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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소믈리에 제프 크루스] “기억에 남는 와인 스토리 전해라” 

컴퓨터 엔지니어에서 변신 ... 세계 202명뿐인 와인 전문가 


▎제프 크루스 마스터 소믈리에가 오리곤 레드 와인의 향을 맡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제프 크루스(Geoff Kruth·40) 소믈리에는 누구보다 냅킨을 잘 펼치고, 접고, 와인 병을 몸의 일부처럼 다룬다. 손님과 눈빛을 교환한 뒤 기분을 살피고, 업장에 근무 중인 다른 직원의 동선을 고려해 움직일 방향을 잡는다. 심지어 샴페인 마개를 감싼 알루미늄 호일이 몇 번 만에 완전히 풀리는지를 고객에게 알려준다. 스파클링 와인을 잔에 정성스레 일정하게 따르고 레드 와인 디캔팅을 하면서 간결한 동작으로 눈을 떼지 못하는 것까지 행동 하나로 그의 전문성을 보여준다. 바로 전 세계 202명뿐인 ‘마스터 소믈리에(MS)’다.

미국 노스웨스트 와인협회 주최로 5월27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오리건·워싱턴주(州) 와인 데이’에 강사로 참가한 크루스를 만났다. 그는 소믈리에 최고의 자격증으로 꼽히는 MS에 대해 “엄격한 필기 시험과 테스팅을 통과해야 해 보통 4,5수를 하는 등 평균 10년 준비를 한다”며 “자격증을 따면 수석 소믈리에보다 연봉이 두 배쯤 뛰어 평균 15만 달러에 달한다”고 소개했다.

MS는 학력이 중요하지 않다. 올해 4월에 발표한 4명의 합격자 중에는 5수를 한 하버드대학 졸업생과 와인 업계 경력이 5년도 채 안 된 고졸자까지 다양했다. 현재 한국인 MS는 한 명도 없다. 와인 지식과 테스팅이 부족하기보다는 정교한 표현을 해야 하는 영어가 장벽이다. 한국계로는 재미교포 윤 하(Yoon Ha, 한국명 하윤석)씨가 유일하다.

한국인 출신 마스터 소믈리에는 없어

한국 방문이 처음인 그는 “아시아 와인 시장은 급속히 확대되며 발전한다”며 “한국에서 와인이 소주처럼 일상 생활의 문화로 정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크루스는 애초 컴퓨터 공학도였다. 미국 소노마주립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실리콘밸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좋은 와인과 음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점점 와인의 매력에 빠져들어 소믈리에로 직업을 바꿨다”고 말했다. 이후 미국 고급 레스토랑의 와인 매니저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아 MS 자격증을 땄다. “연봉만 생각하면 컴퓨터 엔지니어가 더 좋겠지만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관련 직업을 택한 게 개인적으로 큰 행복”이라고 덧붙였다.

