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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2) | 기생충 제국] 개미가 스스로 먹잇감이 되는 이유? 생태계 막후 실력자 ‘기생충’ 때문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상상을 초월하는 흡충·열원충의 생존 전략... 누군가에게 조정 당한다면 리더의 자격 없어

▎흡충(사진 아래)은 개미의 뇌를 조종해 풀잎 끝에 매달려 풀을 뜯는 소나 양에게 먹히게끔 한다.
개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한다. 하지만 야근은 거의 없다. 해가 뜨면 출근해 먹이를 찾으러 다니다가 해가 지면 퇴근한다. 퇴근한 샐러리맨들이 빌딩 숲을 줄지어 빠져나가듯 개미들도 풀숲 사이로 줄지어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 대열을 이탈해 옆에 있는 풀 줄기로 올라가는 녀석들이 있다. 올라가서는 집게 턱으로 줄기 끝이나 이파리 끝을 꽉 물어 대롱대롱 매달린다. 하루 피로를 스릴 있게 푸는 걸까?

사실 이것은 자살 행위다. 지나가던 소나 양이 풀을 뜯다가 함께 삼켜 버릴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이상한 일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난다. 알다시피 쥐는 고양이 눈에 띄어봐야 좋을 일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든 고양이 눈에 띄려고 하고, 고양이가 나타나면 마치 골리앗에게 다가가는 다윗처럼 대담하고 여유롭게 다가가는 녀석들이 있다. 역시 자살 행위인데 말이다.

개미의 뇌를 조종하는 흡충


간이 웬만큼 붓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이런 행동을 하는 녀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도 모르게 한다는 것과 이걸 조종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조종간을 잡고 있는 존재는 바로 기생충들이다. 아니, 별것 아닌 기생충들이 생명체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고? 그렇다. 녀석들은 생각보다 훨씬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예를 들어 개미가 풀잎 끝에 매달리는 것은 머릿속에 들어앉은 창형흡충 때문이다. 이 기생충들은 마치 스파이처럼 여러 삶을 건너다니며 산다. 3막으로 된 녀석들의 삶은(생물학적 용어로는 ‘생활사’라고 한다) 배고픈 달팽이가 소나 양들의 배설물을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 달팽이 창자 속으로 들어간 알들은 안전하고 따뜻한 그곳에서 부화한 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어느 정도 크면 떼로 허파로 몰려가 ‘난리’를 친다. 견디지 못한 달팽이가 재채기를 하게끔 말이다. 끈적끈적한 액체와 함께 세상으로 튀어나오면 바라던 바다. 그래야 2막을 열어주는 개미들에게 갈 수 있다.

이 덩어리를 발견한 개미들이 기쁜 마음으로 꿀꺽한 후 집으로 가져갈 때 개미의 창자 속으로 들어간 녀석들은 이번에도 여기저기를 유람한다. 그러다 어느 때가 되면 다들 개미의 머리로 간다. 희한한 건 여기 모인 녀석들 중 한두 녀석만 남고 다들 개미의 창자로 가 주머니(포낭) 같은 걸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어떤 녀석(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남는지 모르지만 남는 이유는 명확하다. 특별 임무가 있다. 해가 질 때쯤 집으로 돌아가는 개미의 뇌를 조종해 풀잎 끝에 꽉 매달려 풀을 뜯는 소에게 먹히게끔 한다. 최종 숙주가 소나 양이기에 개미를 희생양 삼아 ‘약속의 땅’으로 가려는 것이다. 소에게 먹히면 소의 간으로 가서 죽을 때까지 영양분을 훔쳐 먹으며 산다. 그렇게 살다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배설물에 실어 밖으로 내보내 달팽이에게 먹히게 한다.

풀잎 끝에 매달려 있는데 소가 먹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대안이 없다면 탁월한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 녀석들은 세상 모든 일이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소기의 목적이 수포로 돌아가면 특별 임무를 띤 녀석(들)은 개미를 깨워 제정신이 들게 한 다음, 집으로 가게 한다. 정상 생활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해가 질 때쯤 다시 조종을 시작해 풀 줄기로 올라가게 한다. 언제까지? 소에게 먹힐 때까지!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 쥐 또한 톡소포자충이라는 기생충에게 조종 당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심리 조절’ 능력을 갖게 됐을까. 앞을 보는 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데 어떻게 이런 ‘정밀한 공포’를 만들어낼까. 지구 생명체 중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인간 중에서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분투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이 ‘별것 아닌’ 기생충들이 만들어내는 물질이 무엇인지, 어떻게 눈도 없는 녀석들이 달팽이에서 개미로, 개미에서 소로 갈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냈는지 아는 게 별로 없다. 녀석들은 수억 년 전부터 활동해오며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축적해왔지만 우리는 기껏해야 30여 년 전쯤부터이 녀석들의 위력을 파악해오고 있을 뿐이다. 창형흡충만 해도 세 곳이나 되는 서식지를 옮겨 다니는데다 그때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얼마 전까지 이 녀석들이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도 몰랐다. 당연히(?) 지금까지 기생충 백신 같은 걸 개발할 수도 없었다(바이러스와 박테리아 백신은 몇 개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녀석들의 생존전략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여서, 그것이 훔쳐 먹는 것만 아니라면 충분히 삶의 교훈이 될 만하다. 지금 말한 심리 조종만 해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우연에 의지하거나 요행에 기대지 않고 적극적으로 되게끔 만들고 있지 않은가?

