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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후이상의 대박상품 ‘황산마오펑’ 

중국 10대 명차에 오른 녹차 … 독자 개발 집념의 산물 

서영수

▎72개 봉우리로 이루어진 황산비경.
상아처럼 하얀 솜털이 날렵한 찻잎을 뒤덮은 모양의 ‘황산마오펑(黃山毛峰)’은 처음부터 수출을 목적으로 씨에정안이 안후이성 황산에서 1875년부터 만든 녹차다. 황산마오펑은 상하이에서 첫 선을 보이자마자 최고의 몸값으로 영국과 러시아로 수출됐다. 가짜 차의 엄청난 쓰나미로 한동안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지만 중국차왕 타이틀을 가진 황산마오펑은 중국 10대 명차로서 후진타오가 2007년 푸틴에게 선물한 국차(國茶)로 더욱 유명해졌다. 황산마오펑이 오명을 벗고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유가(儒家)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후이상(徽商)의 경영철학 덕분이다.

후이상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즈(朱子)를 숭상하는 유상(儒商)이다. 중국 3대 지역문화인 후이저우(徽州)문화는 후이저우에서 태어나 중국 각지로 진출해 성공한 후이상이 전파한 문화다. 후이상은 어려서부터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장사를 하고 성공하거나 은퇴를 해야 돌아올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승에서 덕을 쌓지 못하면 후세에 후이저우에서 태어나 평생 장돌뱅이로 살게 된다’는 속언도 있다. 안후이성 출신의 자유주의자 후스(胡適)는 명나라 때 회자되던 ‘후이상이 없으면 도시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해 ‘후이상이 없으면 중국에 상업이 없다’고 할 정도로 후이상의 위상과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후이상은 유교의 가치관을 존중했지만 정경유착에 능해 관상(官商)이라고도 했다.

후이상이 없으면 중국에 상업이 없다


▎2. 씨에위따 차창을 재현한 모습. / 3. 황산마오펑 창시자 씨에정안. / 4~5. 흰털로 덮인 어린 잎(위)과 완성된 찻잎.
정치도시 안칭(安慶)과 경제도시 후이저우가 합쳐져서 이뤄진 안후이성은 삼국지의 조조가 짝사랑한 소교의 고향이다. 조조도 안후이성 보저우 출신이다. 청나라 홍정상인(紅頂商人, 관리와 상인을 겸한 공무원 신분)으로 출발해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북양대신에 올라선 리훙장(李鴻章)과 장사의 신으로 불리는 후쉬에옌(胡雪巖)도 안후이 사람이다. 후진타오(1942년 12월 21일생)는 공식문서에 고향을 안후이성 지시현으로 기록하지만 후진타오의 실제고향은 장쑤성 타이저우시다. 그의 부모는 동네에서 차(茶)가게를 운영했다. 그의 선조들은 안후이성에서 대대로 차를 재배했다. 조상의 호적을 따라 안후이성을 고향으로 여기는 후진타오의 정서는 중국인으로서 무리는 아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후진타오를 후계자로 지목한 장쩌민(江澤民, 1926년 8월 17일생)의 고향도 장쑤성이다. 장쩌민과 같은 고향이라는 인민의 부정적 인식을 고려한 정치적 배려가 담긴 행위다. 고향이 같은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조상도 모두 안후이성에서 살아왔다.

황산마오펑의 창시자 씨에정안은 18세부터 아버지를 따라 객지를 떠돌아다니며 차 사업에 뛰어들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태평천국군이 안후이성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가산을 모두 털리고 때마침 몰려온 전염병으로 일가친척들이 길거리에서 죽어나갔다. 겨우 처자만 데리고 고향에 돌아온 씨에정안은 몸 하나 가눌 집도 없었다. 버려진 산비탈을 개간해 차나무를 부지런히 심으며 집안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1864년 8월 태평천국의 난이 잠잠해지면서 리훙장이 앞장서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일으켜 다방면으로 서양과 교역을 넓혔다. 차는 이윤이 많이 남는 내수품인 동시에 당대 최고의 수출 품목이었다.

씨에정안은 가업을 이어 고향인 차오시에 씨에위타이차항을 세워 차 생산과 판매를 시작했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서 수출에 눈을 뜬 씨에 정안은 상하이로 진출했다. 수출을 관장하는 양장(洋莊)을 통해 해외에 차를 수출하고 싶었지만 전국에서 으뜸가는 차들이 이미 수출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지명도와 품질에서 다른 차를 이길 수 있는 차가 그에게 없었다. 독보적 킬러상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그는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차 개발에 전념했다.

황산을 헤매던 그에게 1200년 전부터 황산의 최고봉 리앤화펑(蓮華峰, 1864m) 아래 바위틈 척박한 땅에서 소량 재배되던 황산윈우차(黃山雲霧茶)가 눈에 띄었다. 긴 세월 속에 이어져오는 풍성한 설화를 가진 윈우차를 재가공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조상대대로 내려온 차 가공기술을 발휘하여 새로운 차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윈우차라는 이름으로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차가 이미 있었다. 브랜드 네이밍에 고심하다가 ‘황산마오펑’으로 낙점했다. 상호도 씨에위따차항으로 바꿔 달고 황산마오펑을 상하이로 가져갔다. 차를 시음한 상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단숨에 안후이성 최고의 차창으로 부상하며 거부가 됐다. 황산마오펑이라는 상표를 너도나도 사용해 차를 만들어 팔았다. 씨에정안이 원조인 황산마오펑은 녹차의 대명사가 됐다. 성공한 상인이 관직을 겸하는 홍정상인이 된 씨에정안은 전국에 지점을 냈다.

유가의 성신(誠信)이 경영이념으로

안후이성 역사상 10대 후이상으로 기록된 씨에정안은 1910년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아들 넷이 가업을 이었지만 중국은 이미 군벌과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수출 길이 막히며 차 사업은 급속히 쇄락했다. 생산량이 감소하며 지점들도 문을 닫기 시작했다. 가짜가 판치고 진짜는 잊혀져 갔다. 1955년 황산마오펑은 중국 10대 명차에 들었지만 사회주의 계획경제 아래 생산량과 질이 모두 떨어졌다. 전문직과 지식인이 탄압받던 문화대혁명기간은 차와 공자도 박멸대상이었다. 개혁개방 이후에 씨에위따차항은 한때 티엔밍장(天茗莊)으로 개명하여 차를 생산했지만 황산은 물론 다른 성에서 만들어진 가짜 황산마오펑의 대량 유통으로 전국 품질검사에서 최하위 점수를 받기도 했다. 가문의 치욕사로 여긴 씨에정안의 5대손 씨에이핑(謝一平)이 1995년 직장을 버리고 나와 정통 황산마오펑의 재건에 팔을 걷어붙였다.

상호를 가문의 얼이 담긴 씨에위따로 다시 바꾸고 차밭과 다원을 정리해 농민과 협업을 시작했다. 엄격한 상표관리와 품질개선에 공을 들인 지 10여년 만에 황산마오펑은 중국 차왕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황산마오펑의 탄생과 재건은 유가의 성신(誠信)을 경영이념으로 삼은 후 이상의 쾌거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1316호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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