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PJ살롱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13) 

야마자키 증류소 이야기 

두 천재의 애증이 담긴 합작품, 야마자키 증류소를 찾아 교토로 떠난 열세 번째 위스키 여행.

▎증류소에 다다르면 커다란 증류기 모양의 조형물이 먼저 반겨준다.
코로나가 세상을 지배하기 몇 년 전 그동안 계속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으나, 방문하기엔 회사나 내 사정이 여러 가지로 여의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그곳을 마침내 찾아가게 되었다. 바로 일본 위스키를 대표하는 아이콘인 야마자키 증류소이다. 교토 인근의 야마자키시에 자리한 일본 최초의 증류소로, 전 세계에서 위스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은 방문하고 싶어 하는 꿈의 장소이다. 야마자키 증류소가 착공한 1923년을 일본 위스키의 시발점이라고 하니 작년은 100주년이었다. 사실 최근 들어 급격히 몸값을 올리고 있는 야마자키 위스키의 명성을 결정하는 맛과 향, 만듦새는 일본인 특유의 장인정신과 어우러져 이미 위스키의 원조인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의 그것을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꽤 오래전 어느 해의 짧은 연휴, 나는 충동적으로 마일리지를 이용해 인천-간사이 무료 항공권 왕복 티켓을 예약해버렸다. 그다음은 일단 닥치면 해결하기로 하고서.

마침내 도착한 야마자키 증류소


▎증류소 투어 프로그램을 마치고 무척 저렴하게 야마자키 25년과 하쿠슈 25년을 한 잔씩 시음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겠지만 그 당시 나를 포함한 외국인이 야마자키 증류소를 방문하려면 쉽지 않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일단 홈페이지의 증류소 투어 예약 부분이 일본어로 적혀 있고, 투어도 일본어로만 진행된다. 이 투어를 예약하려면 홈페이지 내에서 상당히 복잡한 경로를 거쳐야 하는데, 어느 정도 일본어를 알고 있는 나로서도 접근하기까지 애로 사항이 꽤 많았다. 그렇지만 형식적인 예약비 1000엔을 내고서 예약을 하면 상당한 대접을 받으며 이 위스키 증류소의 많은 것을 배우고 마시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증류소 투어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면 야마자키나 하쿠슈의 귀한 고숙성 위스키를 시중보다 훨씬 낮은 비용으로 시음해볼 수 있는, 매우 가성비가 뛰어난 프로그램까지 덤으로 즐길 수 있다. 물론 일반 위스키의 무료 시음도 몇 잔 포함되어 있으니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지만 또 귀한 위스키 앞에서 약해진 나는, 덕분에 무척 저렴하게 야마자키 25년과 하쿠슈 25년을 한 잔씩 시음하고 나왔다. 당연히 매우 훌륭한 맛과 향, 밸런스를 보여준 걸작이었다.

증류소 방문의 또 다른 혜택은 만약 운 좋게 아침 첫 시간대에 증류소 투어를 할 수 있다면, 투어를 마친 후 제일 먼저 증류소 숍에서 그날 판매용으로 나와 있는 각종 위스키나 기념품을 구입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급하게 예약하여 마지막 증류소 투어 시간을 겨우 잡아 오후 늦은 시간에 투어를 마치고 나왔으니, 역시나 원하는 위스키는 아무것도 살 수 없었다. 그저 산토리가 인수한 짐빔 같은 몇몇 버번위스키만 텅 빈 진열대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꼭 한 번은 야마자키 증류소를 방문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스코틀랜드와는 지구 반대편인 이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그 어떤 스카치보다도 멋있고 완성도 있는 위스키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비밀을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증류소의 방문 자체가 아예 추첨제로 바뀌어 운이 따라야 방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주말엔 증류소 투어 예약이 꽉 차 있어 나처럼 충동적으로 예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날이 3월 1일이었고 일본에서는 평일인 덕분에 예약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삼일절이 특별한 날이 아닐 테니까.


▎위스키가 담긴 오크통이 빼곡하게 들어 찬 숙성실. 오크통 안에서 숙성되며 위스키에 향과 맛을 더한다.


