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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도 ‘이민자의 천국’은 옛말] ‘기술·취업·투자’ 세 갈래길 

금액·나이·경력·어학능력 조건 갈수록 강화 … 일자리 부족에 문턱 높여 


▎호주 멜버른의 한 거리. 한때 ‘이민자의 천국’으로 불렸던 호주는 최근 이민 정책을 까다롭게 바꿨다.
“장점이 정말 많죠. 사계절 온화한 날씨와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연경관, 비싸지 않은 집값(대도시 제외)과 영어 교육 환경까지. 치안도 괜찮은 편이고요. 그러나 호주는 단점도 뚜렷한 나라입니다. 땅만 넓지 인구나 경제 규모를 보면 호주는 대국보다는 소국에 가깝습니다. 경제의 역동성도 떨어지죠. 예전엔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사는 분위기라도 있었는데 최근엔 일자리가 줄면서 외국인,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반감이 더욱 강해지는 것 같아요.”

한때 호주는 ‘이민자의 천국’으로 불렸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이민을 장려했다. 이른바 ‘백호주의(영국 출신 이민자와 원주민으로 구성된 호주가 유색인종의 호주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1969년까지 유지한 정책)’의 나라였던 호주의 놀라운 변신이라 할 만했다. 이 때문에 1970년대부터 전 세계에서 이민자가 몰려들었는데 한국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시기에 건너간 한국인 이민 1세대 중엔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들이 꽤 많다. 덕분에 호주는 현재 미국이나 캐나다 못지 않게 교민 사회가 발달한 나라다.

선거철마다 ‘이민법 강화’ 공약하는 호주 정치인


초창기 이민자들이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건너갔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영어교육 붐을 타고 자녀 교육을 위해 이민을 선택한 이들이 많았다. 1995년 한국과 호주가 ‘워킹홀리데이(만 30세 미만 청년들을 대상으로 해당국에서 취업과 관광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협정을 체결한 이후엔 이 비자로 1년간 호주에 갔다가 아예 눌러앉은 이들이 속속 등장했다. 비자를 1년 연장해 정착 환경을 마련 한 뒤, 영주권을 받는 식이었다. 이런 방식이든 가족 이민이든 불과 몇 년 전까지 호주는 이민이 상대적으로 쉬운 나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93년 호주로 이민해 멜버른에 거주 중인 정광열(49)씨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예전엔 시드니나 브리즈번 등 대도시라면 어느 동네에 살아도 1년에 4~5가구 정도의 새 이민 가정을 만날 수 있었지만 2010년 관련법을 바꾼 이후에 눈에 띄게 줄었어요. 호주 정부가 입장을 확 바꾼 탓이죠. 예전엔 정착 지원금을 줄 정도로 이민자를 환영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한창 성장할 땐 괜찮았지만 경기 침체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정치인들이 자국민 눈치를 많이 보게 된 거죠. 선거 때마다 이민법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와요. 실제로도 그렇게 됐고요. 투표권이 없는 영주권자는 별로 힘이 없죠.”

호주 정부는 2010년 이민 관련법을 대폭 개정했다. 나이와 취업 범위 등 이민 신청 조건을 강화하고, 영어 능력 등 심사 과정을 더 엄격하게 바꾸는 게 골자다. 호주 이민 대행사인 이엔아이이주공사 이승재 대표는 “영주권자에 대한 혜택이 좋은 호주는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나라지만 최근 취업 이민이나 기술이민 조건이 까다로워지면서 이민 심사를 통과하기 어려워진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식료품 물가는 싸고, 서비스 물가는 비싸


호주로 이민을 떠나는 방법은 크게 기술이민·취업이민·투자이민 세 가지다. 어느 나라나 같지만 투자이민이 가장 쉽다. 돈이 많이 필요할 뿐이다. 투자이민은 사업비자와 투자비자가 있는데 우리 돈으로 최소 4억1000만원에서 12억5000만원가량을 투자해야 한다. 의향이 있어도 나이 제한(만 55세)이 있어 은퇴 이후라면 신청이 어렵다. 기술이민과 취업이민은 2010년부터 요건이 훨씬 까다로워졌다. 일단 ‘취업비자(457비자)’를 제외하면 국제영어능력시험(IELTS) 6.0 이상의 뛰어난 영어실력을 갖춰야 한다. 호주 정부가 정한 직업(SOL 또는 CSOL)을 가지고, 관련 경력을 입증해야 하며 주정부나 고용주의 후원(보증)이 필요한 게 대부분이다. 이 역시 나이 제한(만 50세)이 있고, 기본 심사(Pass mark)에서 60점 이상을 얻어야 신청할 수 있다. 나이가 많을수록, 학력과 IELTS 점수가 낮을수록, 해외(호주 포함) 경력이 적을수록 점수가 낮다.

