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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20주년’ 구본무 LG 회장 - 일등 DNA 심은 ‘뚝심의 승부사’ 

LG그룹 시가총액·해외 매출 20년 새 10배로 ... 자동차·에너지솔루션 등 신성장동력 키워 

1995년 1월 LG는 ‘럭키금성’이란 이름을 던지고 새로 출발했다. 우려가 많았지만 익숙함과 이별한 대가는 달콤했다. 20년 새 LG그룹의 매출은 5배로, 시가총액은 10배로 늘었다. 전자·화학·통신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 바꾸고 내수 중심에서 매출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거두는 수출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사이 GS·LS·LIG그룹 등이 떨어져나갔음에도 LG는 그 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그 중심엔 구본무 회장이 있었다. 사명 변경과 함께 총지휘자로 나섰던 구 회장이 취임 20주년을 맞았다. 불필요한 의전과 권위를 거부하는 소탈한 성격이지만 결단의 순간엔 냉철했고, 과감했다. 조용하되 강한 그의 리더십을 들여다봤다.

▎1월 14일 LG 브랜드 출범 20주년 및 취임 20주년을 맞아 개최한 ‘글로벌 CEO 전략회의’에 참석한 구본무 회장이 발표 내용을 듣고 있다.



1~2주년도 아니고, 20주년이다. 근사한 장소를 빌려, 임직원을 모아 놓고 큰 잔칫상을 차릴 만했다. 하지만 파티는 없었다. 이름 박힌 시계라도 하나씩 돌릴 법한데 그 흔한 기념품이나 선물 또한 없었다. 1월 14~15일 경기도 이천 LG인화원에서 ‘글로벌 CEO 전략회의’를 열어 최고경영진(CEO)과 회의를 하고, 2시간 정도 저녁 식사를 나눈 게 전부다. 이 만찬도 ‘따로 하지 말고 모인 김에 간단히 밥 한끼 하자’는 그의 제안으로 갑자기 마련된 자리였다. 구본무(70) LG그룹 회장 얘기다. 대기업 총수 중에서 가장 격의 없고, 소탈하다는 ‘구본무’다운 기념식이었다. 행사는 조촐했으나 인사말 한 마디엔 힘이 있었다. “LG브랜드가 더 나은 고객의 삶을 위한 혁신의 상징이자 진정한 ‘일등 LG’로 영속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1995년 2월 22일 오전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구자경 당시 LG 회장(현 명예회장)은 “21세기에 LG가 세계 초우량 기업이 되려면 젊고 의욕적인 사람이 그룹을 맡아 이끌어야 한다”며 퇴임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날 오후 창업자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맏손자인 구본무 회장이 3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 최고를 성취하는 강한 LG를 만들기 위해 조직 전 부문의 역량을 세계 초우량기업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후 20년이 지났고, 당시만 해도 대기업 총수 중 젊은 축에 속했던 구 회장도 어느새 흰머리가 더 잘 어울리는 나이가 됐다.

변한 건 그의 외모만이 아니다. LG그룹 역시 1995년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확 변했다. 현재까지의 성적표만 놓고 본다면 구 회장은 ‘초우량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약속을 어느 정도 지켰다. 1994년 30조원이던 LG그룹 매출은 2014년 150조원으로 5배로 늘었다. 10조원 정도였던 해외 매출이 약 100조원으로 늘며 그룹의 성장을 견인했다. 상장 계열사의 시가총액 역시 7조원에서 67조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90개였던 해외 법인은 290개로, 10만명 수준이던 임직원 수도 22만명으로 늘었다. 1994년은 계열 분리한 GS·LS·LIG그룹 등을 포함한 수치란 걸 감안하면 성장세는 더욱 놀랍다. 디스플레이와 중대형 2차전지, 편광판 세계 점유율 1위 자리에 올랐고, 에어컨·TV 등 가전 부문에선 삼성과 글로벌 1~2위를 다투고 있다. 그 중심에 구 회장이 있었다.

