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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vs 공산권 대리전으로 비롯된 내전사실 콜롬비아는 한때 세계 최대의 마약 생산·유통국가로 악명을 떨쳤으며 냉전이 끝날 무렵 악명의 최고조에 이르렀다. 내전을 틈타 마약 조직이 국토의 상당 부분을 코카인 재배지로 만들고 대량 생산해 세계에 팔았다. 코카인은 커피와 더불어 콜롬비아의 주요 농작물이 됐다. 문제는 고가 마약인 코카인의 상당 부분이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이다. 할리우드 영화 중 어둡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작품에는 콜롬비아산 코카인이 자주 등장하고, 콜롬비아 마약조직 두목이 최악의 악당으로 등장하곤 했다. 잔혹한 조직폭력배를 묘사할 때는 콜롬비아에서 온 마약조직원이 한둘 양념으로 반드시 나왔다. 마약 조직에 살해된 희생자의 가족이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도 단골 소재였다. 콜롬비아 마약조직은 미국의 공적이 됐다. 이에 따라 미국은 자국에 대한 마약 공급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냉전 후에도 콜롬비아에 더욱 깊숙이 개입했다.당시 콜롬비아 마약시장은 드라마 [나르코스]의 배경이 된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1949~1993)가 과점하고 있었다. 콜롬비아 최대 마약조직인 메데인 카르텔의 두목이었던 에스코바르는 미국인의 절반을 마약에 중독시키고 세계 마약시장의 70%를 쥐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그는 미국 마피아들과 손잡고 마약의 생산·유통을 쥐고 흔들었다. 콜롬비아 마약시장의 80%를 손아귀에 넣었다. 전성기 때는 세계 마약시장의 80%를 장악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마약을 고가로 사서 이윤을 붙여 파는 미국 마피아와 달리 에스코바르의 콜롬비아 마약조직은 원료인 코카를 밭에서 재배해 여기서 코카인을 추출했다. 마약 원가가 씨앗 값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윤 폭은 엄청났다. 매주 4억2000만 달러를 번 것으로 전해진다. 들어오는 현금을 묶는 데 필요한 고무줄 구입비로 매달 2500달러를 썼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였다. 그 돈으로 1000명의 개인경호원에 사설군대까지 거느렸다. 집 안에는 개인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돈으로 콜롬비아 정·관계 인사 매수를 시도했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부하를 시켜 정부 청사를 폭파하거나 요인을 암살했으며 심지어 공산 게릴라들에게 돈을 주고 암살이나 법원 공격을 부탁하기도 했다. 마약 카르텔이 내전의 독특한 당사자로 개입한 셈이다. 그는 정부와 협상해 스스로 감옥에 갔지만 안에서도 온갖 향락시설을 다 갖춰놓고 호화생활을 계속했다. 결국 미국이 신병인도를 요구하자 탈옥해 도피 생활을 하다가 미국 마약단속국(DEA)과 콜롬비아 군경 당국의 추적을 받다 사살됐다.