일본 위스키 100년의 출발


▎야마자키 증류소의 수원지.
일본 위스키의 대부인 토리이 신지로, 타케츠루 마사타카의 합작품인 야마자키 증류소는 국적을 떠나 우리 시대를 대변하는 키워드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스키 불모지인 아시아의 끝에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길을 독학으로 깨우치고 준비하여 만들어낸 기적이다. 10년쯤 전에 NHK에서 방영한 마사타가의 일대기인 드라마 <맛상>(영국인 부인이 붙여준 마사타카의 애칭이다.)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일본 위스키의 광풍이 불었다. 당시 소득 증가의 변곡점에 서 있던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수요가 빗발쳐 야마자키와 하쿠슈는 간헐적으로 발매 중단과 출하를 반복할 정도였다. 특정한 물품에 대하여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집착에 가까운 신드롬을 보이는 것은 꽤 드문 일이다. 한국에서는 개인 간 주류 거래는 불법이므로 위스키를 통한 자산 축적은 어렵다. 그리고 사실상 개인이 구매한 위스키를 교환가치로 환산하기는 쉽지 않고, 그 대부분은 사용가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류 거래가 불법인 우리나라에서 많은 이가 교환가치를 맹종하는 것이 더욱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인뿐만 아니라 근세 네덜란드의 튤립 구근에 대한 투기 광풍처럼,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높은 교환가치라는 환상 속에서 일본 위스키를 구매하는 데 집착하는 모습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특정 사물의 교환가치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이 이렇게 의견 일치를 이루기는 쉽지 않을 텐데 역시 학습효과인가? 하지만 학습된 교환가치의 맹목적인 추종만으로 보기엔 야마자키 자체의 완성도는 매우 뛰어나기에 다른 위스키와는 조금 달리 보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도쿄 올림픽을 눈앞에 둔 일본의 상황이 가수요를 일으켜 이 사태에 불을 붙인 것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맞물려 일본 위스키, 특히 야마자키 위스키 광풍이 일었지만, 그런 논쟁은 전문가에게 맡겨두고 나는 그저 좋은 것을 즐기기로 했다. 아무튼 이 야마자키를 만든 토리이와 타케츠루, 두 사람의 애증 관계는 일본 위스키 100년의 출발을 만들었지만, 하나의 강에서는 두 마리 용이 있을 수 없으니 언젠가 이들의 헤어짐도 필연이었다.


▎노부부가 하는 작은 동네 밥집. 친절한 두 분과 나눈 대화는 서툰 내 일본어 실력으로도 이치겐상의 나쁜 기억을 지우기엔 충분했다.
두 사람은 고용주와 전문가의 관계로 시작했지만, 타케츠루의 장인정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밀어준 토리이의 사업가적인 혜안이 돋보인다. 다만 타케츠루의 마이스터십을 조금만 더 인정해주어 갈라서지 않고 끝까지 함께했더라면, 훌륭한 위스키로 더 많은 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조금 아쉽기도 하다. 자기애가 넘쳐 자기 이름 앞에 태양을 의미하는 접두사를 붙여 태양과 같은 토리이, 즉 산토리(Suntory)라는 사명을 만든 창업자 토리이 신지로, 그리고 오직 스카치위스키라는 원조를 넘어선 위스키를 만들고 싶었던 이 시대의 마이스터 타케츠루는 절대 양립할 수 없었다. 이는 나중에 타케츠루 필생의 역작인 요이치 증류소 이야기를 할 때 좀 더 상세히 다룰 생각이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요즈음 전기차로 뜨고 있는 테슬라와 그의 과거 고용주였던 에디슨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GE(General Electric)를 만든 토마스 에디슨과 GE에 입사한 니콜라 테슬라, 평생에 걸친 경쟁과 협력의 관계, 마침내 전기산업의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선두 사람의 이야기는 또 다른 대하드라마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사실 몇 년 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The Current War]가 이미 제작되어 직류 표준을 주장한 에디슨과 교류를 주장한 테슬라, 테슬라를 영입한 웨스팅하우스의 창립자 웨스팅하우스까지 전기산업의 표준 전쟁과 이 세 사람의 드라마틱한 삶을 보여줬다. 토리이와 마찬가지로 자기애가 넘쳤던 에디슨은 창업한 회사에서 밀려나며 에디슨GE라는 사명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지는 수모를 겪었다. 웨스팅하우스도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에서 쫓겨났으며, 그가 고용한 테슬라도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오늘날 벌어진 스티브 잡스 스토리에서도 그 기시감을 다시 느껴본다. 우리 시대에는 당연히 에디슨의 지명도가 훨씬 높지만, 일론 머스크 덕분에 전기차 브랜드로 유명해진 테슬라는 다음 세대에서는 에디슨보다 더 유명인이 될 것 같기는 하다. 타케츠루와 토리이의 싸움 또한 산토리와 니카의 대결로 전체 시장의 파이를 키운 셈이 되었다. 이는 좀더 좋은 위스키를 더 많이 시장에 공급하기 위한 경쟁이니, 시장경제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그것이 마침 이런 두 영웅의 경쟁이라면 관전하는 맛까지 더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이치겐상 VS 죠갸쿠


