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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에게 도움을 청하다 

청의 3만 석 쌀로 백성 구휼해…사대부는 굴욕이라며 반대 

김준태 유교문화연구소 특임연구원



숙종 24년, 집의(執義:사헌부, 종3품) 정호(鄭澔)가 임금에게 아뢰었다(숙종24.4.29).

“서곡(西穀)에 대해서 그 전말을 소상히 알지는 못하오나…(중략)…이해관계를 가지고 계산해 보아도 의리(원칙, 도리)를 가지고 헤아려 보아도 도무지 옳지가 않습니다…(중략)…비록 우리가 거듭된 기근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가벼이 우리의 약한 사정을 드러내어 보임으로써, 저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더욱이 저들은 끝없는 탐욕을 지니고 있으므로 절대 남을 이롭게 하면서 자신들은 손해를 보려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은화(銀貨)를 들여 쌀을 들여온다 해도 저들은 필시 다 썩어 쓸모 없는 쌀을 내어줄 것이니, 보리 수확기에 이르기도 전에 그 효용은 다 할 것이며, 국고는 텅 비게 될 것입니다…(중략)또한 곡식을 준 대가로 전하나 높은 신하로 하여금 직접 청나라에 들어와 감사인사를 하도록 요구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 앞으로 저들이 들어주기 어려운 청을 한다면 무슨 말로 거절하시려는지요? …(중략)…의리의 면에서 보자면 더욱 옳지 않은 일입니다(후략: ‘정묘,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과 원한을 잊어버리고 저들에게 손을 벌려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이어짐).”

여기서 ‘서곡’이라는 것은 청나라로부터 쌀을 들여온 일을 말한다. 당시 조선은 5년에 걸친 대기근(숙종21~25:1695~1699)을 겪고 있었다. 숙종은 기근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걱정하고 수령들의 적극적인 구휼활동을 당부하는 비망기를 여러 차례 내렸는데, “전쟁 같은 난리는 위태롭기가 그지없으나 그래도 화를 피해 몸을 보전할 땅이 있는데 비해 지금 팔도에 큰 흉년이 들어 곡식이 여문밭을 찾아보기 힘들고 백성들은 한 해 동안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숙종22.1.1).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사람들이 뱀처럼 악독해져 여기저기서 도적들이 일어나니 백성들로 하여금 차마 못할 짓을 하게 만들고 있다.”(숙종23.4.22). “백성들의 곤궁함과 고통이 오늘과 같은 때가 없었다. 사람들의 원망이 하늘에까지 이르니, 3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음에도 다시 그 이상의 재해가 발생하고 있다”(숙종24.1.8)는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상황은 날이 갈수록 처참해지고 있었다.

숙종 24년의 기록을 보면 “이 해에 도성에서 쓰러져 죽은 시체가 1582인이고, 8도에서 사망한 사람이 2만1556인이었다. 지방에서 보고된 숫자는 실제의 십 분지 이, 삼 밖에 되지 않을 것인데도 이렇게 많은 숫자에 이르렀으니, 기근과 전염병의 참혹함이 실로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바였다”(숙종24.12.8)라고 되어 있어, 이 5년의 대기근 동안 최소 10만 명 이상이 죽었으리라 추측된다.

5년간 기근으로 10만명 사망

이러한 국가적 대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숙종을 비롯한 조정은 여러 대책을 내놓는다. 상대적으로 수확이 괜찮은 지역의 농작물을 기근이 심한 지역으로 빠르게 수송할 수 있도록 하여 백성들을 구제했으며, 세금을 대폭 감면하고 군량미 등으로 비축된 곡식을 풀었다. 왕실과 관청에서 소요되는 비용을 절감하고 면세전을 줄여 구휼재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근이 워낙 심했던 데다가, 전무후무한 대기근이었던 ‘경신대기근’(현종11~12:1670~ 1671)의 충격을 아직 채 극복하지 못했던 상황이어서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청나라로부터 쌀을 들여오자는 주장은 이처럼 조선이 가진 자원만으로는 기근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경신 대기근 당시에도 논의된 바 있었다. 형조판서 서필원(徐必遠)이 “나라와 민간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나 상황이 극도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청나라에게서) 곡식을 빌리자는 의견이 많으므로 아뢰나이다”라고 했지만, 당시 구휼 실무를 총 책임졌던 허적((許積)은 “(청나라가) 곡식을 실어 나르는 일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면 결코 감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고(현종개수실록12.6.1), 다른 신하들도 “곡식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춘궁기가 지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며 부정적인 의견이 우세했다(현개12.8.8).

표면상으로는 기술적인 문제가 반대의 이유로 부각되었지만, 실상은 청나라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보았을 때, 비록 청에 굴복하기는 했지만 저들은 어디까지나 오랑캐이고 우리에게 치욕을 준 나라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그 원한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그런 마당에 ‘원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이 당장 경각에 달린 시점에서 공허한 명분론만을 내세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기술적인 면을 들어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현종이 거듭 채근했음에도 이 문제는 결국 유야무야 됐다. 그러다 숙종 때에 들어 또다시 대기근이 닥치자 재점화 된 것이다.

청나라 쌀을 도입하는 것은 ‘중강(中江,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에 시장을 열어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은이나 동을 주고 쌀을 사들이는 ‘교역’ 형식으로 기획되었다.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양국의 무역은 철저히 관(官) 통제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더욱이 ‘미곡(米穀)’은 해당 품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청나라 조정의 허락이 필요했다. 허락을 요청하기 위한 사신을 보내는 문제가 거론되자 반대여론이 들끓는다.

앞서 소개한 정호 이전에도 여러 신하들이 반대상소를 올렸는데, ‘대국과 소국이 무역을 할 경우 소국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요청했으니 저들이 쌀을 가지고 와서 높은 값을 불러도 우리는 무조건 살 수 밖에 없다.’, ‘한 번 시장을 열면 나중에 통제하기 힘들어질 것이다’라는 현실적인 우려들도 있었지만, 역시 ‘우리에게 치욕을 준 원수에게 손을 벌릴 수 없다’는 식의 의리(명분)론이 반대의 주된 논리였다. 여기에 대해 숙종은 “이 일은 내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온 나라의 백성을 위하여 만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라며 반대를 물리친다.

불가피한 결정이라며 설득

조선의 공식 요청이 있은 지 얼마 후인 숙종 24년 4월 26일, 청나라의 이부시랑(吏部侍郞) 도대(陶岱)가 무상 구휼미 1만 석과 교역할 쌀 2만 석을 110여 척의 배에 나눠 싣고 중강에 도착했다(숙종24.5.1). 무상 구휼미를 1만석이나 주고, 그것을 육로가 아닌 해상 운송을 통해 전달한 것은(비용은 더 들고, 시일이 단축된다) 청나라 조정으로서는 상당히 성의를 보인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도대가 요구한 것은 “해상 운송된 쌀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한 것은 황제께서 귀방에 베푸신 특별한 은혜이니 바라건대 베푼 은혜에 감격하는 자문(咨文:공식 외교문서)을 작성하여 제가 가지고 돌아가게 해주십시오”였다.

정식으로 감사인사를 해달라는 것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저들의 말이 오만하고 패악하다”(당시 사관의 기록)며 부정적으로 보는 기류가 강했다. 이미 기정사실화된 일이었지만 명분을 중시했던 사대부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됐건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서 도입한 쌀로 평안도·함경도 지역의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효과를 거두었고, 나아가 국가 전체의 대기근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된다.

1159호 (201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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