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경제민주화 TF(태스크포스) 팀장을 맡고 있는 최운열 의원은 6월 21일 일각에서 ‘리디노미네이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 “화폐단위를 현실에 맞게, 우리 국격에 맞게 변경하면 부수적인 효과로 지하경제 양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
최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치인 1.25%로 인하했다. 이와 더불어 정부가 추경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만큼 우리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내수가 위축되고 있다. 저금리와 주식시장 부진으로 금융자산이 늘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고용마저 불안하다 보니, 가계가 저축을 늘리고 있다. 지난해 가계 순저축률이 7.7%로 200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은행 자금순환에 따르면 지난해 말 497조원 정도의 현금성 자산을 가지고 있는 기업도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한국은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가 넘을 정도로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이다. 그러나 2015년 이후 수출이 계속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세계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2012~15년 엔화 가치 하락 효과가 시차를 두고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다가 세계 경제의 공급 과잉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기에 당분간 수출이 크게 늘어 우리 경제 성장을 주도할 가능성은 작다.이처럼 내수와 수출이 다같이 위축된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화폐단위 변경)’을 통해 내수를 부양하고 통화가치의 적정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가치 변동 없이 화폐액면단위만 바꾸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미 두 차례 실시한 적이 있다. 1차는 1953년 2월 15일 ‘대통령긴급명령 제13호’였다. 당시 전쟁으로 생산 활동이 크게 위축된 반면 거액의 군사비 지출로 인플레이션 압력과 더불어 우리 통화의 대외가치가 폭락했다.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고 화폐 액면금액을 100대1로 절하했다. 2차 리디노미네이션은 1962년 6월10일 ‘긴급통화조치법’에 의해 단행했다. 화폐의 액면을 10분의1로 조정하면서 새로운 ‘원’으로 표시했다. 퇴장자금을 양성화해 경제개발 계획에 필요한 투자자금으로 활용하는 것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경제 규모 확대로 거래단위 편리성 요구3차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대내적으로 한국 경제 규모가 확대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전체 금융자산이 2010년부터 1경(10,000,000,000,000,000)을 넘어섰고, 2015년 말에 1경4599조원에 이르렀다. 규모가 이처럼 크다 보니 조 단위로 발표하고 있다. 거래 단위의 편리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미 대부분 커피숍에서는 4500원에 해당하는 커피 값을 ‘4.5’로 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1997년과 2008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경제가 지나치게 수출 중심으로 성장했는데,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어느 정도 내수 부양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한국의 대외 위상을 제고시킬 수 있다. 수출로만 따지면 2015년 한국의 수출은 5268억 달러로 세계 6위인데, 1달러당 1000원대의 환율은 너무 높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대만 통화는 2015년 5월 말 현재 미 달러당 32.6 대만달러, 싱가포르 1.38 싱가포르달러. 말레이시아 4.13 링깃 등으로 단위가 낮다. 중국 위안도 달러당 6.59위안 정도이다. 한국 원화 환율도 두 자릿수 이하가 필요한 시점이다.그럼에도 정책 당국자가 리디노미네이션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장점은 앞서 살펴본 논의 배경과 같다. 무엇보다도 먼저 대외 위상을 제고할 수 있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달러당 1000원보다 10원일 때 한국의 원화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할 것이다. 다음으로 화폐 단위 축소로 거래가 쉬워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수를 부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한국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0년 35%(명목 GDP 기준)에서 2012년에는 56%(2015년 50%)로 올라갔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54%에서 51%(2015년 50%)로 하락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현금지급기 등 다양한 기기와 금융거래 관련 소프트웨어가 변경되어야 한다. 지금 단계에서 그 규모를 쉽게 추정할 수 없지만 상당한 투자와 고용 창출이 있을 것이다.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지하경제 양성화, 내수 부양또한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어느 정도 지하경제를 양성할 수 있다. 한국은행의 ‘2015년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36조원 정도의 화폐가 발행되었는데, 이 가운데 5만원권이 21조원으로 58%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5만원권의 환수율(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돈의 비율)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5만원권의 환수율은 40%(2014년은 30%)로 2012년(62%)보다 훨씬 낮아졌다. 