더 많이 듣는 소통형 리더십


사실 구 회장은 출발부터 여느 재벌가 2~3세와 달랐다. 1975년 럭키(현 LG화학)의 과장으로 입사한 그는 심사과장·수출관리부장·유지총괄본부장 등을 맡았다. 1981년 금성사(현 LG전자)의 이사로 승진한 구 회장은 일본 주재 상무, 기획조정실 전무, 부사장 등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 올라왔다. 입사 15년째인 1989년 그룹 부회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그룹의 밑그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도 5년이 더 지난 1995년 마침내 회장이 됐다. 당시 재계의 회장직 승계자들은 임원급으로 회사에 발을 디뎌 4~5년 뒤 경영권을 잇는 게 보통이었지만 구 회장은 오랜 현장 수련기간을 거쳤다. 지금까지 20년은 현장에서, 20년은 그룹 경영자로 보낸 셈이다. 계열사 사장 각자의 경영 방침을 존중하는 신뢰 경영, 현장 연구인력의 생각을 최대한 믿어주는 인재 경영도 여기서 출발했다.

‘발언형’보다 ‘경청형’에 가까운 구 회장의 리더십은 LG그룹이 사세를 키우면서도 큰 잡음 없이 20년을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반도체 빅딜, 계열 분리 등 문제될 현안이 많았지만 그 때마다 구 회장은 탁월한 조율 능력을 발휘했다. LG그룹은 2000년대 들어 국내 대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지주회사로 체제 전환을 시도했다. 지주회사인 LG 아래 LG전자와 LG화학이 두 축을 이루는 구조다. 대주주는 지주회사 주식만 보유해 포트폴리오 관리에만 주력하고, 자회사는 전문경영인과 이사회 중심으로 개별 사업에 전념하는 틀을 만든 것이다. LG 관계자는 “당시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대기업이 순환출자, 상호출자의 고리를 끓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는데 소수의 지분을 출자해 문어발식으로 계열사를 확장하는 지배구조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구 회장의 강력한 추진의지가 있었다”고 말했다.

반도체 잃었지만 디스플레이 지킨 결단


실제로 지주회사로 바꾼 것은 LG그룹이 경영투명성과 사업경쟁력을 강화하고 주주 및 기업 가치를 높이는 전환점이 됐다. 이를 위해 LG화학을 지주회사인 LGCI와 사업자회사인 LG화학·LG생활건강으로 분리하고, LG전자는 지주회사인 LGEI와 사업자회사인 LG전자로 분할했다. 2003년 LGCI와 LGEI를 합병한 통합지주회사 ㈜LG가 출범하면서 지주회사 전환이 완성됐다. 지주회사 전환을 마무리한 후 구 회장은 3월 계열사 CEO와의 릴레이 미팅에서 “앞으로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책임경영으로 사업에만 매진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룹 분할 과정에서도 구 회장은 ‘인화(人和)의 LG’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1999년 LG화재(현 LIG손해보험)가 그룹에서 나갔고, 2003년엔 LS그룹이 분리됐다. 3대에 걸쳐 57년 간 이어진 구씨·허씨 두 가문의 동업 관계 역시 2005년 1월 GS그룹과의 분리로 아름답게 끝났다. 당시 알짜로 분류됐던 LG화재·LG산전·LG칼텍스 등이 떨어져 나가면서 내수 기반이 크게 흔들릴 것이란 우려가 많았지만 구 회장은 ‘LG Way’를 선포하며 배수의 진을 쳤다. ‘LG Way’는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을 LG의 행동방식인 ‘정도경영’으로 실천함으로써 궁극적인 지향점인 ‘일등 LG’를 달성하자는 내용이다. 지금도 ‘LG Way’는 임직원의 사고 및 행동기반으로 작용한다. 지주회사 체제 구축과 계열 분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만큼 전자·화학·통신 중심 기업으로 새로 도약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의 구상대로 LG는 이후 안정적인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내수 중심이던 사업 체질을 확 바꾸고 매출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거두는 수출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한 경영’을 추구하는 스타일지만 결단의 순간엔 늘 과감했다. 1995년 1월 럭키금성은 LG로 그룹명을 바꿨다. 구 회장이 부회장 시절부터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일이다. 사내에서는 널리 알려진 ‘럭키금성’ 브랜드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 반론이 만만치 않았지만 구 회장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려면 외국에서도 통하는 새로운 기업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일축하며 CI 변경 작업을 뚝심 있게 추진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LG의 주력사업인 디스플레이와 2차 전지, LTE 등은 구 회장이 미래를 위해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끈기 있게 투자한 결과물이다. 1998년 구 회장은 정부 주도의 반도체 빅딜 논의로 사업의 유지가 불확실해지자 LG전자와 LG반도체가 각각 추진하던 ‘TFT-LCD’ 사업을 따로 분리해 별도의 LCD 회사 ‘LG LCD’를 설립했다. 반도체 사업을 포기한 직후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말로 비통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는 위기의 순간, 꼭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시 정부와 현대전자는 LG반도체에서 LCD사업을 분리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구 회장이 “이번 빅딜은 반도체 사업의 빅딜이지 LCD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해 뜻을 관철시켰다.

