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PJ살롱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16) 

글렌그란트 이야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미로 유혹하는 이탈리아의 국민 위스키 글렌그란트를 찾아 스페이사이드로 떠난 16번째 위스키 여행.

▎글렌그란트 증류소 본관 바로 앞에는 거대한 빅토리안 정원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인공미가 최대한 절제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열정의 상징, 캄파리 레드

의외로 내 또래 남자들이 좋아하는 색이 빨간색이다. 공중화장실에서 남자를 표시하는 파란색처럼 남성성을 강요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는 빨간색이다. 남성호르몬의 농도가 차차 옅어져가는 나이가 되면 보상심리 때문인지 빨간색, 그중에서도 강렬한 빨간색이 좋아진다. 나도 무척 좋아하는 색깔이라 10여 년 전에 한동안 새빨간 진홍색 SUV를 타고 다닌 적도 있다. 술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나라에도 빨간색 진도홍주가 있지만, 이탈리아에는 정말 진한 빨간색 술이 있다. 바로 캄파리(Campari)인데, 한여름 이탈리아의 강렬한 햇살 아래서 시원한 탄산에 타서 마시는 술이다. 물론 클래식 캄파리 칵테일도 있겠지만, 나는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의 한가운데서 밀라노 시장의 노점상이 잘 부순 얼음에 탄산수를 부어 쓱 말아주는 캄파리 한 잔이 ‘진짜 캄파리답다’고 생각한다. 캄파리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주류 회사이면서 유명한 와일드터키나 쿠르브와지에 코냑 등 수많은 주류 브랜드를 운영하는 글로벌 주류 회사이기도 하다. 캄파리의 창업자는 가스파레 캄파리(Gaspare Campari)이고, 아들인 다비데(Davide Campari)가 나중에 글로벌 회사로 크게 키웠다.

다비데의 사세 확장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다비데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리마돈나인 리나 카발리에리를 마음에 두고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전 세계 공연을 열심히 쫓아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지사를 설립한다는 핑계를 댔다고 한다. 뭐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이때 만들어진 글로벌 지사망이 캄파리가 글로벌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아쉽게도 다비데는 그녀의 사랑을 얻지 못했지만 거대한 글로벌기업을 갖게 된 셈이다. 역시 이탈리아 남자의 사랑에 대한 집념이 이런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경이롭다. 그리고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식혀줄 시원한 캄파리 한 잔의 힘도 대단하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캄파리와 와인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고, 그것도 후일 캄파리사가 채우게 된다. 2000년대에 들어와 캄파리는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지역에 있는 한 증류소를 인수하여 퍼즐의 마지막을 맞추었다. 그곳이 바로 글렌그란트 위스키 증류소이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싱글 몰트 판매로는 항상 글로벌 Top 10에 들 정도로 유명한 위스키이기도 하다.

