신입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해 IBM, SAP, SK 등 글로벌기업의 임원으로서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2022년부터 딥러닝 기반의 무인 교통단속장비를 생산하는 (주)토페스의 CEO로 부임해 더욱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위스키 사랑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각종 증류주의 매력에 빠져 세계 각국의 증류소를 다니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Salon de PJ’라는 위스키 클래스로 기업체, 대학교, 단체 등에서 많은 사람에게 증류주의 매력을 전하고 있다.

202311호 (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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