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용어 중에 ‘블랙아웃(Black Out)’이라는 게 있다. 항공기가 급격히 수직 상승할 때 중력 이탈로 조종사의 뇌에서 피가 빠져나가면서 산소 결핍으로 시야가 어두워지는 현상을 말한다. 블랙아웃은 종종 추락 사고로 이어지곤 한다.국내 증시에 블랙아웃 경고등이 켜진 종목이 속출하고 있다. 특히 연초 대비 주가가 4~8배 오른 상장사 중에 위험 징후가 뚜렷한 종목이 많다. 본지가 올 1월 2일부터 6월 2일까지 코스피·코스닥·코넥스 상장사 주가 등락률을 조사한 결과, 주가가 300% 이상 오른 종목은 30개였다. 코스닥이 17개, 코스피 11개, 코넥스 2개다.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가 12%, 코스닥 지수가 32% 오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급등이다. 문제는 이 가운데 실적이 크게 개선됐거나, 주가가 급등할 이유가 분명한 종목을 거의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뚜렷한 근거 없이 이상 급등한 종목은 오래갈 수 없다. 더욱이 이들 종목들은 기관이나 외국인보다는 개인투자자들이 몰려 있고, 여전히 추격 매수가 이어지고 있다. 자칫 수직 급상승한 종목에 올라탔다가 블랙아웃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갑자기 수직 급상승한 주가1월 2일~6월 2일 사이 주가가 300% 이상 오른 30개 종목 중 500% 이상 오른 종목은 7개다. 중국 게임업체가 대주주인 룽투코리아의 주가 상승률이 761%로 가장 높았다. 반도체 장비업체인 유니셈이 757%로 뒤를 이었다. 삼성제약(652%)·원풍물산(639%)·위노박(627%)·루보(613%)·이너스텍(588%)도 주가가 급등했다. 같은 기간 주가가 400% 이상 오른 종목도 경남제약(466%)·아이에스이커머스(455%)·바이오스마트(444%) 등 7곳이었다.30개 종목 중 두 세 곳을 빼면 주가 그래프에 공통점이 보인다. 지난 2~3년간 주가가 거의 변동 없이 저가에 머물다가, 특정 시점에 제트기가 수직 급상승하듯이 올랐다는 점이다[그래프 참조]. 30개 종목 중 연초 주가가 1만원 이상이었던 종목은 한미약품·한미사이언스·인트론바이오 3곳에 불과하다. 5000원 미만이 25곳이고, 그중 4곳은 1000원도 되지 않는 초저가주였다.이들 종목은 어떤 이유로 주가가 급등했을까? 본지 조사 결과, 30개 종목 중 올해 들어 현저한 시황변동(주가 급등)으로 한국거래소부터 조회공시 요구를 받은 곳은 21곳이었다. 원풍물산·삼성제약·젬백스테크놀로지·케이피티·신라섬유·케이에스씨비는 5개월 사이 두 차례나 조회공시 요구를 받았다. 그런데, 21곳 모두 답변은 한결같았다. ‘최근의 현저한 시황변동과 관련해 별도로 공시할 중요한 정보가 없다.’ 한마디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코스닥 상장사 IR담당자는 주가 급등 이유를 묻는 기자 질문에 “우리도 이유를 몰라 답답하다”고 말했다. 한국거래소가 시황변동과 관련해 조회공시를 요구하는 이유는 특정 종목이 이상 급등락할 경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확인해 투자자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차원이다. 하지만 조회공시 요구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 ‘이유 없음’이고, 공시 답변 이후 오히려 주가가 더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상황이 이렇자 개인투자자 사이에서는 ‘조회공시 요구는 주가가 잘나가고 있다는 증거’라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나돈다.또 한가지 문제는 이유도 없이 이상 급등한 종목에 대해 투자 경고가 있어도 투자자들이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해 주가가 300% 이상 오른 30개 종목 중 룽투코리아·신라섬유·양지사 3곳은 한국거래소로부터 투자위험종목으로 지정된 바 있다. 