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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 간단해 졸속 법안 쏟아질 우려 

심각한 청부입법 실태 

정부가 만들고 국회의원 이름 붙여 … 박근혜정부 입법 계획 중 절반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까. 최근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인 기초연금법 제정을 두고 나오는 얘기다.

9월 25일 기초연금 정부안이 나왔지만 법제화가 순탄치 않다. 관련법을 제정해야 하지만 입법을 추진하려고 나서는 국회의원이 없기 때문이다.


‘인기’를 먹고 사는 국회의원으로선 여론의 거부감이 큰 정책 발의에 발벗고 나서기가 부담스럽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총대를 메려는 의원이 없어 정부 입법으로 국회에 제출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왜 정부가 추진하는 대통령 공약 사안을 애초에 정부가 아닌 의원 입법 형식으로 추진하려고 했을까.

우리나라는 정부와 국회의원 모두 법안을 낼 수 있다. 정부는 ‘제출’, 의원은 ‘발의’라고 한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가 입수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공약 이행 로드맵 및 입법 추진 계획’자료를 보면 기초연금법 관련 입법은 처음부터 정부 제출이 아닌 의원 발의로 계획됐다.

정부가 의원 입법을 활용하는 방식, 이른바 ‘청부입법’을 선호하는 건 복잡한 입법 절차를 피하기 위해서다.

정부가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려면 통과할 관문이 많다. 부처협의, 당정 협의, 입법 예고, 공청회 개최, 규제개혁위원회·법제처·차관회의·국무회의 등의 절차를 모두 거쳐야 한다. 쟁점 법안 일수록 법안 처리 속도는 늦다.

의원입법은 ‘법안 작성→의원 10명 이상 서명→국회 접수’의 형식적 3단계만 거치면 된다. 정부로서는 의회를 통한 청부입법으로 절차를 간소화해 논쟁을 피하고 입법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의원 입법으로는 이르면 한두 달 만에도 법안이 통과할 수 있다. 정부 입법을 추진하면 짧아야 5~7개월 정도 걸린다. 법률안의 빠른 시행을 위해 국회 회기에 맞출 필요가 있거나 긴급 입법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유용하다.

국회의원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다. 청부입법으로 법안 발의 실적을 올릴 수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다. 한 여당 관계자는 “대통령 공약이나 정부 추진 정책을 입법하면 의원실의 수고는 덜고 실적은 올릴 수 있다”며 “보통 당·정·청 회의를 통해 해당 법안을 나눠 갖는다”고 털어놨다. 전문성과 인력에 한계가 있는 국회의원실 입장에서는 정부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기초연금법처럼 여론에 민감한 사안이 아니라면 청부입법을 안 할 이유가 없다.

정부는 절차 건너뛰고 의원은 실적 올리고

물론 국회의원의 발의 건수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내용이 부실하거나, 폐기된 법안을 수정도 없이 재탕하는 등 고민없이 양산한 ‘거품 발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여전히 법안 발의·가결 성적은 의정활동 평가의 중요한 지표로 쓰인다.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발의 실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청부입법 수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19대 국회의 청부입법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대통령 인수위의 ‘공약 이행 로드맵 및 입법 추진 계획’을 분석해봤다. 이 문서는 대통령 공약과 정부 추진 정책 이행을 위한 법률안 제정·개정 내용과 입법 방식을 구분해놨다. 이 중 의원 입법으로 구분된 법안들은 정부 추진 정책을 의원이 발의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청부입법이다.

이에 따르면 박근혜정부는 2015년까지 정책 추진에 필요한 법률안 제·개정 계획 204개 중 절반에 육박하는 99개를 의원 입법으로 예정했다. 이코노미스트 분석 결과, 올 2월부터 연말까지 정부가 입법을 계획한 법안 93건의 41%인 39건이 청부입법이다. 이 가운데 21건의 법안이 실제 의원 입법으로 발의돼 현재 국회 계류 중(19건)이거나 처리(수정 가결 1건, 대안반영 폐기 1건)됐다.

박근혜정부 출범 전 제출된 법안을 포함하면 19대 국회의 청부 입법은 더 늘어난다. 국회 개원 후 올해 2월 전까지 정부가 만들어 의원 입법 형태로 국회에 접수된 법안은 52건이다. 이 가운데 대입전형료 인하 유도를 위한 고등교육법 개정안(민병주 의원), 창조경제를 위한 방송법 개정안(이한구 의원) 등 17건은 국회에서 처리됐다. 하지만 19대 국회 1호 제출 법안인 ‘발달장애인 지원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안(김정록 의원)’ 등 대부분의 법안은 아직 국회 계류 중이다.

국회 입법역량 강화해 정부에 휘둘리지 말아야

의원들 중에서는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이 총대를 멨다. 그는 ‘정부조직법 전부 개정 법률안’을 비롯해 30건이 넘는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또한 ‘방송통신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하 법률 일부 개정안’ ‘사내 하도급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 등을 정부를 대신해 발의했다. 정부조직법 관련 법안은 대부분 국회를 통과했다.

새누리당 김현숙·박인숙·민현주 의원 등도 정부를 대신해 발의자로 나섰다. 국회의원을 통해 발의하는 경우 각 법안에 맞는 해당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에게 할당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한 의원에게 몰리지는 않는다. 여당 관계자는 “많은 여당 의원들이 인수위에 참여해 정책 형성에 관여해왔기 때문에 정부 정책이 의원 발의안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청부입법은 관련 부처나 이해당사자 사이의 공론화 과정이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민주적 방법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관련 부처와의 입장 조율이나 여론 수렴에 드는 기회비용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법안의 질적 저하도 우려된다.

정의당 서기호 의원은 “효율성 제고를 위한 선의의 청부입법은 좋은 면이 있지만 실제 청부입법은 규제와 논쟁을 피하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졸속 법안을 양성하고 입법부의 독립성을 훼손시키는 청부입법은 근절해야 할 관행”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의원 입법안도 정부처럼 사전 심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의원입법이 국회에 제출되기 전에 법안의 타당성과 적정성을 심사한다면, 법안 처리 과정에서 기회비용과 갈등을 줄이고 법안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률안을 사전에 심사하면 반대로 국회의 입법권을 과도하게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 많은 전문가는 정부가 해당 법안을 공론화하고 협의만 거친다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의원입법 과정에 서로 협의만 하면 효율성도 높이고 부작용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당정협의도 사례가 될 수 있다. 중요한 정부 정책에 대해 당정협의를 거친 뒤 의원입법 형태로 가는 식이다.

국회의 입법역량을 먼저 키워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윤성이 경희대 정치학과 교수는 “비용·정보·인력의 한계로 국회가 정부에 비해 해당 분야 전문성이 부족하다 보니 입법 역량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정부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절차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입법 역량을 강화할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1207호 (201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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