이 덕분에 반도체는 현대로 넘겼지만 LCD는 지켰고, 분리 직후인 1999년 5월 LG는 필립스로부터 국내 민간기업 사상 최대 규모였던 16억 달러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3개월 후엔 합작법인 LG필립스LCD를 출범시켰다. 이 합작으로 LG는 신규 투자에 따른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면서 LCD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는 적기에 전 세계 시장 수요를 리드할 수 있는 공급 능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2008년 단독법인인 LG디스플레이로 독립한 이후엔 LCD 패널 등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1위 기업으로 거듭났고, 연간 약 25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그룹 핵심 계열사가 됐다. LG가 LCD 사업에 처음 진출한 1995년 경북 구미의 첫 번째 공장을 가동할 때 임직원은 1100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3만2500명이 일한다.

20년 연구개발의 ‘꿀’ 2차전지 세계 1위로


▎구본무 회장이 2월 4일 충북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최근 중국에서 인기 있는 화장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 결단은 ‘2차전지’였다. LG화학의 2차전지 사업은 구 회장이 연구개발을 제안한 1992년 이후 20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치며 LG의 주력 사업으로 성장한 케이스다. 1992년 당시 부회장이던 구 회장은 그룹의 미래 신성장동력 발굴을 위한 영국 출장에서 한번 쓰고 버리는 건전지가 아니라 충전을 하면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 가능한 2차전지를 처음 접하고, 가능성을 확인했다. 돌아온 그는 당시 계열사였던 럭키금속에 2차전지를 연구하도록 했고, 1996년 럭키금속의 전지 연구조직을 LG화학으로 이전해 연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수년 간의 투자에도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고, 사내에서 ‘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 회장은 “포기하지 말고 길게 보고 투자와 연구개발에 더욱 집중하라. 꼭 성공한”며 못을 박았다. 2005년 2차전지 사업에서만 20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을 때도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며 다시 한번 임직원을 다독였다. 난관을 뚫고 얻은 ‘꿀’은 달콤했다. 현재 중대형 2차전지 분야 세계 1위에 올라선 LG화학은 현대차·GM·포드·상하이자동차·아우디 등 20여개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를 감안하면 앞으로 그룹의 ‘캐시카우(현금 창출원)’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통신사업에서도 오랜 ‘3등’ 꼬리표를 떼냈다. LG는 1996년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한 뒤 2000년 유선사업을 인수하며 통신사업을 강화했고, 2010년에는 LG텔레콤·LG데이콤·LG파워콤을 합병해 LG유플러스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10%대의 점유율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LTE 시대의 LG는 달랐다. ‘네트워크 구축 초기 단계에서부터 과감히 투자하라’는 구 회장의 지시에 LG유플러스는 LTE 구축에 당초 계획보다 훨씬 많은 1조7000억원을 투자했고, 3년 계획이던 LTE 전국망 구축을 단 9개월 만에 끝내고 LTE 서비스를 시작했다. 3밴드 LTE-A 서비스에서도 경쟁사에 밀리지 않았고, 기존 LTE보다 업로드 속도가 4배 빠른 ‘업링크 CA(UpLink Carrier Aggregation)’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덕분에 LG는 ‘강-중-약’ 체제였던 국내 통신업계 지도를 ‘1강-2중’ 체제로 재편하는데 성공했다.

