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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탄소 녹색성장’은 익숙한 구호다. 지난 정부에서 5년 내내 홍보했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 ‘녹색’은 뒤로 밀렸다. 녹색이 빠진 자리를 창조가 대체했고, 기업들은 눈치보기 바빠졌다. 국내외 경기침체로 수요 부진까지 덮치면서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녹색산업은 전 세계가 비슷한 출발점에 서 있는 미래 산업이다.얼마든지 선점할 수 있고, 반대로 언제든지 뒤질 수 있다. 우리가 멈칫한 사이 미국·유럽·일본은 한걸음 앞서 갔다. 우리나라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창조형 에너지경제를 꺼냈다. 녹색성장위원회 역시 활동을 개시했다. 다행스럽지만 추진력이 궁금하다.제주도 애월읍과 조천읍을 연결하는 구국도대체우회도로. 처음 타 본 전기자동차는 기대 이상이었다. 가속 페달에 발을 얹으니 부드럽게 가속이 시작됐고, 제동력 또한 좋았다. 소음은 월등히 덜했다. ‘전기차는 가속이 좋지 않다’ ‘힘이 달린다’ 등은 그야말로 선입견이었다. 게다가 연료비는 가솔린과 디젤 차량의 10분의 1 수준이다.성능뿐만 아니다. 고질적인 약점으로 지적된 충전이나 배터리 문제도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1번 충전 때 운행거리가 150㎞ 정도로 늘었고, 300㎞ 이상을 달릴 수 있는 전기차도 곧 나온다. 5~6시간이 필요한 충전 시간 또한 문제였는데 급속 충전(30분 이내)이 가능한 양산차가 이미 나왔다. 개선의 여지가 남았을 뿐 상용화를 위한 기술적인 준비는 거의 끝났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전기차는 늘고 충전기는 줄고운영 시스템 역시 거의 완성 단계다. 제주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 사업을 계기로 포스코ICT·대경엔지니어링 등 5개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설립한 제주전기자동차서비스는 전기차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2년이 채 안 됐지만 이 회사의 전기차 통합운영관리 시스템은 합격점을 받았다. 미리 가입한 회원의 위치정보와 배터리 정보를 기반으로 충전소 및 배터리 교환소를 안내해 주는 게 대표적이다.배터리 잔량이 떨어질 때쯤 스마트폰을 활용해 가까운 충전소와 대기 시간을 알려주는 방식이다. 휴대전화 사용자가 통신사에 가입하듯 전기차 운전자가 서비스에 가입하면 충전 요금과 서비스 요금을 합산해 월 단위로 납부하도록 하는 멤버십 서비스와 위급한 경우에 대비한 긴급 구난서비스도 갖췄다.문제는 인프라다. 아무리 좋은 전기차라도 충전소가 있어야 탄다. 제주도는 실증단지 사업을 추진하면서 제주 지역 곳곳에 총 386개의 충전기를 설치했다. 그런데 5월에 사업이 끝난 이후 충전기는 오히려 줄었다. 사업을 추진한 한국전력·SK 등이 충전기를 무상으로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일부 공공기관이 관리비용 등의 문제로 철거한 때문이다. 제주공항이 대표적이다.직접 가보니 10여 대의 충전기가 있었다는 공항 주차장 입구는 다시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항 관계자는 “쓰는 사람도 없고 해서 철거했다”고 말했다. 철거한 충전기는 한 업체가 보관하겠다며 가져갔다고 한다. 버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곳뿐만 아니다.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건물에 있던 충전기 2대도 철거됐다. 일부 공공기관은 멀쩡한 충전기에 ‘고장’ 표시를 붙여 놓기도 한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충전기는 실증사업 기간 동안 국비와 기업의 투자로 설치됐다. 충전기 1대당 연간 운영비용은 약 50만원. 겨우 몇백 만원 아끼자고 국가적인 사업에 공공기관이 재를 뿌린 셈이다. 제주도는 수년 전부터 전기차 활성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세계 환경수도로 가는 첫 시작이 전기차임을 수 차례 강조해왔다. 최근에는 전국 최초로 전기차 민간 판매도 시작했다. 160대를 공급했는데 이 중 일부는 11월부터 차량 인도가 시작됐다. 탈 사람은 많아지는데 인프라는 부실해졌다.기업들은 한숨을 쉴 만하다. “충전기 사업자 보조금 문제나 전기차 보험 제도 등 개선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 지 모르겠다. 실증이 끝났으면 사업화를 하고, 민간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도리어 되돌아 가니 누구 탓을 해야 할 지….” 사업에 참여했던 한 기업인의 넋두리다.지붕에 설치한 태양광 발전 시스템으로 전기를 생산한다. 집 안에는 전력량과 가격정보를 제공하는 스마트미터가 설치돼 있다. 낮에는 요금이 비싸고, 밤에는 싸니 전자제품 이용은 가급적 밤에 한다. 꼭 그러지 않더라도 저장장치가 있으니 걱정 없다. 밤에 전기를 충전했다가 낮에 쓰고, 남으면 내다 팔기도 한다. 출퇴근은 전기자동차로 한다. 한달 교통비는 2만원이면 충분하다.스마트그리드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이다. 스마트그리드는 기존 전력망(Grid)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해 공급자와 소비자가 양방향으로 실시간 전력 정보를 교환하고 이를 통해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하는 차세대 전력망이다. 이명박정부는 2010년 1월 스마트그리드 국가 로드맵을 발표하고 2030년 전국 확대를 목표로 본격적인 사업 추진에 들어갔다. 당시 ‘에너지 분야의 대운하사업’이라 불릴 만큼 무게가 실렸다.