이너스텍·위노바·한국화장품·씨그널엔터테인먼트 등 17곳은 투자경고 종목에 포함됐었다. 한국거래소는 특정 종목의 주가가 비정상적으로 급등할 경우 투자 경고 종목으로 지정하고, 그래도 뇌동매매가 진정되지 않으면 투자 위험 종목으로 지정해 매매를 일시 정지시킨다. 하지만, 이런 경고에도 주가가 진정된 곳은 거의 없었다.그렇다면 이들 30개 종목의 실적은 어땠을까? 30곳 중 9곳은 지난해 영업이익 적자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2~3년 연속 적자를 본 기업도 적지 않았다. 올 들 주가가 627%나 오른 위노바는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주가가 300% 이상 오른 코리아나(390%)·한국화장품(361%)·KGP(318%) 역시 3년 내리 영업 손실을 봤다. 또한 룽투코리아와 삼성제약·루보 등은 2년 연속 적자 기업이다. 흑자를 유지했거나, 흑자전환 한 종목 중에도 주가가 급등할 만한 실적을 기록한 곳은 드물었다. 주가가 588% 오른 이너스텍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4억5000만원에 불과했다. 639% 오른 원풍물산은 영업이익 11억원을 기록했지만, 3년 내리 감소세였다. 2012~2013년 적자를 보다 지난해 흑자 전환 한 아이에스이커머스는 주가가 400% 넘게 올랐는데, 영업이익은 1억8000만원에 그쳤다. 지난 수년간 3000~4000원대였던 주가가 한때 5만원대까지 오른 신라섬유는 지난 4년간 벌어들인 영업이익을 다 합쳐도 20억원을 갓 넘는다. 코넥스 상장사인 툴젠은 올 들어 주가가 350% 올랐는데, 지난해 영업이익은 1억6000만원이었다. 30개 종목 중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유지하거나 뚜렷한 실적 개선을 보인 곳은 산성앨엔에스·대림비앤코·서울옥션·한미사이언스 정도였다.
개미의 무덤으로 전락할 수도특별한 호재도 없고, 실적도 부진한데 주가가 급등한 종목들은 대부분 근거도 없는 테마주에 엮인 경우가 많았다. 사물인터넷·유커·핀테크·정치인·메르스 테마주 등에 묶여 주가가 올랐고, 일부 종목은 통정 매매 등 작전 세력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합당한 근거 없이 이상 급등한 종목의 주가가 유지될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이런 종목들은 뒤늦게 매수에 나선 개미의 무덤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신라섬유가 좋은 예다. 이 회사 주가는 올 1월 들어 급등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호재는 없었다. 신라섬유는 두 차례의 조회공시(주가 급등) 요구에 모두 ‘공시할 중요한 정보가 없다’고 답변했다. 지난해 12월 초 신라섬유 대주주 일가의 차명주식이 발견돼 경영권 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주가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올 1월 2일 3490원이던 주가는 2월 27일 5만500원으로 치솟았다. 이 사이 상대적으로 유통 주식 수가 적은 심라섬유 주식을 사기 위해 개인 투자자들의 매수 경쟁이 붙었다. 하지만 주가는 한 달 후 2만원대로 떨어졌고, 지난 4월에는 유통주식 수가 20%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관리종목에 지정되면서 또다시 급락했다. 최근 주가는 1만 5000~1만600원 안팎이다. 이 회사 실적은 어땠을까. 신라섬유의 지난해 매출은 30억3300만원으로 전년 대비 40% 줄었고, 영업이익은 5억5700만원으로 같은 기간 24% 감소했다. 올 1분기 매출도 5억6000만원에 불과하다. 이런 실적으로 한 때 주가가 14배까지 오른 것이다. 이 회사 종목 게시판은 지금도 개미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어디 이 회사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