뿌리 깊은 콜롬비아 내부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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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확보되면 경제 성장 가능콜롬비아 국민은 일단 갈등의 봉합보다 정의를 원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콜롬비아의 경제 사정은 간단하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 예상에 따르면 올해 콜롬비아의 국내총생산(GDP)은 명목금액 기준 2741억 달러로 세계 41위다. 싱가포르(2966억 달러)·남아프리카공화국(2803억 달러)·파키스탄(2710억 달러)·핀란드(2391억 달러)·칠레(2349억 달러)와 비슷하다. 인구 4870만인 콜롬비아의 1인당 GDP는 2015년 기준 6060달러로 85위다. 리비아(6276달러)·에콰도르(6196달러)·페루(6167달러)·벨라루스(5749달러)·태국(5742달러)·남아프리카공화국(5727달러)과 비슷하다. 남미의 인구 많고 가난한 나라의 하나다. 2014년 기준 빈곤선 이하 주민이 28.5%에 이른다. 실업률은 8.8%나 된다. 수출은 550억 달러로 석유·커피·석탄·니켈·의류·바나나·생화 등이 주종을 이룬다. 미국(32.3%)·캐나다(16.2%)·유럽연합(14,6%)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웃한 베네수엘라(6.7%)·에콰도르(5.1%)·페루(4.2%)도 주요 대상이다. 같은 해 수입은 568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산업기계·차량 등의 주요 품목이다. 미국(30.6%)·중국(17.9%)·멕시코(6.4%)·브라질(6.4%)이 주요 수입선이다.대서양과 태평양 모두에 면하고 있는데다 고온다습한 해안에다 건조하고 서늘한 고지대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콜롬비아는 평화만 확보하면 추가 경제 성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단 콜롬비아는 가능성만 확인한 채 평화와 번영의 꿈을 당분간 미룰 수밖에 없게 됐다.이런 상황임에도 산토스 대통령이 10월7일 콜롬비아 내전을 종식하기 위한 평화협정을 이끈 공로로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평화협정안은 거부됐지만 지금부터 내부 화해를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콜롬비아 정부와 반군 FARC는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가 나온 지 몇 시간 만에 쿠바 아바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투표에서 나온 반대 목소리를 반영해 평화협정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평화를 달성하고 내전 종식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개혁과 조치를 취하겠다”며 “신속히 해법을 찾고 우려를 이해하기 위해 신속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회 진영의 목소리를 계속 듣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수정안 마련에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산토스 대통령은 노벨상 상금 800만 크로나(약 11억 원)를 내전 희생자들에게 기부했다. 산토스 대통령은 “기부한 상금은 내전 희생자들과 화해를 위한 프로젝트와 프로그램, 재단 등에 쓰일 것”이라며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FARC와 서명한 합의를 이행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산토스는 1938∼42년 콜롬비아 대통령을 지낸 에두아르도 산토스 몬테호와 2002∼2010년 부통령을 지낸 프란시스코 산토스 칼데론을 배출한 콜롬비아의 정치 명문가 출신의 엘리트다. 미국 캔자스대에서 경제학·경영학을 전공하고 영국 런던 정경대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을 마쳤다. 가문이 소유한 콜롬비아 최대 신문 ‘엘티엠포’의 부국장을 지내면서 경력을 쌓은 후 1991∼94년 대외무역부 장관, 2000∼2002년 재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행정능력을 발휘했다.그가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로 부각된 것은 알바로 우리베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국방장관에 발탁되면서다. 우리베 전 대통령은 물러난 후 대표적인 매파 정치인으로서 평화협정 반대운동을 주도해왔다. 우리베의 부친은 FARC에 납치돼 살해됐다. 이 때문에 우리베는 2002∼2010년 대통령 재임 당시 FARC 토벌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그가 국방장관에 임명한 산토스는 국방장관으로서 군사 작전들을 성공하며 공을 쌓았다. 5년 이상 FARC에 납치됐던 정치인과 인질 14명을 빼내오면서 수완을 발휘했다. 2008년에는 이웃 국가 에콰도르에 있는 FARC 기지를 예고 없이 폭격해 FARC 고위 간부를 제거했다. 에콰도르와 외교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산토스는 국민 지지를 얻어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다.
반군 소탕 앞장섰던 산토스, 대통령 당선 후 비둘기파로2010년 대선에 나선 산토스는 역대 최고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후 그는 비둘기파로 돌아섰다. 무력으로 내전을 종식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으로 관측된다. 2012년 정부와 FARC가 비밀 협상에 나섰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리베와 정치적으로 원수가 됐다. 2014년 재선에 나섰을 때는 ‘평화 협상 지속’을 공약으로 내걸고 박빙으로 이겼다. 하지만 FARC와의 평화협정은 박빙으로 부결됐다.노벨평화상 시상식은 이 상의 창설자인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이 자리에서 산토스가 어떤 발언으로 세계 사람과 콜롬비아 국민, 특히 내전 희생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움직일지 주목된다. 분쟁 해결에서 총을 든 세력 간의 평화협정보다 중요한 일은 피해자인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산토스가 반대파를 어떻게 포용하고 설득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