구 회장이 평소 회의에서 가장 강조하는 키워드는 ‘고객가치’다. 구 회장은 2008년 구 회장은 연구개발 성과 보고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지금까지의 R&D가 새로운 기술, 그 자체를 중요시했다면 이제는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더 나은 방식을 찾는 R&D로 생각의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고 짚었다. R&D의 지향점이 단순한 신기술 개발이 아닌 ‘고객 만족’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LG는 항상 ‘그럭저럭 괜찮은’ 제품을 만들어왔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소위 ‘히트작’이라 할만한 제품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 2005년 말 LG가 출시한 ‘초콜릿폰’은 1년 간 1500만대 이상 판매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기능보다는 디자인에 신경 쓴, 사실 큰 기대하지 않았던 초콜릿폰의 대성공은 LG의 제품 철학이 ‘고객 만족’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고객 가치를 높여야 시장을 쫓아가는 것이 아닌 선도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시기였고, LG가 ‘만년 2등’이라는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오랜 목표였던 ‘일등 LG’로 나아가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이후 구 회장은 일관되게 ‘고객가치’를 강조하면서 직원들을 독려했고, 이후 LG는 TV·세탁기·에어컨 등에서 세계 1위 제품을 속속 내놨다.

“어렵다고 함부로 사람 내보내지 말라”

온화한 조직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재계에서 LG는 부드러운 조직 문화를 가진 기업으로 꼽힌다. ‘부하직원을 너무 각박하게 다루지 말라’는 게 평소 구 회장의 지론이다. 뿌리 깊은 ‘인화 경영’이 도리어 생산성을 저하시킨다는 지적이 간혹 나올 때도 그는 ‘믿고 맡기면 누구나 제 역할을 한다’며 신뢰를 나타낸다고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재계에 대량 해고 소문이 무성하던 2008년 구 회장이 “사정이 어렵다고 함부로 사람을 내보내거나 뽑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이 발언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당시 감원을 하려던 많은 기업이 계획을 취소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사내 분위기가 조직의 결속력을 높이고, 어려울 때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다.

과거는 과거일 뿐, 예전에 잘했다고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구 회장의 고민도 더 깊어질 것이다. 1월 14~15일 열린 ‘글로벌 CEO 전략회의’에는 구 회장을 비롯해 강유식 LG경영개발원 부회장,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박진수 LG화학 부회장 등 CEO 40여명이 총출동했다. 회의에서는 세계 주요 시장 동향과 미래 성장산업 전망 등 글로벌 산업환경 변화에 관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셰일 혁명이 세계 경제 및 지정학적 정세에 미치는 영향, 세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신형 도시화 정책 등이 주요 화두였는데 웨어러블, 신재생에너지, 스마트 제조기술 등 미래 성장산업 분야에 관한 논의도 오갔다. 회의는 구 회장의 정리로 마무리됐다. “빠르게 변하는 사업환경에서 변화를 주도 하려면 실행 속도를 높여야 한다. 논의한 것들이 구호로 그치지 않고 실행으로 이어져 성과를 내도록 경영진이 먼저 바꿔 나가고 직접 챙겨야 한다.”

과감한 R&D 투자로 미래 준비 가속도


LG는 미래 성장을 이끌어갈 차세대 성장엔진으로 고효율 태양광 모듈, 에너지 저장장치(ESS), 가스 및 지열 활용 냉난방시스템, 전기자동차와 같은 차세대 자동차 등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구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LG만의 차별화된 방식으로 시장을 선도하고 철저한 미래 준비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잡는 다면 거대한 파도가 덮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며 독려했다. ‘사업 성과에 대한 LG의 판단 기준은 한 해 동안 거둔 이익만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씨를 뿌리고 시장을 이끄는 시도를 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라는 말도 했다.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그동안 LG가 해온 것처럼 끈기를 가지고 먼 미래를 준비하자는 뜻으로 읽힌다.

이를 위해 LG는 서울 강서구 마곡산업단지에 4조원을 투자해 국내 최대 규모의 융복합 연구단지인 ‘LG사이언스파크’를 짓고 있다. LG의 미래를 이끌어 갈 최첨단 R&D 기지다. 2020년 사이언스파크가 완공되면 전자·화학·통신, 에너지·바이오 분야 2만5000명의 연구인력이 집결한다. LG그룹이 국가 신성장 동력 창출을 위해 충청북도에 총 1조6000억원을 투자하기로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금까지 나온 재계의 창조경제 육성계획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LG는 2월초 문을 연 충북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뷰티·바이오·에너지산업의 메카로 집중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충북에 발달한 미용·태양광·생명과학산업에 LG생활건강·LG생명과학·LG화학 등 계열사의 기술 노하우를 접목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LG가 보유 중인 특허 2만7000여 건의 특허를 공개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3000여건은 무료로 개방한다. ‘R&D와 사람에 될 때까지 투자한다’는 구본무식 뚝심이다.

1274호 (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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