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혁명가 바그너가 마흔에 읽은 쇼펜하우어 

요즘 쇼펜하우어 열풍이 불고 있다. 이 독일 철학자를 마흔둘에 읽었던 작곡가가 있다. 젊은 독일인 바그너는 정치적 혁명가로서 과격했고 불경했으며 위험했다. 중년의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예술적 혁명가로서 그러했다.

▎1859년, 71세의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1788~1860). / 사진:위키피디아
정치적 혁명가 바그너

1842년, 무명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드레스덴 오페라극장의 감독이 되어 [리엔치]를 발표했다. 29세 청년의 오페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어떤 학자들은 거장의 이 초기작을 1848년에 발발했던 3월 혁명의 이념적·예술적 실마리로 본다. 같은 해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3월 혁명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의 1848년 혁명은 입헌 왕정을 무너뜨려 공화국을 선포하게 하는 등 성공했다. 독일 혁명 역시 (나폴레옹을 무너뜨렸던)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폭압적 체제를 독일과 오스트리아 땅에서 끝장내는 등 성과를 보였다.

바그너가 참여했던 1849년의 드레스덴 시민 봉기는 성과가 없었다. 봉기를 주모한 바그너는 국왕이 내린 체포령의 대상이 되어 독일을 떠나야 했다. 고달픈 망명 생활은 13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바그너는 나락으로 떨어진 삶을 살며 증폭했던 분노와 슬픔, 사회적 문제의식, 반골 기질을 음악 작품들과 글 속에서 표현했다. 1849년, 바그너는『예술과 혁명』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위대한 인간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예수는 이렇게 설교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에 대해 걱정하지 마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주셨다.’” 『마태복음』6장 몇 구절의 내용과 유사한 이 문장들을 통해 굶주린 망명자 바그너는 하늘의 아버지를 그의 방식대로 해석했다. 풍성한 자연을 만인을 위해 나누어 쓰려는 인류의 사회적 이성으로. 현대적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제대로 제안되기 전에 바그너는 몇몇 철학자와 함께 그런 진보적 이념의 원형을 마음속에 품었고, 글로 썼다.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하나님을 당대의 기독교는 물론 독일 연방 속 여러 보수적 제후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바그너는 이런 글을 썼고 자신의 오페라를 위한 대본도 직접 썼다. 수필이나 평론에 불경한 내용을 썼던 그는 대본에서도 그렇게 했다. [니벨룽겐의 반지] 연작의 대본 작가 바그너는 독일의 무신론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러시아 출신의 과격한 무정부주의 혁명가 바쿠닌, 사유재산을 부정했던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프루동의 영향을 받았다. 모두 당대 교회와 성스러운 제국들의 지배자들이 우려 섞인 눈으로 지켜봤던 인물들이다. 바쿠닌은 이렇게 말했다. “천상의 왕은 지상의 왕이 가지는 가장 큰 변명거리이니, 신이 존재한다면 그를 폐하라.” 키가 2m로 알려진 바쿠닌과 키가 작은 바그너, 혈기 왕성한 두 청년은 1849년의 드레스덴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는 왕의 군대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반지]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신들의 황혼]에는 세계수(世界樹)가 나온다. 여러 민족과 문명의 신화에 등장하는 세계수는 각 신화의 맥락에서 세계의 기원과 구조, 그로부터 살아가는 생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지며, 그 주변에 장대하고 경이로운, 혹은 평화로운 자연환경이 펼쳐지는 것으로 상상된다. 영화 [아바타]를 떠올려보자. 지구와 닮은 행성에서, 모든 걸 연결하는 거대한 나무가 그려진다. 고구려의 장현 고분벽화에서도 세계수를 찾아볼 수 있다. 축제 때면 고구려인들은 세계수 밑에서 춤추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에덴동산 속 생명의 나무를 기독교적 세계수로 볼 수 있다.

[신들의 황혼]에서 세계수는 완전히 불탄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신들의 경우에는 모두 죽는다. 신들이 사는 발할성은 전소되고 라인강은 범람해 강가의 모든 것을 수장했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완벽한 파괴와 멸망의 드라마이며, 그 어떤 전망도 미래도 없다. 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바그너가 이 종말극에서 완벽한 염세주의자, 파괴주의자가 되었다. 바그너는 왜 이렇게 과격한 대본을 썼을까. 삶이 곤궁했고, 여전히 분노한 정치적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그가 품었던 정치적 혁명의 열망은 그가 살았던 현실의 유럽에서 꺾이고 또 꺾였다. [신들의 황혼] 초고에는 분명한 정치적 해방을 의미하는 가사들이 적혀 있었다.

혁명가들의 실망과 분노가 마냥 지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실망을 털고 혁명의 길을 꿋꿋이 가는 혁명적 낙관주의자들이 있고, 전향하는 이들이 있으며, 체념하고 현실을 뜨는 이들도 있다. 바그너는 체념의 길을 갔다. 42세에 읽은 쇼펜하우어의 영향 때문이었다. [신들의 황혼] 수정본에 그 영향이 엿보인다.

