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편청(偏聽)의 비극적 결말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장

안톤 체홉은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러시아의 문호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한 이 작가의 작품에는 ‘러시아적’인 정서가 가득 담겨 있다. 그가 1899년 발표한 [귀여운 여인]이라는 단편이 있다. 필자는 이 소설을 고교 시절에 읽었는데, 그때 느낀 ‘페이소스’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주인공 올렌카는 천성이 너무 착해서인지 어느 한 사람만을 너무 좋아하는 성향이 있어 그 사람 이야기에 자신을 몰입시키는 성향이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유원지 극단을 경영하는 쿠킨을 사랑할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온통 연극 이야기만을, 남편 쿠킨이 죽자 재혼한 목재상 푸스토발로프를 사랑할 때는 온통 목재 이야기만을, 유부남인 수의사 푸스토느이치를 사랑할 때는 온통 동물의 병 이야기만을 늘어놨다. 그리고 그녀를 떠났던 수의사가 한참 후 부인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그 아들인 샤사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이 아이 학업 이야기만을 하면서 속절없이 늙어간다. 이는 편식처럼 가려 듣는 ‘편청(偏聽)’의 비극이다.

강남 사는 어느 여인네 때문에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있다. 이 사람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증거가 여럿 드러나자 사람들은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과 그 주위를 가득 메우며 촛불시위에 나서고 있고 그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대통령이 전문가도 아니며 지적 능력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이 여인의 말에 휘둘렸다는 보도에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국정이 정지되다시피 한 이 상황이 심히 걱정되면서도, 곤경에 빠진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사뭇 ‘듣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몇 년 전부터 우리 기업계에서도 ‘소통’의 중요성이 부각돼왔다. 과연 [혼·창·통]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고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서 이를 주제로 한 최고경영자 과정이 개설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갈수록 경제성장률은 떨어지고 기업의 수익성도 바닥 없이 떨어지는 이 상황에서 경영 부진의 타개책도 외부의 전문 컨설팅 회사가 아니라 내부 조직원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포브스(Forbes)]의 소유주였던 말콤 포브스가 “대화의 예술은 듣는 것에 있다”라고 말했듯이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일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도 “우리가 귀가 두 개고 입이 하나인 것은 더 많이 듣고 더 적게 말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기업계에서도 아직도 상당수 경영자들이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소통의 문화보다는 상명하복의 조직과 문화를 선호한다.

물론 듣는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듣더라고 지켜야 될 원칙이 있다. 먼저 경청(敬聽)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들어야지 ‘마음 속의 마음, 머리 속의 머리’로 들을 수 있지 그렇지 않다면 상대방의 모든 말은 기름 먹인 종이에 붓는 물처럼 하나도 스며들지 못할 것이다. 다음은 편청을 삼가고 ‘광청(廣聽)’해야 한다는 것이다. 측근 한 두 사람 말만 듣고 경영상의 결정을 내려 나쁜 결과로 이어진 사례가 허다하다. 역시 ‘널리 들어야’ 균형되고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요즘 기업계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어려움도 윗분들의 ‘편청’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1363호 (201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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