전혀 스마트하지 않은 스마트그리드하지만 약 4년이 지난 지금 스마트그리드의 현장은 그리 ‘스마트’하지 못하다. 기술은 어떻게든 앞으로 가려 하는데 정부는 시간을 허비했고, 발목을 잡는 규제도 여전하다. 전기차 사례에서 보듯 실증 사업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다는 근거 또한 곳곳에서 발견된다. 제주 구좌읍 행원리에 있는 스마트그리드 홍보관.홍보관을 둘러본 뒤 실제 주민들에게 적용된 사례를 취재할 수 없겠냐고 했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온다. 실증사업이 끝나면서 스마트미터 등 각종 장비를 모두 수거해 갔다는 거다. 굳이 세금을 들여 갖춰 놓은 시스템을 사업이 끝났다고 원 상태로 돌려놓은 것도 이해가 안 됐지만 더 황당한 이야기가 들렸다. 주민 김모씨는 “알지도 못하는 장비를 갖다 놓기만 하고 1년 내내 설치도 안 하다가 가져 갔다”고 했다. 그는 “설치했더라도 사용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스마트미터는 스마트그리드의 핵심적인 장비 중 하나다. 가정에서 쓰는 전기 관련 정보를 사용자에게 실시간으로 제공하는데 사용한 전력량을 시간별로 데이터베이스화해 사용 패턴을 분석한다. 전력요금에 따라 어떻게 전기를 사용해야 할 지 알려준다.그런데 스마트미터가 아무리 전기 사용량을 자세히 알려줘도 지금처럼 전기요금이 같으면 소용없다. 전기 생산원가는 사용량에 따라 시간대별로 최대 5배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일반 가정의 사용요금은 시간에 관계 없이 거의 같다. 스마트그리드가 현실화되려면 생산 원가의 차이만큼 전력 소비량에 따라 전기요금도 차이를 둬야 하지만 요금체계 개편은 아직 요원하다.장밋빛 전망 홍보만 무성전력 재판매 허용 역시 중요한 과제다. 전력 재판매는 값싼 시간대에 전기를 충전했다가 비싼 시간대에 팔거나,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설비를 구축해 전기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민간기업들은 한국전력이 전력 판매를 독점하는 상황에서 스마트그리드가 활성화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통신사업과 같이 판매시장을 개방하고,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한국전력은 부정적이다. 표면적으로는 전기요금이 낮은 상황에서 재판매를 도입하면 소비자 부담만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독점을 깨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전력이 스마트그리드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최대한 활성화를 늦추고 싶어한다는 비판도 그래서 나온다.정부는 에너지 저장장치(ESS) 보급 활성화 등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지원 의지를 밝히면서도 유독 요금체계 개편과 전력 재판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8월 12일 열린 ‘스마트그리드 정책간담회’에서 윤상직 산업부 장관은 ‘ESS 보급 활성화 방안’이나 ‘스마트미터 전환 계획’ 등은 조만간 발표하겠다고 하면서도 핵심인 요금체계 개편과 전력 재판매 허용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애초부터 세부 계획이 부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미빛 전망을 홍보하는데 급급했을 뿐 정책을 세밀하게 다듬지 못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2010년 발표한 스마트그리드 국가로드맵을 통해 정부는 지능형 전력망, 지능형 운송 등 분야마다 단계별 추진전략을 세웠지만 기술개발 부분을 제외하고 제도 개선, 상용화 등은 진전된 것이 거의 없다.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세운 애초 기본 계획과도 현실은 큰 차이를 보인다. 지난해 7월 발표한 제1차 지능형전력망 기본 계획에서 2016년까지 전체 고객의 50%(약 1000만호)에 스마트계량기를 보급하겠다고 밝혔다. 세부적으로 올해까지 305만호 보급 목표도 세웠다. 전기자동차용 충전기 역시 올해까지 6000기를 설치하기로 했다. 내년까지는 무려 3만2000기다. 지금도 불가능하지만 내년 목표 역시 달성 가능성은 희박하다.산업통상자원부 또한 스마트그리드 사업이 실질적인 성과 확보에 미흡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법·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세계적인 대규모 실증사업을 추진했지만 요금 현실화, 전력 판매시장 경쟁 도입 등 핵심 이슈를 추진하는데 부진했다”고 말했다.그나마 다행인 건 업계의 최대 관심사였던 ‘스마트그리드 확산사업’이 일단 스타트를 끊었다는 점이다. 5월에 끝난 제주 스마트그리드 실증사업에서 검증된 기술·사업모델을 민간 중심으로 사업화하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산업부는 한국전력·KT·LS-LG 등 총 8개 컨소시엄을 예비사업자로 선정했다. 문제는 시행 시점이다.산업부는 이들 예비사업자의 예비타당성 검토결과를 올 연말까지 기획재정부에 제출할 계획이다. 검토 결과는 내년 4~5월쯤 나온다. 이를 통해 내년 말에 최종 사업자를 확정한다는 방침이다. 한 컨소시엄 관계자는 “애초 로드맵에 따르면 2011년 거점도시 사업자가 선정되고 올 상반기에는 사업에 들어갔어야 했다”며 “이렇게 되면 결국 2년을 늦추는 셈인데 수년 간 수익을 못 내고 있는 기업의 입장도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재원 조달 방안을 발표하면서 국비 비중을 50% 이내로 제한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도 불만 섞인 목소리가 많다. 산업부가 추산한 사업비는 약 1200억원. 600억원은 민간의 자율에 맡기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한 업계 관계자는 “수익을 거두려면 최소 5~10년이 걸리는 사업인데 민간기업에 부담을 과도하게 떠 넘기는 것 아니냐”며 “제주 한 곳에서 실증단지 사업을 하면서도 2000억원 넘게 투입했는데 확산사업에 더 적게 투자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