한국의 통화승수(=M2/본원통화)가 올해 4월 17배로 나타났는데, 2008년 26배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통화승수가 이처럼 급락한 것은 한국 가계의 현금통화 보유비율이 크게 늘어난 데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돈 전부가 지하경제에서 거래되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들이 일상적인 거래를 위해 지갑에 넣어 둔 돈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폐단위를 변경하여 새로운 통화를 발행하면 사장된 돈이 밖으로 나올 수 있다.이런 장점과는 달리 리디노미네이션을 했을 때 단점도 있다. 무엇보다도 경제 주체가 불안해 할 수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으로 표시되는 재화와 서비스 가격의 단위만 바뀔 뿐이지 재화와 서비스들의 상대가격에 변화가 없다. 따라서 각 경제 주체의 소득이나 물가, 환율 등 거시변수에도 실질적 변화는 없다. 그러나 일부 경제 주체가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껴 자금을 부동산 등 실물자산에 투자하면서, 이들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오를 수 있다.또한 화폐단위를 변경하게 되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한국은행이 새로운 돈을 찍어내기 위해서 값비싼 종이를 수입해야 한다. 은행 등 금융회사들은 기존의 기기를 교체해야 하며, 여기에 맞은 소프트웨어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기업도 생산하는 물건의 가격표를 다 바꿔야 한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중국 음식을 파는 음식점도 메뉴에 적혀 있는 가격을 전부 변경해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메뉴 코스트’를 부담해야 한다.문제는 이런 비용과 편익 중 어느 것이 더 클 것인가에 있다. 그래서 이주열 한은 총재는 2014년 3월 인사청문회에서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시행 시 부작용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지금 상황에서 상당한 논란과 비용이 불가피한 화폐단위 변경을 추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반대 의견을 표시한 적이 있다. 그 후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치까지 내릴 만큼 한국 경제에 디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졌기 때문에 지금 질문을 받으면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은행 등 정책 당국에서 편익과 비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등 공개적으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국내 경제환경은 리디노미네이션 요구필자는 리디노미네이션의 편익과 비용을 구체적으로 계산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거시적 측면에서 볼 때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은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을 했던 나라들을 보면 대체로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을 더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었던 2008년부터 한국 경제에는 디플레이션 압력이 존재하고 있다. 실제 국내총생산(GDP)이 잠재 GDP 이하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물가가 매우 낮은 수준에서 안정되고 있다. 2013~5년 소비자물가가 연평균 1.1% 상승하는 데 그쳤다. 한국은행이 목표로 내세운 2.5~3.5%의 하한선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한국은행은 2016~18년 소비자물가상승률 목표를 2%로 낮췄지만, 올해 들어서도 5월까지 1.0% 상승에 그치고 있다.세계 거의 모든 산업에서 초과 공급 상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각 국가 경제에 디플레이션 압력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다가 한국은 원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중장기적으로 물가가 더 안정될 수 있다. 2015년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GDP의 7.7%였다. 미국은 이를 보고 한국을 환율감시국으로 지정했다. 한국의 내수 부진으로 수입이 늘지 않으면서 앞으로 몇 년 동안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되고 이는 원화 가치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는 만큼 수입 물가 하락을 통해 소비자 물가는 안정될 가능성이 크다.이런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은 내수를 부양해 수출 중심의 불균형 성장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줄 수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할 경우 금융거래와 관련된 전산기기 교체가 필요하고 소프트웨어 수요도 늘어 내수부양 효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한편 리디노미네이션의 경우 자산 가격이 단기에 상승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삼성전자 주식이 최근 주당 140만원 안팎에서 거래되고 있다. 만약 화폐단위가 100분의 1로 변경되면 삼성전자 주가는 1만4000원 정도가 된다. 실질적 가격 변화는 없지만, 투자자에게는 일단 싸게 보인다. 그래서 삼성전자 주식을 살 수 있다. 또한 9500만원의 가치가 나가는 부동산이 있다고 치자. 앞의 경우와 같이 리디노미네이션이 단행되면 이 부동산 가격은 95만원이지만 부동산 거래 관행상 100만원에 매매가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 단기적으로 이러한 자산 가격 상승이 부의 효과를 통해 소비를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산 거래가 활성화하면 여기서 부차적으로 세수 증대도 노려볼 수 있다.
단기적으로 자산 가격 상승 가능성투자와 소비가 늘면 경상수지 흑자도 자동적으로 줄어든다. 그러면 시장에서 원화 가치 상승 압력이 줄고, 더 크게는 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 압력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정책 당국이 리디노미네이션을 적극 검토할 시기이다.
김영익 -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대신증권·하나대투증권에서 리서치센터장을 역임했고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을 거쳤다. 2010년 한국창의투자자문 리서치대표로 자리를 옮겨 ‘랩 어카운트’ 투자 열풍을 일으켰다. [3년 후 미래] [이기는 기업과 함께 가라] [컴퓨터를 활용한 경제 분석 길잡이] [프로로 산다는 것]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