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A사 수입차 매장.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이 차를 고른다. 가만히 들어보니 의견이 엇갈린 듯하다. 남편은 다른 매장에서 시운전한 B사의 차가 마음에 든다. 기술력 좋기로 유명한 브랜드인데다가 직접 운전해보니 성능도 좋다.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데 아내는 B사의 차가 탐탁지 않은 눈치다. 집게발처럼 생긴 컵홀더가 조잡해 보인다. 남편과는 최고속도가 얼마니 몇 마력이니 하는 얘기만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불만은 하찮은 문제로 치부하는 판매직원의 태도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이에 비해 A사 직원은 눈 앞에 있는 소형차에 대해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조금 비싸지만 편리한 기능이 많아 보이고 선물도 준단다. 남편은 “운전은 내가 하지 않느냐”며 B사 차를 고집한다. 이 부부는 어떤 차를 샀을까? 답은 당연히 A사의 차다. A사 매장 직원이 다가와 귀띔한다. “부부가 같이 차를 사러 오면 무조건 사모님을 공략해야죠. 남편은 선택권이 적어요.”여성 소비자의 힘이 더욱 세졌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고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구매력이 커지고 구매 결정권까지 쥐기 시작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49.9%다. 20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62.9%로 같은 나이대의 남성을 처음으로 앞섰다.2002년 20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61.1%로 남성보다 9.8%포인트 낮았다. 이후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남성은 계속 하락하면서 지난해 처음으로 역전이 이뤄졌다. 고용은 소득으로, 소득은 구매력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전문직 분야에선 여성 진출이 더 두드러진다. 지난해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506명 중 여성 합격자는 211명으로 합격자 비율(41.7%)은 역대 최고다. 행정고시와 외무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도 각각 43.8%, 53.1%다. 올해 서울대 로스쿨 합격자의 50.7%가 여성이다. 사법연수원 출신 재판연구원 45명 중 35명이 여성이다. 여성 약사 비율은 64% 수준이고, 여성 치과의사·의사·한의사도 꾸준히 증가했다.전문직 진출로 돈을 많이 버는 여성 수가 남성보다 빠른 속도로 늘었다. 국세청이 지난해 집계한 국세 통계에 따르면 2011년 소득을 기준으로 종합소득금액이 1억원을 넘는 사람은 17만8081명이었다. 이 중 여성은 3만16명으로 16.9%를 차지했다. 주목할 것은 증가율이다. 종합소득금액 1억원 초과자의 성별 증가율을 보면 2008년에는 남성이 전년 대비 8.9%, 여성이 4.8% 늘었다. 하지만 2011년에는 남성은 14.3%로 전년 대비 0.1%포인트 감소했지만 여성은 16.8%로 1%포인트 증가했다.여자 수다는 미래 소비의 준비 과정근로소득자 중 세금을 내는 여성도 늘었다. 지난해 근로소득 과세 대상자 중 남성은 667만1000명, 여성은 326만2000명으로 여성 비율이 32.8%를 차지했다. 여성 비율은 2007년 29.2%에서 4년 만에 3.6%포인트 증가했다. 양도소득세 신고건수 58만3000건 가운데 여성의 신고는 22만6000건(38.8%)으로 2006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여성의 양도 신고건수와 점유비 증가는 재산거래에 있어서 여성의 주도권이 커졌음을 뜻한다.여성의 경제적 지위는 더 높아질 전망이다. 여성의 경쟁력이 향상된 때문이다.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2009년 82.4%로 남성(81.6%)을 추월한 뒤 지난해까지 4년째 우위를 지속했다. 정책도 우호적이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여성가족부 특별기고를 통해 “정부는 경제정책 방향을 통해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여성의 구매력이 안정적이라는 측면에서도 여성 소비자는 주목 받는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불황기에 여성 소비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소비 성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경기 침체기에는 여성도 소비를 줄이지만 남성에 비하면 경기 영향을 덜 받는다는 것이다. 독신 여성의 증가도 여성 소비력 증가의 배경이다. 광고기획사인 대홍기획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독신 여성의 지출은 독신 남성이나 다른 연령대 소비자에 비해 높다.물론 30대 이상 기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저조한 편이다. 지난해 30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56%로 남성보다 37.3%포인트 낮다. 결혼과 출산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의 구매력 하락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혼 후 부부의 경제 주도권을 대부분 여성이 쥐기 때문이다.취업·인사 포털 인크루트가 2011년 기혼 직장인을 상대로 ‘가정 경제 주도권’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남성의 63.1%가 월급 관리·재테크 등 가정 경제권을 주로 배우자가 갖고 있다고 응답했다. 같은 질문에 여성은 67.7%가 본인이 관리한다고 답했다. 남성 직장인의 54%가 용돈을 받아서 쓰는 것에 비해 용돈을 받아서 쓴다는 기혼여성은 5명 중 1명 꼴이다.여성의 구매결정 영역도 넓어졌다. 이민훈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그동안 여성의 소비 영역으로 인식되던 패션·생활용품 등은 물론 남성 영역이던 전자제품·자동차·금융의 구매 결정까지 여성의 의사결정 영향력이 커졌다”고 말했다. 미국 보스턴컨설팅 그룹이 40개국 1만2000여명의 여성을 상대로 조사했더니 자동차를 살 때 여성의 구매결정권 비율은 80%였다. 주택은 91%, 가구 90%, 여행 92%다. 전자제품도 여성의 결정권 비율이 61%다.금융업계도 마찬가지다. 양재혁 외환은행 WM센터 PB팀장은 “과거 자산운용은 남자가 전담했지만 지금은 여성의 자산운용결정권이 커졌다”며 “80% 정도는 여성이 결정권을 쥐고 있다”고 말했다. KB국민은행 서울 압구정PB센터의 신동일 팀장은 “예전에 비해 전문직 여성 고객이 늘었다”며 “여성 고객의 취향에 맞춘 자산관리를 준비하거나 여성 CEO 고객 유치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추세”라고 했다.구매력이나 구매결정권뿐 아니라 마케팅 측면에서도 여성 소비자의 영향력은 크다. 일반적으로 여성 소비자는 구매 의사결정을 할 때 주변인의 의견이나 추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민훈 연구원은 “여성들 사이의 ‘수다’는 미래 소비에 대한 준비 과정”이라며 “여성의 구매는 동반 소비를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한 정보기술(IT) 업계 마케팅 담당자는 “남성이 기능이나 성능을 따지는 것에 비해 여성은 유행에 따라 단체로 사는 경우가 많다”며 “고사양 기능에 투자하지 않더라도 여성 소비자 사이에서만 유행하면 매출이 증가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