희생양을 디딤돌 삼는 기생충

또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기 때문에 괴롭지만, 모기 입장에서도 먹고 사는 일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두꺼운 피부를 뚫어야 하고, 혈관을 찾아야 하며, 찾아서 ‘빨대’를 꽂았다 해도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는 순간 한 점 핏자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이뿐인가. 빨대를 꽂는 순간, 혈소판이 몰려와 애써 뚫어놓은 피를 응고시켜 구멍을 막아버린다. 부드럽게 흘러들어와야 할 ‘음료’가 끈적끈적해지면 식사는 힘들어진다. 응고가 되지 않도록 하는 물질을 갖고 있지만 어쨌든 판단과 행동의 신속 정확함에 목숨이 달려있다. 그래서 어렵다 싶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런데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열원충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기생충은 알을 낳는 곳이 모기여서 어떻게든 모기에게 가야 한다. 모기가 사람 피를 빨아야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근데 모기가 포기해버리면 어떨까. 생의 목표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녀석들은 모기가 자신에게 오게끔 최선의 환경을 만든다. 인체의 혈소판 활동을 방해해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모기로 건너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녀석들은 다시 사람에게 건너오기 위해 자신들이 ‘도하’ 준비를 마칠 때까지 가능한 한 사람의 피를 많이 빨지 못하도록 한다. 하는 일이 ‘못된 짓’이기에 그렇지 노력 하나만 보면 가상할 정도다.

녀석들은 이렇듯 자신의 생존을 위해 희생양을 디딤돌로 삼는다. 개미를 풀잎 끝에 매달려 있게 하는 창형흡충처럼 여러 생명체를 건너다니는 녀석들은 특히 중간 숙주를 가차 없이 제물로 바친다. 대신 최종 숙주에는 최소한의 피해만 가게 한다. 숙주가 살아야 자신도 살 수 있고,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간신들이 무수한 국정 농단을 하면서도 왕조를 뒤집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한 번만 이용하고 버려도 되는 숙주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떤 기생벌은 배추벌레의 몸에 알을 낳는데, 알에서 나온 새끼들은 배추벌레의 내장을 먹고 자란다. 그런 다음 배를 뚫고 나와 배추벌레가 깔고 앉은 잎사귀에 번데기를 짓는다. 포식자들에게 들키지 않게끔 말이다. 이때 내장이 다 먹히고 배에 구멍이 숭숭 뚫린 배추벌레가 눈을 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그물을 짠다. 다시 삶을 시작하는 보루를 만드는 걸까. 아니다. 유충들의 방패막이로 최후를 마치려는 것이다. 기생벌이 어떻게 이런 마술을 부리는지는 모르지만 배추벌레는 죽는 순간까지 철저히 이용당한다.

생태계에 막강한 영향력 행사

녀석들이 흔히 쓰는 생존전략 중에는 치고 빠지는 소모전도 있다. 예를 들어 수면병을 일으키는 파동편모충은 곧잘 우리 인체로 진입하는데 우리 면역계도 보통이 아니어서 보통 일주일 안에 소탕 작전을 벌인다. 이때 거의 모든 녀석들이 죽는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소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새로운 녀석들이 나타난다. 이 기생충들은 1만 번에 한 번 정도로, 원래 있던 유전자를 하나 빼낸 후 가지고 있던 수천 개의 예비 유전자 중 하나를 그 자리에 넣어 돌연변이를 만드는데 바로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녀석들이다. 인체 면역계가 특정한 ‘군복’(외피)을 인식, 공격하는 걸 알기에 군복을 바꿔 입고 나타나는 것이다. 면역계가 이 새로운 군복을 알아차려 공격을 개시할 때쯤 되면 녀석들은 그 사이에 또 다른 제3의 군복을 입은 녀석들을 만들어 미친 듯이 분열한다. 소모전이 수백 번씩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지친 면역계가 과도한 흥분 상태가 되어 우리 자신을 공격하면 게임은 끝난다. 환자 사망으로 말이다. 아예 우리 면역계가 인식하지 못하게끔 교묘하게 위장, 은신하는 ‘투명 존재’ 전략도 녀석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우리 주변의 조직 속 기생체들도 똑같이 한다).