크루스는 ‘길드 오브 소믈리에(Guild of Sommeliers)’의 최고운영책임자도 맡고 있다. 영어권을 기반으로 한 세계 7000여명의 소믈리에가 활동하는 비영리 단체다. ‘길드 오브 소믈리에 오디오 팟캐스트’를 운영하면서 음식·와인 부문에서 수많은 다운로드 히트를 기록했다. 한국에서 소믈리에를 꿈꾸는 학생과 와인 애호가에게 자신의 특이한 경력을 증명하듯 이런 충고를 했다. “와인 공부에 ‘늦깎이’는 없다. 향을 잘 맡는 후각보다는 열정이 더 중요하다. 와이너리에서 태어나 말을 배울 때부터 와인을 접한 유럽의 전설적인 소믈리에 이야기에 기가 죽을 필요가 없다. 와인 산지로 여행을 떠나 음식과 와인을 자주 경험할 것을 추천한다.” 책으로 공부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와인은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소믈리에 이야기를 꺼내자 “미국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지난 20여년 동안 점점 소믈리에 역할이 중요해지고 전문적인 직업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좋은 소믈리에는 고객이 특별한 와인을 주문할 경우 단순히 책에서 공부한 품종이나 맛과 향을 전달하기보다는 기억에 남을 만한 스토리를 덧붙인 경험을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소믈리에는 또 근무하는 레스토랑의 음식·와인의 평균 가격이 서로 부합하는지 파악해 리스트를 만들고 재고까지 꿰뚫고 있어야 한다. 고객을 중시하는 겸손한 서비스뿐 아니라 레스토랑의 수익성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아울러 음식과 와인을 결합한 이벤트를 만들고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마케팅에 기여하면 금상첨화라고 했다. 크루스는 “이런 활동을 할 때 직업 윤리를 명심해야 한다”며 “지속적으로 와인 교육을 받고 소믈리에끼리 네트워킹 구축도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고객이 와인에 대해 불만족할 경우 무조건 와인을 교환해줬다”고 덧붙였다. 단기적으로는 레스토랑의 수익이 감소할 수 있지만 해당 손님이 주변에 불평을 늘어 놓는 악영향을 고려한다면 장기적으로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음식에 잘 어울리는 와인(마리아주)을 추천할 때도 그는 기본을 강조한다. 음식이 지닌 단맛·쓴맛·짠맛·신맛에 감칠맛과 질감을 먼저 고려한다. 다음에 와인이 지닌 단맛·신맛·쓴맛(타닌)에 알코올이 더해져 음식과 만났을 때 일으키는 상호 작용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주재료와 조리방식, 때로는 재료를 압도하는 소스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스포츠 경기에서 체급을 맞추는 것처럼 음식과 와인도 체급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 전통 음식에는 클래식한 와인을 매칭하고, 때로는 음식과 와인이 보완적인 기능을 하도록 추천한다. 때로는 대조되는 매칭에 도전할 수 있다. 항상 상호작용이 생긴 원인을 파악하고 기억하면 새로운 시도가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북서부 지역 와인 생산지는 오리건주와 워싱턴주로 나뉜다. 생산량은 캘리포니아주의 각 5% 안팎이지만 미국에서는 각각 2,3위 와인 산지다. 오리건은 바닷가의 영향으로 피노누아·피노그리 같은 품종을 생산한다. 워싱턴주는 프랑스 보르도와 위도가 비슷해 연간 일정한 일조량을 지닌다.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시라 품종에서 나오는 묵직하고 힘 있는 레드 와인이 유명하다. 스테이크를 비롯한 고기 요리와 궁합이 잘 맞는다. 워싱턴 지역은 강수량이 적어 필록세라 같은 병충해 발생 위험이 낮은 게 강점이다.

균일 품질합리적 가격=미국 와인

크루스는 “캘리포니아가 생산량이 풍부해 대중에게 인기인 와인이 많다면 오리건·워싱턴은 애호가가 선호하는 중·고가가 상당수”라며 “산지와 가격으로 따졌을 때 고급 와인을 대표하는 나파밸리 다음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오리건 와인은 품질의 차이가 크지 않고 가격대도 넓지 않다”며 “오리곤과 비슷한 풍미의 부르고뉴 와인이 레스토랑에서 한 병에 300∼400달러 하지만 오리건 최상급을 75달러면 마실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미국 와인의 차이점에 대해선 “와인 애호가라면 수백 달러짜리 브르고뉴 피노누아를 구입했다가 낭패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라며“미국 와인은 품질이 균일해 가격대비 가치를 제대로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유명 와인 산지는 떼루아(토양)를 중시해 관개를 일절 금한다. 이 때문에 강우량 같은 기후 영향을 많이 받는다. 포도를 수확한 해(빈티지)에 따라 와인의 품질이 달라진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기후가 좋은데다 관개를 허용해 빈티지 차이가 적어 균일한 품질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1289호 (201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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