바그너가 마흔에 읽었던 쇼펜하우어


▎바그너의 [리엔치]가 초연되었던 당대의 드레스덴 오페라 하우스를 그린 그림. / 사진:위키피디아
[신들의 황혼] 속 완벽한 멸종은 갈망의 화신인 주인공 보탄(Wotan)에게 준비되었던 운명이다. 보탄은 주신(主神)임에도 불구하고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그래서 세계를 지배할 권력을 주는 반지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 절대 반지는 라인강 바닥에 있는 황금으로 만든다. 보탄은 황금에서부터 반지까지 모든 것에 눈독을 들이는, 세계를 향해 타오르는 열망 그 자체다. [니벨룽겐의 반지] 연작은 그의 활화산 같은 열망이 꺾이는 이야기다. 4개 연작에서 보탄의 세계 지배 야욕은 마지막 작품인 [신들의 황혼]의 마지막 장면에서 최종적으로, 비가역적으로 꺾인다. 애초에 그 야욕으로 인해 눈 하나를 버렸고, 자기 아들도 죽였다. 그를 거스르는 모든 이에 대한 그의 가공할 행위들이, 그 행위들의 기저에 있는 욕망이 연작을 이어가는 동력이다(한스 큉,『음악과 종교』, 2017, 포노).

정치적 해방을 염원하는 가사들이 사라진 [신들의 황혼] 속 욕망의 꺾임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제시된 ‘의지의 절멸’ 개념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강박적 열망의 부정이다. 강박적 열망은 그것을 품은 이를 필연적으로 실망과 고통의 세계로 인도한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뿌리에 있는 욕망을 포기하자고 제안했다. ‘열망의 포기’ 개념은 보탄의 운명과 그것에 부합하는 그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실패로 점철된 인상을 살다가 어느덧 중년이 된 바그너가 자신에게 당부했던 마음가짐일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는 마흔이 넘은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주는 철학도 펼쳤지만, 매우 불경한 주장도 펼쳤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도에서 기독교는 절대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인류의 지혜는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 따위에 절대 밀리지 않는다. 그 지혜가 유럽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의 지식과 사고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이스라엘 북쪽 지역에 있는 갈릴리는 예수의 호칭 중 하나로 사용되는 ‘나사렛 예수’의 그 나사렛이 있는 곳이다.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은 예수가 이 지역에서 했던 종교 활동을 가리킨다. 기독교에 밀리지 않을, 인도에서 만들어졌다는 인류의 지혜는 불교다. 맹목적 의지를 문제의 근원으로 보고 열망의 포기 등을 주장했던 쇼펜하우어에게 불교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19세기 한복판에서, 특히 보수적 제국인 독일에서 인도의 정통 불교 철학과 쇼펜하우어 방식으로 수용된 불교적 철학은 - 혹은 불교 철학과 결과적으로 유사해 보이는 쇼펜하우어 고유의 철학은 - 그 자체로 불경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쇼펜하우어는 명성을 얻지 못했기에 그의 불경한 이야기들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은 듯하다. 그는 예수와 기독교를 좋지 않게 말했고, 유대교의 역사를 독특한 방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반유대주의의 종교적 관점도 제안했다. 바그너를 포함한 훗날의 인종주의적 독일인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다른 문화나 종교의 여러 요소를 훔쳐왔던 유대인들, 즉 비(非)아리아인인 셈족은 역겨운(!) 민족이었고, 그들 고유의 종교적 관념들은 전부 해로웠다. 유대인들이 빌려왔던 것들이 애초에 발원했던 곳은 아리아인들의 나라 인도(?)였고, 그런 인도의 불교는 높이 평가되었다. 다른 무엇보다, ‘위대한(!)’ 게르만족은 그 인도의 정당한 계승자였다. 이런 역사 인식에 기초해 쇼펜하우어는 당대는 물론 현재의 기독교도까지 흥분하게 만들만한 불경한 이야기들을 했다.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 1814~1876). 바쿠닌은 바그너와 함께 드레스덴에서 돌을 던지다가 체포되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감옥에 갇혀 있던 이 무정부주의자는 나중에 탈출해 일본과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이런 주장들을 1854년, 마흔둘에 처음 접하고는 죽을 때까지 그를 존경했고, 이후 [신들의 황혼], [파르지팔]에 이어 유작 [승리자]의 대본과 음악에서 그것들을 표현했다. ‘열망의 포기’와 그에 따른 ‘존재의 중지’에 관한 체념적·불교적 생각이었다. 왕년의 정치적 혁명가 바그너가 혁명을 배반했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생긴 이유였다.

체념에 관한 사상과 함께 쇼펜하우어 특유의 사상으로서의 아리안 인도론과 반유대주의, 그의 철학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바그너의 오페라들은 역사적·사상적 위치가 있다. 19세기 초 괴테부터 20세기 중반 나치주의자들에 이르는 긴 독일사에서 중간쯤에 나타났던 - 다소 근거가 부족한 - 시대 의식이라는. 쇼펜하우어는 우리에게 철학적 통찰과 지혜를 주는 인물일 수 있지만, 근현대 독일사에서 민감하게 작동했던 이슈들의 이데올로그 중 한 명이기도 했다.

※ 김진호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401호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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