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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 (21)] 무고라도 관직에서 물러나 조사받아 

신개의 ‘피혐(避嫌)’ 사직상소 ... 공직의 공정성·권위·투명성 확보하려는 노력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흔히 세종 시대의 명재상 하면 황희나 맹사성, 허조 등을 떠올리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인재(寅齋) 신개(申槪, 1374~1446). 세종이 “영의정 황희는 늙고 병들었으며 좌의정 허조는 비록 병은 없지만 나이가 70을 넘었으니, 나이도 늙지 아니하였고 기운도 강건한 신개를 우의정에 삼는다” (세종21.6.12)고 말했을 정도로 깊은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재상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인사행정과 토지조세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오늘날의 인사청문회와 유사한 ‘서경(署經)’을 확대 실시하고 과거시험의 공정성을 강화하며, 조세징수의 객관성을 확보한 ‘공법(貢法)’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신개는 139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393년(태조2)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좌정승이었던 조준은 ‘재상이 될 그릇’이라며 신개를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이조정랑, 의정부 사인(舍人), 전라도 관찰사,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런데 대사헌으로 재직할 당시 두 번의 사직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모두 ‘피혐(避嫌)’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1431년(세종13) 7월의 기록이다. 이 때 신개는 ‘그릇된 생각으로 일을 처리하는 데 민첩하지 못하여 법관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니, 직무를 그르친 꾸지람을 어찌 피하오리까’라며 사직상소를 올렸다(세종13.7.26). 무슨 일 때문에 탄핵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지만, 아무튼 탄핵을 당한 사안이 종결되고 자신의 잘잘못이 가려질 때까지 관직에서 물러나는 ‘피혐’을 선택한 것이다.

서경 확대하고 공법 확립하는 과정 주도

이어 두 번째 상소는 1432년(세종14) 7월에 올려졌다. 강원도 고성 고을의 수령 최치가 관아의 곡식을 사사로이 남용한 것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신개에게 생대구어 두 마리를 뇌물로 상납했다는 혐의가 나왔다. 이에 형조는 신개를 탄핵하였는데 신개의 해명에 따르면 생대구어는 ①사촌형 신정도가 최치와 아는 사이인데, 신정도의 집 노비가 고성에 갔다가 ‘노신(路神)에게 고사 지내는 비용(먼 길을 무사히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제를 지내는 것)’으로 받은 것이며 ②더욱이 그 노비가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사당에서 고사를 지내는 데 쓰고 다른 한 마리는 길에서 만난 지인에게 주는 등(이를 본 증인이 있음)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③생고기는 썩기가 쉬운데 어찌 한여름 더위에 서울까지 생고기를 운반하도록 했겠으며 ④정말 뇌물이라면 수백 리 먼 길에 단지 물고기 두 마리를 보냈겠냐는 것이다(세종14.7.4).

신개는 형조에 사건에 대한 신속하고도 분명한 조사를 요청하고 동시에 피혐하는 사직상소를 올렸다. ‘풍헌(風憲)의 직책은 위로는 조정의 잘잘못과 아래로는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원의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임무와 직책의 중차대함이 이와 같거늘, 신이 용렬한 재주를 가지고 잠시나마 장관(長官)의 자리를 채우게 되어 진즉에 부끄러운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혐의를 받고 있으니 태연하게 직무를 맡기에는 의리상 편치 못한 바가 있습니다.’ 관료사회의 기강을 확립하고 공직자의 행동을 감찰하는 풍헌(사헌부)의 책임자, 대사헌으로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니 비록 무고일지언정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이 자리에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이후 무혐의로 결론이 났고 신개도 직무에 복귀한다).

이와 같은 피혐은 조선의 선비들이 관직생활을 하면서 준수했던 일종의 관례인데 스스로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공직의 공정성과 권위,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또한 신개는 자신이 물러나지 않으면 ‘수뢰한 사실이 발각되었는데 대사헌이어서 사면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다’(세종14.7.4)고 우려한다. 수사기관인 형조가 현직 대사헌의 잘잘못을 제대로 가려내기 힘들 것이며 임명권자인 임금에게도 누를 끼칠 수 있으므로 차제에 자리에서 물러나 객관적인 조사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신개의 이러한 스탠스는 다른 사안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398년(태조7) 태조가 고려 공민왕에서 공양왕까지의 실록과 자신이 즉위한 이후의 모든 사초를 가져오라고 지시하자, 사관(史官)이었던 신개는 임금이 그런 명령을 내리면 역사를 직필(直筆)해야 하는 사관이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며 강하게 맞섰다. ‘옛날 당나라 태종이 방현령(房玄齡)에게 이르길 앞 시대의 사관이 기록한 것을 군주가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니, 방현령은 사관은 허위로 미화하지 않고 악을 숨기지 않으니, 군주가 이를 본다면 필시 노하게 될 것이므로 감히 임금께 올리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중략)…삼가 생각하옵건대 창업한 군주는 자손들의 모범이 됩니다. 전하께서 당대의 역사를 살펴보시게 되면 뒤를 잇는 임금들은 반드시 이를 구실로 삼아 선고(先考)께서 하신 일이요 아조(我祖)께서 하신 일이라면서 이어가고 습관화하여 실록을 보는 것을 일상적인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 되면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로서 누가 감히 직필(直筆)을 할 수 있겠나이까. 역사에 직필이 없어져서 아름다운 일과 나쁜 일을 보여주어 권장하고 경계하는 뜻이 어두워지게 된다면, 그 시대의 군주와 신하가 무엇을 꺼리고 두려워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반성하겠나이까?…(중략)… 또한 전하께서 이를 한 번 보시고 난다면 후세 사람들은 장차 그때 임금께서 친람하셨으니 사신(史臣)이 어찌 감히 사실대로 적었겠는가?라고 말하고야 말 것이니 전하의 성스러운 덕과 큰 업적이 도리어 거짓된 글로 여겨져 신뢰를 얻지 못할까 두렵습니다.’(태조7.6.12).

임금의 실록 열람 결사반대

신개의 상소에 따르면 임금이 실록을 보면 안 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기록자인 사관이 임금을 의식하게 된다. 최고 권력자이자 생사여탈권을 지닌 임금이 기록을 보는 이상 철저히 객관적인 기록을 남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여차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임금에게 비판적이거나 불리한 내용을 기록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둘째, 임금이 한번 실록을 보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관행이 되어 후대 왕들이 답습하게 되고, 임금이 역사기록에 개입할 수 있는 소지를 열어놓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셋째, 후대 사람들은 실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기록의 객관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고자 한 신개의 노력은 앞의 피혐과 마찬가지로 공정하고 도덕적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철저할 정도로 객관성을 준수함으로써 정치가 왜곡되고 변질될 수 있는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48호 (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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