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1977)에서 ‘1650년 세계의 중심은 조그마한 홀란드, 아니 암스테르담이었다’고 말했다. 대항해 시대의 선두주자였던 에스파냐를 제치고 네덜란드는 동방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해운업과 조선업은 무역의 발전을 지원하는 쌍두마차였다.낮은 땅이라는 국가명을 지닌 네덜란드는 습지를 바다로부터 지키기 위해 제방을 쌓고, 자연의 악조건과 투쟁해야 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작한 네덜란드인들은 불굴의 정신력을 발휘했고 자기 통제력이 뛰어났다. 부의 축적을 죄악시하는 중세적 가치관으로부터 해방되어 종교적 자유를 추구했고, 칼뱅주의는 네덜란드의 경제 발전을 이끄는 근대적 가치관이 됐다.북유럽 수자원의 핵심인 청어가 발트해로부터 북해로 이동한 덕에 네덜란드의 어업이 발전했다. 그래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은 “암스테르담의 건설은 청어의 뼈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업의 발전은 네덜란드 상업경제의 원시적 자본 축적에 기여했다. 그리고 독일 도시의 느슨한 연맹체인 한자동맹(Hansa Bund)과 무역업, 해운업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에서 승자가 됐다.영국보다 2년 늦게 시작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기업,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자본금 규모에서 영국보다 10배나 많았다. 대항해 시대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를 제쳤고, 영국에 앞섰다. 또한 베네치아 은행을 본떠서 만든 암스테르담 은행은 18세기까지 유럽을 주름잡는 국제금융의 선도자였다. 1670년까지 네덜란드의 선박 총톤수는 영국의 3배였다. 영국보다 무려 40~50% 싼 비용으로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기술도 보유하고 있었다.그런 네덜란드의 조선업과 해운업이 18세기에 접어 들면서 왜 영국에 자리를 물려줬을까? 네덜란드는 새롭게 부상하는 영국과 수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해운업과 무역업이 하향 곡선을 그렸다. 특히 스스로 성공에 도취돼 산업혁명의 대열에 끼지 못했다. 무역과 해운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 상인들은 대규모 토지를 구입하면서 점차 귀족화의 과정을 밟았다.암스테르담은 점점 화려했던 베네치아의 모습을 닮아 갔다. 1673년에 발생한 튤립 버블은 네덜란드가 얼마나 투기 광풍에 휘말렸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한 일례이다. 암스테르담의 상업자본과 금융자본은 산업혁명을 이끄는 산업자본으로 변신하지 못했다. 굳이 영국과 같이 산업화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될 만큼 풍요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봉건제도의 유물인 네덜란드의 수공업 길드는 대규모 생산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도입에 소극적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영국에서 막 산업혁명이 시작할 무렵인 1776년 불후의 명저 [국부론]에서 네덜란드야말로 영국보다 잘 사는 나라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미래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전쟁으로 네덜란드 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게 되자 생필품에까지 세금을 부과하면서 노동자의 임금도 급등했다고 지적했다. 고임금과 노동력 부족은 결국 네덜란드가 산업혁명 대열에 끼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가 됐다.- 왕윤종 SK경영경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