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며 기만책을
쓰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칭찬받을 만한 일인가를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경험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군주는 자신의
약속을 별로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혼동시키는 데에 능숙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의에만 입각한
군주들을 압도해왔다.’ -[군주론] 18장
신의와 성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큰 자산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분명한 약속은 ‘믿기 어려운 사람’이 서명한 계약서보다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의와 성실도 개인과 리더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간은 오랜 역사를 통해 정직의 가치와 윤리규범을 만들었지만, 선의든 악의든 일정 수준의 거짓말과 책략은 인간생활에서 반복되는 엄연한 현실이자 불편한 진실이다. 만약 협소한 의미에서 신의와 정직을 목숨처럼 여기는 순진한 군주가 책략에 능숙한 상대방에게 속아서 공동체를 파멸시키는 것은 온당한가. 손해를 예상하고도 신의를 지키려는 태도는 개인이라면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겠지만, 리더의 입장은 다르다.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례는 오늘날 페루와 칠레에 걸쳐 있었던 500년 전 잉카제국의 패망이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의 남미 정복이 본격화되었고 피사로는 1532년 잉카제국 원정에 나섰다. 우연히 조우한 잉카황제 아타우알파가 피사로의 책략에 속아서 비무장으로 진영을 방문하자 포로로 삼았다. 피사로는 1개 방을 금으로, 2개 방을 은으로 채우면 풀어주겠다고 제안하였고, 잉카황제는 약속대로 금은을 건넸지만 돌아온 것은 죽음이었다. 뒤이은 전투에서 8만 명의 잉카 군대가 총포로 무장한 스페인군 168명에게 참패하면서 잉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원주민은 식민지의 노예로 전락했다.청나라 말기의 사회사상가 리쭝우의 후흑학 관점에서 중국 역사의 영웅호걸들은 대부분 낯두껍고 음흉하며 속이 시커먼 인물들이다. 한나라 시조 유방, 삼국지의 유비, 명나라 건국자 주원장을 비롯해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그 명단은 길다.현실의 군주가 거짓과 책략을 구사하는 상대방에게 신의와 성실로만 대응하는 것은 백전백패의 지름길이다. 신의와 성실에만 입각해서 상대방과 진실하게 협상하면 자신의 패는 공개된 반면, 거짓과 책략이 무기인 상대방의 패는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의 운명을 책임진 리더는 신의와 책략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모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개인이든 조직이든 위장과 속임수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장기적으로는 결국 성실하고 신뢰를 지키는 개체가 살아남고 발전한다. 그러나 위장과 속임수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지도 못하는 순진함으로는 생존조차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나쁜 의도를 가진 타인의 위장과 속임수에 속지 않도록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역량은 현실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