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품보다 짝퉁이 더 비싸다? 전문 의약품(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약) 얘기다.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으로 제네릭(복제약) 가격이 오리지널(신약)을 역전하고 있다. 본래 제네릭은 오리지널 특허가 만료된 이후 비싼 오리지널을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다. 하지만 가격이 역전되면 제네릭 제품이 시장에 등장하는 본래 취지가 사라지게 된다.제네릭은 오리지널과 같은 성분으로 만들어져 효능이 유사하다. 하지만 오리지널만이 가진 한발 앞선 기술력으로 성분비율 등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 오리지널이 보다 오랜 시간 연구와 투자, 임상시험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사나 환자들은 비싸더라도 오리지널을 선호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오리지널의 가격이 짝퉁인 제네릭보다 싸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시장에서 많이 팔릴수록 약가를 강제 인하하는 정책 때문이다. 시장 점유율을 높일수록 수익이 떨어지는 이상한 현상이 제약 업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1월 6일 기준, 약학정보원 데이터서비스에 따르면 한국오츠카제약의 소화성 궤양용제 오리지널 무코스타(100mg)는 1정당 101원이다. 같은 용량의 제네릭 약가는 대부분 103원이다. 대웅제약 궤양치료제 알비스정은 현재 255원으로 2014년 3월 1일 전까지 261원이던 약가가 6원 내렸다. 같은 성분의 다른 제네릭은 261원을 유지하고 있다. 한독에서 만드는 혈압강하제 코아프로벨정150(12.5mg) 역시 1정당 458원으로 다른 제네릭 488원대에 비해 저렴하다.
많이 팔수록 약가 떨어져
▎약학정보원 사이트에 따르면 한국오츠카제약의 오리지널 무코스타정은 현재 1정당 101원(왼쪽)이다. 하지만 동일 성분의 제네릭은 동일 용량당 103원을 유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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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가격 역전 현상이 일어났을까? 현재 한국에서 시판되는 모든 전문 의약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급여적정성평가를 받는다. 그 후 국민건강보험공단과의 가격협상을 통해 약가가 정해진다. 보건복지부는 결정된 약가의 상한 금액을 고시한다. 하지만 이 과정만으로 약가가 고정되지는 않는다. 약이 더 많이 팔리면 약가를 강제로 떨어뜨린다. 정부가 건강보험 재정 악화를 우려해 더 많이 팔리는 약의 가격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2009년 1월부터 시행된 ‘사용량 연동 약가인하제’에 따른 조치다.특허가 끝나지 않은 오리지널 신약의 약가를 100원으로 가정하자. 특허가 만료돼 다른 제네릭이 만들어지면 정부는 1년 간 오리지널 약가를 70원, 제네릭 약가를 53.5원(보다 개선된 제네릭을 생산하는 혁신형 제약사 제품은 59원)으로 하향 조정한다. 이후 1년이 지나면 오리지널 가격도 53.5원으로 강제 인하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약가 인하는 정부의 사후 약가 기준에 따라 또 다시 인하된다. 사용량 약가 연동제에 따른 조치다. 전년 대비 약품 사용량이 60% 이상 급격히 늘어나면 해당 제품의 가격을 강제로 내린다. 만약 지난해 건강보험료 청구량이 20억원이었던 약이 올해 30억원으로 50% 이상 늘어나면 복지부령에 따라 약가를 계속 떨어뜨릴 수 있다. 가격 역전이 일어나는 원인이다.정부 조치에 따라 2009년 이후 35개 품목에 대해 약 11% 내외로 약가가 인하됐다. 2014년 1월 제도가 개정되면서부터는 의약품 청구액이 전년 대비 10% 이상, 50억원 이상 증가하면 약가를 더 떨어뜨릴 수 있게 됐다. 제약 업계는 이에 따라 3년간 22.7% 내외로 약가가 더 삭감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지난해 폐지된 시장형 실거래가제(저가 구매 인센티브제)도 오리지널 약가 인하의 원인이 됐다. 병원 등 요양기관이 의약품을 저가로 구매하면 그만큼 인센티브를 받는 제도다. 병원이 싼 약을 처방한 만큼 그 차액의 70%를 인센티브로 받고 해당 약가는 다음해 최대 10% 깎는 것이다. 시행기간 동안 1340억원의 인센티브가 지급됐다. 그중 92%는 대형 종합병원이 받았다. 하지만 을의 입장에 있는 제약사를 눌러 약가를 떨어뜨리고, 갑의 위치인 병원이 수익을 올리게 된다는 지적에 따라 폐지됐다. 하지만 지난해 이 제도에 따라 이미 많은 오리지널 약품 가격이 강제로 인하됐다.병원과 제약사 간 리베이트가 적발되면 그 품목의 약가를 부당금액 비율만큼 인하하기도 한다. 이에 더해 정부는 1999년부터 건보재정 절감이 필요할 때 마다 약가를 인하하고 있다. 2012년 4월 시행 이후 전체 1만3000여 보험의약품 중 6만 5000여개의 약가가 평균 21% 인하됐다.