뉴질랜드의 생물학자 커티스 리블리의 연구에 의하면 기생충들은 번성한 생명체를 선호한다. 찾기 쉽고 기대 수익이 높기 때문이다. 번성하고 있기에 조용히 스며들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적응력 덕분에 녀석들은 번성 중이다. 포유류가 4000여 종인데 반해 촌충만 해도 5000여 종이 넘고 매년 새로운 종이 밝혀지고 있다. 이뿐인가. 기생하는 말벌은 20만 여종이 넘고, 식물에 기생하는 곤충 역시 수십만 종이다. 지금은 포유류의 시대라고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력 역시 막후 실력자를 방불케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 늪지에 사는 기생충(흡충)은 이곳에 사는 송사리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송사리들에게 춤을 추게 한다. 물속에서 천천히 맴돌다가 갑자기 돌진하게 하고 배를 드러내놓고 헤엄을 치게 한다. 정상적인 송사리들보다 30배나 더 새들의 눈에 띄게 하는 이런 노력 덕분에 최종 숙주인 새들은 먹고 사는 게 편해진다. 그런데 만약 이 송사리에게 구충제를 먹여 이 못된 녀석들을 다 처치해 버리면 어떨까. 송사리는 번성하겠지만 새들은 멸종될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30배나 더 노력해야 살 수 있는 환경을 견뎌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남의 것을 축내는 존재들인데 이들이 없어지면 생태계가 무너지는 이상한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보이지 않는 손이다.

우리 인류은 어떨까. 미국 미시간대의 생물학자 보비 로의 연구에 따르면 기생충이 많은 곳일수록 일부다처제 경향이 강하다. 건강한 남성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수탉의 붉고 멋진 벼슬이 건강함의 상징인 것처럼 이런 곳에서는 덥수룩한 턱수염과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인기다. 오랜 경험 상 이런 남성들이 건강하고 잘 살았기에 생겨난, 알고 보면 기생충이 ‘만든’ 문화다. 이런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리더

기생충은 나쁜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것처럼 적에게서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의 동물행동학자 로빈 던바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언어가 이 기생충 덕분에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영장류는 보통 하루 10~20%의 시간을 털 고르기로 보낸다. 벼룩 같은 기생충들이 하도 못살게 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털 고르기를 해주는 일이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발전했는데 무리 규모가 커지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상대가 너무 많아 다 해줄 수가 없었던 것. 유대감 강화 수단이 없어지면 불안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다시 규모를 줄여야 할까. 이때 등장한 게 언어라는 것이다. 기생충이 진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사실 요즘 과학자들도 이 기생의 역설에서 강력한 동기를 부여받고 있다. 숙주의 면역계를 파악하고 교묘하게 피하는 기생충들의 기술과 물질을 알아내면 자가면역질환 같은 병들을 획기적으로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치료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생물체 같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다시피 기생의 원리는 어디서나 같아서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조용히 성과를 축내거나 모든 걸 무너뜨린다. 알아야 예방할 수 있고 제거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리더의 마음을 조용하고도 집요하게 노리지 않은가?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영양의 일종인 임팔라 무리의 우두머리는 진드기투성이가 되는 일이 많다. 틈만 나면 덤비는 도전자들을 상대하고 포식자들을 경계하다 보니 너무 바빠 ‘내부 관리’에 소홀한 탓이다. 암컷의 6배나 될 때도 있는데, 그깟 진드기쯤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놔두면 우두머리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나날의 연속인데 지속적으로 피를 빼앗기게 되면 조금씩 무기력해지게 되고 그러면 힘 있게 싸울 수 없다. 별것 아닌 내부의 적에 당하는 것이다.

기생충의 조종을 받아 풀잎 끄트머리에 매달린 개미를 개미라고 할 수 있을까? 없다. 고양이에게 겁없이 다가서는 쥐들도 마찬가지다. 그건 살아있는 죽음이다.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으니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장악당해 자기도 모르게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다 “그럴 줄 몰랐다” “나도 속았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리더라고 할 수 없다. 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진 리더는 어쩌다 보니 그럴 수도 있는 일반인이 아니다. 그가 조종 당하는 건 공동체 전체가 조종 당한 것과 같다.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 조종 당했다는 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역시 살아있는 죽음이다.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1375호 (201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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