▎교토의 비스트로에서 만난 단골손님의 예약으로 가게 된 교토 시내의 세츠겟카 바.
교토에는 ‘이치겐상’이란 말이 있다. ‘한 번 보는 뜨내기’란 뜻으로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는다. 과거 수도였던 교토에 사는 사람들의 자부심과 뜨내기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그들만의 오만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단어이다. 실용적인 쇼균 정권이 존재했던 간토지방의 도쿄나, 교토와 같은 간사이지방이라도 상인 정신이 주류였던 오사카에는 이런 말이 없다. 교토 이외의 지역에서는 내키지는 않지만, 교토의 이런 프라이드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일례로 한국의 서울대 원톱 체제와 달리 일본에서는 국립대의 최고봉으로 도쿄대와 교토대를 쌍두마차로 꼽는다. 이들은 모두 과거 천여 년간 수도였던 교토의 프라이드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들만의 실용적이지 못한 부분은 비판하기도 한다.

바로 교토에 도착한 첫날, 일본어에 서툰, 혼자 온 외국인으로서 나는 제대로 이치겐상을 경험했다. 손님이 거의 없는 데도 문가 자리에 혼자 앉게 하고, 영어를 꽤 하는 바텐더인데도 그다지 살갑게 맞아주지 않고 푸대접을 했다. 흔히 일본에 갔을 때 느끼는 지나칠 정도의 환대, 일본어 ‘오모테나시’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내가 생각한 일본의 바는 이게 아닌데 하며 실망하던 차에 이날 밤 바를 포기하고 들른 동네 밥집의 친절한 노부부의 오모테나시로 마음이 많이 풀렸다. 이어서 들른 비스트로에서는 주인과 손님이 모두 언어를 넘어선 즐거운 대화로 이치겐상의 실망감은 눈 녹듯 사라지고 교토의 좋은 추억만 간직하게 되었다.

비스트로에서 만난 옆자리의 손님은 교토에서 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며, 나를 위해 자신의 단골 바를 예약해주었다. 이튿날 찾아간 그 바의 바텐더에게서 지극한 환대와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귀한 위스키를 대접받았음은 물론이다. 이제 그 바에 다시 들를 일이 생긴다면 더는 이치겐상이 아니라 나도 그 바의 조캬쿠(단골손님, 常客)가 되었으니 제대로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겠다.


▎증류소 투어 프로그램에는 일반 위스키 무료 시음이 포함되어 있어 위스키의 맛과 향을 직접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골이 되면 뭔가 서비스를 더 주거나 가격을 깎아주는 것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대로 낼 것은 내고 받을 것은 받는 것이 진짜 고객이고 조카쿠가 되는 길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일본의 처갓집에 가면 당시 레스토랑을 운영하시던 장인이 손주들이 왔다고 가게 셔터도 내리고 멋진 마블링과 육즙이 넘치는 좋은 와규로 스테이크를 해주시곤 했다. 당신의 손주들이니까 이치겐상은 당연히 아님에도, 서양요리의 대가인 장인에게는 자신의 레스토랑에서는 공짜 고객은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의 레스토랑이기에 가격을 많이 깎아 약간이라도 돈은 내게 하셨다. 그 대신 아이들에게도 제대로 서빙을 하여, 깍듯이 손님 대접을 받게 해주셨다. 아이들도 그 덕분에 근사한 테이블 웨어와 푸짐한 코스 요리로 지금은 다시 못 할 사치를 누렸다.

지난 30년 가까이 처갓집에 갈 때면 장인이 만들어주신 여러 가지 요리에 내가 면세점에서 사 들고 간 위스키 한잔을 곁들이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물론 집에서는 돈을 받지는 않으신다. 올해 90세가 되셨지만 여전히 유쾌하게 요리도 잘 하시고 와인 한잔 정도는 같이할 수 있으니 늘 감사하다. 최근 건강이 나빠지셔서 걱정이지만, 언제까지나 자신의 삶 모든 면에서 마이스터인 장인어른의 조캬쿠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 계셔주세요!

※ 박병진 -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최근에는 포브스를 포함한 각종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는 위스키 칼럼니스트이자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살롱’의 주임 교수로서 위스키를 주제로 MZ세대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소통의 지혜를 나누고 있다. 더불어, 요리서적 전문 출판사인 ‘북스 레브쿠헨’의 대표로서 이 시대의 대표적인 N잡러이다.

202403호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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