“이럴 거면 신약 개발 왜 하나” 푸념도약값이 싸진다고, 소비자들에게 이로운 것만도 아니다. 전문 의약품은 의사가 약을 선택한다. 의사나 대형 병원이 특정 약을 정해 처방하면 환자들은 그저 그 약을 살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은 오리지널인지 제네릭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약에 대한 선택권조차 없다. 의사가 더 비싼 제네릭을 처방하면 믿고 쓰는 식이다. 약가 역전 현상이 일어난 뒤 의사가 비싼 제네릭을 집중적으로 처방하면 오리지널은 낮은 가격을 견디지 못하고 시장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은 오리지널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사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격이 역전된 신약을 개발한 한 제약사 관계자는 “정부의 가격 인하 정책의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오리지널 가격을 이렇게 떨어뜨리면 제약사가 신약을 개발할 이유가 줄어든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보다 잘 팔리는 제네릭을 만드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얘기다. 실제 이 제약사의 한 오리지널 약가는 제네릭에 역전 당했다. 떨어진 가격 만큼 수익을 보전하기 위해 점유율을 높였지만 현재 시장이 한계에 도달한 상태다. 제약사 내에서는 “이럴 거면 왜 신약을 개발했느냐”는 푸념까지 나온다고 한다.해외 오리지널 약을 수입·판매하는 업체는 약가 인하 정책이 수익 하락과 직결된다. 한국 내에서 연구개발하고 자체 생산하면 약가 인하에 대응할 수 있지만 수입사는 이에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제약사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한다. 보령제약은 2014년 4월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보험 약가인하처분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보령제약의 스토가정 가격을 147원으로 인하한 것이 부당하다는 소송이다. 보령제약에 따르면, 스토가정은 2009년 7월 290원에 보험급여에 등재됐다. 하지만 2013년 4월 첫번째 제네릭이 등재되자 특허 만료 전 상한가(290원)의 70%인 203원으로 약가를 인하했다. 이후 1년이 지난 뒤인 2014년 4월 보건복지부 시행령에 따라 53.55%인 155원으로 한차례 더 내렸다. 하지만 사용량 약가 연동제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스토가정의 약가를 147원으로 떨어뜨렸다. 보령제약은 이미 공단과 협의해 193원에 약가를 협상했는데 부당하게 약가가 인하됐다고 주장했다. 결국 법원은 약가 인하 시점 선정이 잘못됐다며 보령제약의 손을 들어줬다.현재 정부는 의약·바이오 분야를 적극 육성·지원하고 있다. 제약사에 신약을 개발하라며 연 300억원 이상의 돈을 쥐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제약 업계 관계자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신약 개발에 돈을 쥐여주는 것보다 오리지널 약이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는 것이 신약 개발을 지원하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