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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우환은 生이요, 안락은 死라 

위기 때 절망 말고 태평성대 때 긴장해야 … 조선 왕조의 금언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일러스트 : 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인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정책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이를 통해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우환이 나를 살게 할 것이고, 안락함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生於憂患 死於安樂)’.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장차 어떤 이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땐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에 괴로움을 주고 근골을 수고롭게 만들며, 육신을 굶주리게 하고 몸을 궁핍하게 한다.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게 방해한다. 그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참을성을 길러줌으로써,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서이다.” 지금 겪고 있는 힘든 시간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고, 오늘 마주하고 있는 실패가 내일의 성공으로 가는 자산이 될 테니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 다시 일어서라는 것이다.

어린 단종에게 경각심 일깨운 박팽년

사람은 대부분 실패한 뒤에야 반성을 하고 단점을 보완한다. 위기가 닥쳐야 비로소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애쓴다. 조심하고, 심사숙고하고, 의지를 다지는 것도 어려운 상황과 마주선 뒤에야 나오는 태도다. 이와 달리 삶이 편안하고 풍족하다면 문제점이 눈에 보이더라도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단점을 외면하고 자신을 계발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당장은 우환을 겪는 사람이 불행하고,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행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 그 불행과 행복은 뒤바뀌게 된다. 고난의 시간 자체는 고통스럽겠지만 최선을 다해 극복한다면 훌륭한 삶을 향해 가는 토대가 되고, 안락의 시간 자체는 즐겁겠지만 거기에 취해 안주한다면 나를 파멸로 인도하는 발단이 되는 것이다. 맹자가 우환을 ‘생(生)’에, 안락을 ‘사(死)’에 대응시킨 까닭이다. 물론 일부러 안락에서 벗어나고 억지로 우환을 만들 필요는 없다. 우환을 만났을 때는 절망하지 말고, 안락을 만났을 때는 긴장을 풀지 말라는 것이다. 우환과 안락이 모두 나를 성장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전통사회에서 이 구절은 한 사람의 개인 뿐 아니라 국가의 최고 리더인 군주가 특히 명심해야 할 격언으로 쓰였다. 단종 2년 5월 4일. 이날 열린 경연에서 승지 박팽년은 단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뢴다. “임금은 숭고하고 부귀한 존재이므로 근심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이 이르기를 ‘우환이 나를 살게 할 것이고, 안락함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날 성군들은 숭고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항상 근심했고, 부지런히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가다듬는 것을 마음 깊이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셨으니 진실로 아주 잠깐이라도 편안히 즐기려 하시거나 태만하고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임금이 편안히 즐기는 것을 좋아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져 망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고, 근심하고 삼가는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면 나라가 부흥할 것이니,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 아니옵니까?”(단종실록).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단종이 종종 경연을 쉬고, 활쏘기 구경(觀射) 등 ‘즐거운 일’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이자 박팽년이 이를 경계한 것이다.

군주가 두려워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방심하거나 나태할 시간이 없다. 연습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시행착오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늘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일을 처리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정조가 “올해 풍년이 들었더라도 곧 내년의 농사를 근심한다”고 말하고, 세종이 “설령 과도하게 수고로워지는 한이 있어도 나태함에 빠지진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군주들은 기대와 다른 경우가 많았다. 창업 군주는 자신이 직접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대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위기는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위기가 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신분으로 아무런 고생도 해보지 않은 채 왕위에 오른 후세의 군주들은 다르다. 위기극복의 유전자가 없는데다, 조심하는 마음도 부족해서 자칫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신의 높고 고귀한 지위를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거기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뛰어난 재능으로 성공을 거둔다고 하더라도 이내 방심하여 스스로 그 성공을 무너뜨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군주의 ‘안일함’인데, 정조는 “너무 안락하면 마음에 중심이 없어지고 기운이 통제 되지가 않으니, 생각은 의당 조심스레 삼갈 줄 알아야 하고 자세는 마땅히 추슬러야 한다”고 경고했다.

임진왜란 당시, 개전 초기에 이미 임금이 국경의 최북단까지 피신하는 등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조선 조정도 ‘생어우환 사어안락’을 내세우며 재기의 의지를 다진다. “예로부터 어려움 속에서 다시 일어나고, 패배하였다가 다시 회복한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임금과 신하 상하가 합심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징계하고 개과천선하여 정치와 형벌을 바르게 하고, 백성을 보호하고 단합시켰기 때문입니다…(중략)…맹자가 말한 ‘생어우환 사어안락’이 바로 이것입니다.”(선조실록 27년 10월 17일)

임진왜란 때 재기의 의지 다진 원천

우환과 안락은 영원하지 않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유명한 말처럼 머지않아 지나가 버릴 것이며 우환의 뒤에는 안락이, 안락의 뒤에는 우환이 찾아올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둘을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함몰 되어서는 안 된다. 즐겁고 평안한 상황에선 그만큼 여력이 넘치니 미리미리 우환을 대비하고 내공을 키워야 하며, 힘들고 고단한 상황에선 이것이 나의 의지를 강하게 만들고 단련시키는 기회라 생각하고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리 되면 우환과 안락은 둘 다 소중한 에너지가 될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583호 (202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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