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장치시간을 좀 더 최근으로, 그리고 공간을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옮겨보자.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는 ‘4차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인간 노동력을 대체해 앞으로 5년 간 세계에서 일자리 순감 규모가 500만 개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고용시장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지속적인 실업 증가와 불평등, 소비 감소에 따른 불황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인 6월 15일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을 담은 헌법 개정안에 대한 투표가 있었다. 77%의 반대로 부결됐지만 보편적 복지의 성격인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에 대한 국내외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잠시 부결된 기본소득의 주요 내용을 보자. 정부는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하며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존엄하게 살고 공공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본소득의 액수와 재원 조달 방안은 법률로 정한다. 이런 내용의 기본소득 안이 부결됐지만 그 의의는 여운으로 남아 있다. 투표자 설문조사 응답자의 69%가 기본소득이 재차 스위스에서 국민투표 의제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보편적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국가가 모든 구성원에게 자산 유무, 근로 조건, 가족 구성, 장애 유무를 떠나 개인에게 일정액을 지급하는 소득보장제도다. 소득이나 재산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일을 하려는 의사가 있든 없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기 위한 장치다. 누군가는 일도 하지 않는데 돈을 주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그런 재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이냐며 화를 낼 것 같다.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이 현실화될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들 중 66%는 그 시기를 ‘20년 이내’라고 답변했다. 기술 발전이 지속돼 일자리가 파괴되면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인류의 새로운 삶을 꿈꾸는 이들은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기회를 줄 수 없고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는다면 ‘일자리 창출이 최고의 복지다’는 문제가 언젠가는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이후 인공지능의 일자리 대체 문제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기술이 일자리를 앗아간다는 것이 오류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직업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교육제도와 유연한 노동시장이 답이라며 보편적인 기본소득 논의에 대립각을 세운다.
자유주의 원리에 기반을 둔 사회가 위대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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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캐나다 일부 주에서 기본소득 지급 실험국가 차원의 우려와 달리 기본소득 제도를 지방 차원에서 운영해 성공한 지역이 있다. 미국 알래스카주는 1982년부터 석유 등 천연자원 수출로 번 돈으로 기금을 적립한 후 운용수익을 모든 주민에게 기본소득으로 배당했다. 초기에 1인당 연 300달러 수준이던 배당금은 2008년 2000달러를 넘어섰다. 캐나다의 경우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매니토바주의 일부 지역에서 기본소득제도를 시범 운영해 빈곤 퇴치에 큰 성과를 냈다. 캐나다 온타이로주는 2015년 기본소득 제도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기존 생계지원 제도보다 많은 금액을 저소득층에 지원해 빈곤을 퇴치하자는 것이 골자다.최근에 실시되는 기본소득은 크게 두 부류이다. 하나는 복지 재정의 방만함을 수정하기 위한 우파 정권의 대응이다.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거듭한 핀란드는 2017년부터 무작위로 선정된 1만여 명에게 매달 800유로(월 약 100만원)씩 주는 방안을 실시한 후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될 경우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지급할 계획이다. 스위스와 달리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 실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800유로보다 적을 것으로 예측된다. 핀란드에서 기본소득이 실시되면 일정 규모의 복지프로그램은 줄어들 전망이다. 핀란드 정부는 방만한 복지제도를 축소·정비하고 공무원 수를 줄여 효율적 정부 구축을 위해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고자 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도 2017년부터 19개 지방정부가 기본소득 지급을 실시할 계획이다. 기본소득을 지급 받으면서도 국민들이 정부가 제시하는 일을 할 경우 125 유로의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
자본주의 극복하려는 쪽과 유지하려는 쪽의 절충점한편, 정보기술(IT) 혁명의 근원지인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것은 일자리 파괴적인 기술혁명에 대한 근원적 문제 해결에서 나온 의견이다. IT 전문가들은 왜 기본소득 도입에 동조하나? 로봇·인공지능(AI)·자율주행차 등 첨단기술의 발전이 노동력을 대체하는 상황에서 IT 산업의 영속성을 확보하려면 기능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는 노동시장을 보완하는 기본소득을 고려해야 한다. 에어비앤비·드롭박스에 투자한 세계적인 벤처캐피털 Y콤비네이터는 기본소득 도입에 적극적이다. 임의로 선정한 미국 시민과 저소득층이 기본소득에 어떻게 다른 반응과 태도를 보이는지 비교 연구를 실행한다. 그들은 기술이 점차 전통적인 일자리를 없애고 더 많은 새로운 부를 창출함에 따라 어느 시점에 어떤 형태로든 기본소득을 전국 차원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실리콘밸리 기업 입장에서는 시민의 저항 없는 기술 개발, 개발된 제품의 지속적인 소비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수요자인 시민들의 안정적인 소득체계가 필요하다. 자칫 소득불평등과 실업자 양산이 인공지능 로봇의 파괴로 이어질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노동자들은 인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 소득을 보장받고 러다이트와 같은 극단적 선택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만약 직접세를 폐지하는 베르너의 안을 도입하게 되면 법인세 회피를 위해 그동안 동원했던 각종 기법에 지출한 비용을 절감할 수도 있다. 아마 이것이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기본소득 도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음, 그래도 나라마다 사정에 따라 조세제도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가 기본소득 정착의 핵심이 될 것이다. 기본소득을 제공하면 노동 공급이 줄어들 것이란 예상도 있다. 기본소득에 만족해 일자리를 찾지 않는 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병자나 가사에 바쁜 주부라면 기본소득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일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실현 욕구를 무시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기본소득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쪽과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쪽의 절묘한 절충점에서 각기 다른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실리콘밸리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기 위해 이 제도에 찬성하고 있다. 복지론자의 주장처럼 ‘모두에게 일자리를’이라는 구호가 실현 불가능한 시대로 진입한다면 기본소득은 계속 회자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함부로 성급하게는 판단하지 말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으며 미제스 아래서 경제학을 공부한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다. 하이에크의 광범위한 연구 업적은 경기순환론, 자본의 순수이론, 자유주의 경제이론으로 구분된다. [가격과 생산](1931)에서 화폐적 경기론과 중립적 화폐론을 전개했고, [자본의 순수이론](1941)에서는 경제의 장기적 동향의 결정 요인으로서의 실물적 생산구조의 분석을 강조했다. 사상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입장으로 모든 계획경제에 반대하는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1944), [자유의 구조](1960)를 저술했다. 1974년 화폐와 경제 변동의 연구가 인정돼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조원경- 연세대(경제학과)와 미국 미시간주립대(파이낸스 석사)를 졸업했다. 행시(재경직) 34회 출신으로 재무부·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서 관세, 물가, 복지, 소비자, 국제금융, 통상, 대외경제 분야에서 일했다. 미주개발은행 이사실에서 한국 대표로 근무했다. 현재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관(국장급)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