동화 같은 빅토리안 정원이 펼쳐져 있는 증류소


▎스페이사이드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싱글몰트 위스키 글렌그란트.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풍미로 오랜 여운을 남긴다.
처음 글렌그란트 증류소를 방문했을 때의 놀라움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정말 이곳이 증류소가 맞나?’ 할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이 그날따라 기막히게 화창한 날씨 아래 숨 막힐 듯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동화 같은 빅토리안 정원이 스페이사이드의 증류소 한쪽에 마련되어 있을까? 인공미가 최대한 절제된 자연 그대로의 정원이었는데, 이어지는 계곡과 시냇물까지도 자연스럽게 정원의 일부가 되었다.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성공한 기업이라면 반드시 혁신가가 있게 마련이고 이곳 글렌그란트에도 그런 이가 있었다. 창업자의 조카인 제임스 그랜트, 일명 ‘더 메이저(The Major)’로 불리는 사람이다.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었기에 증류소의 모든 곳에 그의 흔적이 있었지만, 집대성한 곳은 바로 이 정원이다. 그는 사업적으로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 중에서 최초로 전기를 사용한 혁신가이다. 또 글렌그란트만의 가볍고 섬세한 위스키를 만들기 위한 증류기도 직접 개발하고, 증류된 증기를 정화하는 설비까지 개발하여 가장 좋은 증기만 응축하는 등 그 시대 최고의 생산설비 혁신을 이루어냈다.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지역에 자리한 글렌그란트 증류소의 전경.
스코틀랜드 최초로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소유한 멋쟁이였던 더 메이저가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수집한 기묘한 화초와 과일나무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이 사라졌겠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름 모를 꽃들과 이국적인 정원의 모습은 적어도 스코틀랜드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완벽한 빅토리안 정원이지만 그 안에는 빅토리안 스타일과는 무척 다른 것을 담고 있어 방문하는 이들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자칫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한없이 촌스럽거나 기괴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의 절묘한 균형은 온전히 그 콘텐트가 내 것이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길고 가는 증류기, 신선한 몰트의 풍미와 맑은 색깔을 내게 하는 정제기는 글렌그란트 위스키의 명성을 만들어낸 일등 공신이다.
증류소 본관에서 바로 한 발자국 앞에 있는 더 메이저의 정원은 규모부터 매우 거대했다. 글렌그란트라는 이름답게 이 증류소는 계곡 속에 있어 부지가 무척 협소하다. 여기에 9만9173㎡(3만 평)에 이르는 거대한 정원을 만들어낸 것도 대단하지만, 그 속을 하나하나 그 시대의 새로운 콘텐트로 채워간 것이 더 대단하다. 그 시대의 마지막 인디아나 존스처럼, 인도에서 코끼리를 타며 호랑이 사냥을 하고 아프리카를 거쳐 카리브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여행하며 보고, 느끼고, 배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이 정원이 그에겐 인생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는 이 정원에서 글렌그란트 위스키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했고, 아마도 그 의도는 적어도 내게는 성공한 듯하다. 나는 이 정원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맑고 깨끗한 글렌그란트 위스키를 상상하고 투영해 볼 수 있었다. 글렌그란트 특유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미를 힐끔 보여주며 나를 유혹하는 맛이다. 결국 나는 그 시간에 진행되는 증류소 투어를 포기하고, 글렌그란트 위스키의 특징인 향긋한 풋사과 향을 내뿜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시간을 모두 써버렸다. 흔한 증류 과정을 또다시 보는 것은 이제 내겐 큰 의미가 없기에 그저 사과 향에 취해 정원을 거닐었고, 왜 창업자가 이런 정원을 만들었을까 생각에 잠겼다. 한참이 지난 후 늦게나마 참가한 증류소 투어를 마치고 받은 시음용 글렌그란트 한 잔을 들고 다시 한동안 빅토리안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이탈리아 국민 위스키, 글렌그란트


▎곡물을 전분에서 당으로 전환하는 당화 과정이 진행되는 당화조(Mash Tun)의 모습.
이탈리아 사람들도 싱글몰트 위스키를 많이 마신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글렌그란트 위스키를 마신다. 몇 년 전 통계이지만 글렌그란트 위스키의 점유율이 70%에 달할 정도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글렌그란트를 사랑한다. 나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더 메이저가 만들어온 글렌그란트의 정신은 이곳에 근무한 지 62년째를 맞이하는 마스터 디스틸러인 데니스 말콤에게 계승되어 여전히 이탈리아인을 비롯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천성적으로 밝고 낙관적인 이탈리안들에게는 셰리 캐스크에서 숙성되어 짙은 꽃 향기와 끈적한 단맛, 짙고 어두운 색을 내는 다른 위스키가 어울릴 것 같지 않다. 그와 반대로 글렌그란트는 투명하고 순수한 특징을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버번 캐스크를 사용했기에 이탈리안들에게는 이 위스키가 훨씬 매력적일 것이다. 나 역시 글렌그란트 특유의 황금빛 맑은 액체의 유혹은 이겨낼 재간이 없다.


▎외관에서부터 고풍스런 멋이 느껴지는 글렌그란트 증류소.
물론 이탈리아인들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도 앞으로도 여전히 와인을 많이 마실 것이다. 군대 전투 식량에도 와인이 포함된 와인의 나라답게 그들은 계속 와인을 즐길 것이고, 때론 뜨거운 이탈리아의 햇살을 이기려 캄파리도 마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도 위스키가 필요한 순간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기에, 나는 글렌그란트가 이탈리아인들의 그 순간을 계속해서 잘 채워주리라 생각한다. 아무리 낙천적인 이탈리안일지라도 인생이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고, 때론 삶의 신산을 맞닥뜨릴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이탈리안 맞춤형 위스키 글렌그란트가 위로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더불어 내게도 글렌그란트가 삶의 고비마다 한잔의 위안이 되길 기대해본다.


▎증류소로 가는 길에 위스키 맛을 결정짓는 데 영향을 미치는 오크통을 제작하는 쿠퍼리지를 볼 수 있었다.
“VIVA 이탈리아, VIVA 글렌그란트!”

※ 박병진 -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최근에는 포브스를 포함한 각종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는 위스키 칼럼니스트이자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살롱’의 주임 교수로서 위스키를 주제로 MZ세대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소통의 지혜를 나누고 있다. 더불어, 요리서적 전문 출판사인 ‘북스 레브쿠헨’의 대표로서 이 시대의 대표적인 N잡러이다.

202406호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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