심사는 까다롭지만 영주권을 받을 수만 있다면 호주는 여전히 매력적인 나라다. 일단 교육 환경이 매우 좋은 편이다. 만 18세 미만 자녀의 초·중·고등학교 학비가 없고, 대학에 진학해도 등록금 지원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생활 수준에 따라 아동수당과 양육비 지원을 받고, 부모가 함께 일을 할 경우 아이를 돌봐주는 ‘차일드 케어(Child Care)’ 시스템도 잘 구축돼 있다. 무주택자라면 임대료 지원을 받을 수 있고, 2년 이상 거주하면 실업급여와 구직 보조금 지원 대상에도 포함된다. 4년 전 호주로 이민해 브리즈번 인근 소도시에 거주하는 이민주(41)씨는 “미국·캐나다와 비교해 정착 환경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일자리만 확실하다면 초기 비용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단, 임대료가 비싼 도심을 고집할 경우 부담이 크게 늘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민자의 천국’으로 불리기엔 여건이 너무 많이 변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드니에 거주하는 김호섭(55)씨는 “일단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한다면 호주는 절대 그 기대를 채워주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는 “인구가 적어 내수 시장은 빈약한데 큰 도시를 제외하면 사실상 성장을 멈춘 상태”라며 “고급 기술이 없고, 영어 실력이 부족하면 결국 일용직이나 농장 등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멜버른에 거주하는 박상현(45)씨 역시 “한인 대상의 사업이나 일자리는 이미 포화 상태”라며 “탁월한 영어 능력을 갖췄거나 전문 직종을 가진 중산층이라면 살 만한 곳이지만 무턱대고 뛰어들기엔 제한 요소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조건 충족하면 일찌감치 영주권 받아두라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민주씨는 “호주 고용주들이 한국인의 일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영어에 자신 있는 젊은층이라면 충분히 도전할 만하다”고 말했다. 이러나 저러나 전제 조건은 영어 실력인 셈이다. 호주에서 유학한 배태성(33)씨는 “영어권 출신들은 비영어권 국가에 와도 그럭저럭 살지만 비영어권 출신이 영어권 국가에 살면서 영어를 못하는 건 정말 답이 없다”며 “호주에서 3~4년을 살아도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이 부지기수인데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시급 10달러 안팎의 비정규직 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주요 도시의 주택 가격(임대료)과 물가가 너무 치솟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광열씨는 “호주 집값이 싸다는 얘기는 옛말”이라며 “대도시 도심 인근 임대료는 150만~200만원(월세)을 호가한다”고 말했다. 호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4년말 기준 6만2800달러로 한국의 두 배가 넘는 수준이다. 물가 역시 세계 5위권에 들 정도로 비싼 편이다. 박상현씨는 “우유·채소·육류 등 식료품 물가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선진국이 대부분 그렇듯 외식 등 서비스 비용이나 전기·가스요금 등은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며 “고정적인 수입이 없으면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재 대표는 “이민은 준비해서 가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며 “개인적으로 이민 관련 사업을 하고 있으니 신청자가 많으면 좋겠지만 여건이 안 될 경우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요리 직종으로 호주 취업 임시비자를 받으려면 최소 2년 이상의 학력과 3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하다. 이미 이런 조건을 채운 사람이라면 도전할 만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해서 이민을 갈 생각이라면 맘을 바꿔먹는 게 좋다는 조언이다. 5년 사이 이민 정책이 더 엄격하게 바뀔 수도 있는 등 변수가 너무 많아서다. 이 대표는 “그렇다 해도, 조건이 된다면 미리 신청해두라”고 조언했다. 영주권을 취득해도 5년 내로만 출국하면 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정리할 시간이 있다는 의미다. 이 대표는 “나이 등 여러 제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민을 고민하고 있다면 기왕이면 일찍 영주권을 받아두는 게 좋다”고 말했다.

-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ins.com


▎뉴질랜드 최대 도시 오클랜드의 야경. 호주 못지 않게 이민이 활발했던 뉴질랜드는 2011년 큰 지진이 발생한 이후 이민 문의가 급감했다.
[박스기사] 관심 급감한 뉴질랜드 이민 - ‘제2의 리디아 고’는 찾기 힘들 듯

세계 여자 프로골프의 정상급 선수인 리디아 고(18)는 뉴질랜드 교포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섯 살이던 2003년 이민을 떠났는데, 아버지 고 길홍씨는 골프 환경이 좋은 곳에서 딸을 키우려 뉴질랜드로 건너왔다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 ‘제2의 리디아 고’가 탄생할 가능성은 점점 작아질 것 같다. 최근 뉴질랜드 이민자가 확 줄었기 때문이다. “관광이나 유학이면 몰라도 생활은 전혀 다른 문제잖아요? 예전엔 환율 여건이라도 좋았는데 요즘은 아니니까요. 더구나 뉴질랜드는 경제 규모가 워낙 작아서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아요. 최근 현지에선 자국민과 외국인 간 일자리 다툼이 심각하다는 보도가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1995년 뉴질랜드로 건너가 20년 째 오클랜드에 거주하는 최민호(47)씨는 이민 환경이 나빠지면서 한국인 이민자가 확 줄어든 걸 체감한다고 했다. 그는 “의사 등 전문 직종이 아니면 할 일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라며 “2011년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대도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지진이 발생한 이후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것도 한 이유”라고 말했다.

호주 못지않게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뉴질랜드는 한 때 한국인에게 꽤 인기 있는 이민국이었다. 미국·캐나다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자녀에게 영어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됐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까지 활발했던 뉴질랜드 이민은 최근 문의 자체가 거의 실종됐다고 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10년 전까지 꽤 많았던 뉴질랜드 전문 이민 대행사가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며 “유학이나 관광 수요는 여전 하지만 이민 문의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뉴질랜드의 성장세 둔화와 일자리 부족 등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지만 호주와 마찬가지로 정치권의 움직임이 예전과 달라진 것도 한몫했다. 지난 2월 뉴질랜드 야당 데니스 오루크 의원은 국회 발언을 통해 “오클랜드에는 이민자는 말할 것도 없고 뉴질랜드인이 살 집도 충분하지 않다”며 “정부가 외국인의 뉴질랜드 이민을 완전히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요 도시의 주택난이 심각해지고, 가격이 크게 오른 데 따른 시민의 불만을 반영한 발언으로 보인다. 한 정치인의 개인적인 발언이긴 해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 이런 정서가 뿌리내리고 있다는 게 현지 교포들의 지적이다.

1299호 (201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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