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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 (18)] 쓴 소리에 귀 닫은 인조의 독단 

장유의 대사간 사직상소... 다양한 의견 경청하고 판단해야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은 구세력에 대한 일대 숙청작업에 돌입했다. 광해군 시대를 주도했던 정인홍·이이첨·유희분 등이 처형되었고, 자결한 영의정 박승종도 가산이 적몰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삭탈관직 되거나 유배를 떠났으며, 죽임을 당한 이도 부지기수였다. 무사한 사람도 혹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세라 숨죽여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1624년(인조2) 4월, 살얼음 같은 정국에도 훈풍이 불기 시작한다. 인조정권의 권력 기반이 공고해지고 조정이 안정을 되찾아가자, 집권세력이 ‘화해와 용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아무리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대립과 갈등의 국면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그 나라의 역량은 분산되고, 하나 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조정 대신들이 성하연·황중윤·한유상 등 광해군 때의 일로 처벌받은 이들의 형을 감경한 것은 그래서였다.

구세력에 대한 화해와 용서

그런데 이에 대해 사헌부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성하연 등은 간흉(奸凶)에게 붙어서 폐모론(인목대비를 폐위한 일)을 주장하였고 황중윤은 적(후금과 화친함)을 따르자는 논의를 맨 먼저 주창하였으니 천하의 죄인입니다. 한유상은 이이첨의 죄악이 극도에 달한 후에도 그를 주인처럼 섬겨 흉악스러운 짓에 동참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데도 갑자기 감형의 은혜를 입었으니 속히 명을 거두옵소서!’ 나라에 큰 해를 끼친 죄인들이므로 관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자 인조는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인다. ‘근래에 대신이(임금에게) 품의해 결정한 일들을 가지고 대간이 무조건 따지고 논박하곤 하는데 매우 잘못되었다. 성하연 등에게 죄가 있기는 하나 대신들이 그 경중을 참작하여 이미 결론을 낸 것이니 결코 고칠 수 없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인조2.4.12). 인조는 사헌부를 강하게 질책하며 일의 시비를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무조건 비판만 하려는 행태를 고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사간 장유(張維, 1857~1638)가 사직상소를 올리며 인조의 태도를 반박한다(이하 인용은 모두 [계곡 선생집] 21권, 대사간인피계사(大司諫引避啓辭)가 출처임). 인조반정의 2등 공신이자 대문장가로 명망이 높았고, 천문과 지리, 역술, 병법에도 능한 다재다능의 지식인이었던 장유는 문제의 초점을 다른 곳에 맞췄다. 성하연 등의 형벌을 감형해주는 것이 옳다 틀리다 이전에, 이 과정에서 나타난 인조의 자세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에서 대간의 직책을 설치하여 눈과 귀의 역할(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도록)을 하도록 한 것은 조정의 부족한 점을 바로 잡아주고 상충되는 의견을 원만하게 조율함으로써, 임금의 덕에 잘못된 점이 없도록 하고, 형벌과 정치가 지극히 타당하게 시행되도록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언관(言官, 간언을 담당하는 신하)의 입장에서는 그르게 여길 수 있고,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을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부당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니, 서로 화합하면서도 본래 의견이 같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잘못된 거조(擧措)인 줄 알면서도 바로잡아 주지 못하고, 마음속에 좋은 생각이 있어도 할 말을 다하지 않은 채, 그저 위아래가 모두 부화뇌동하면서 아첨하는 풍조만 이루게 된다면, 장차 대간이라는 것을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무릇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동일한 질문이라도 관점에 따라서, 가치관에 따라서 답은 얼마든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이 때 생각과 생각의 차이, ‘나의 답’과 ‘너의 답’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가 관건인데, 인조처럼 강제적으로 획일화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물론 조직 차원에서 하나의 방향을 확정하고, 통일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있겠지만, 먼저 충분한 논의와 토론을 통해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지점부터 찾아야 한다. 합의가 끝내 불가능하더라도 다른 의견의 장점을 빠짐없이 반영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해야 한다. 하나의 생각은 각자의 선입관과 한계에 갇혀있게 마련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 단지 높은 분이 결정한 일이라 하여, 이미 하기로 정해진 일이라 하여 다른 의견을 억누르고 봉쇄한다면, 더 좋은 길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시작도 하지 않고 폐기해버리는 것이 된다.

장유는 대간의 존재 의미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했다. 임금과 대신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자극해주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놓치고 있는 부분을 발견하도록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주며 국정 운영이 보다 완벽해질 수 있도록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를 자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금은 이 대간의 말에 귀 기울임으로써 정책을 더욱 튼튼하게, 정치를 더욱 건전하게 만들어갈 수가 있다. 하지만 당시 인조는 그러질 못했다. ‘성상께서 보위에 오르신 이래로 펼치신 정사(政事)는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으셨습니다. 다만 유독 의견을 경청하고 비판을 용납해 주시는 점에서 만큼은 미진하십니다. 어제 사헌부에 내리신 계시도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임금과 대신이 논의해 결정한 일들을 가지고 옳은지 그른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따지고 논하니 매우 잘못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신들은 아연하여 탄식을 하였는데, 대체 성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령 조정에서 시행한 조치가 백성들의 여론과 선비들의 공의(公議)에 제대로 합치되는 것이라면 신들은 마땅히 우러러보며 복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야 어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 구차하게 부화뇌동하여 나랏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방치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다니 이는 국가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단순한 트집쟁이 아닌 레드팀

이상 장유가 말하는 대간의 존재의미는 오늘날 기업의 ‘레드팀(Red Team)’과도 상통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비판할 거리를 찾고, 허점을 찾아내는 것이 주된 업무인 이들은 그저 단순한 트집쟁이가 아니다. 이들이 던지는 ‘쓴 소리’를 통해 발생할지도 모를 문제점을 선제적으로 예방하고 올바른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이러한 팀을 조직한 것이다. 또한, 업무를 직접 담당하는 사람은 전문적일지언정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주의를 주는 것도 레드팀의 역할이다. 같은 맥락에서 대간의 현대적 활용방안을 모색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끝으로, 간쟁을 하고 이것을 경청하는 것은 임금과 신하, 조직의 리더와 참모 간에만 벌어지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소학(小學)]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선비에게 간쟁하는 친구가 있으면 아름다운 이름을 잃지 않고, 아비에게 간쟁하는 자식이 있으면 불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쓴 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을 반성하는 일, 이것은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지켜야 할 자세인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43호 (201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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