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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12) | 문극겸과 의종, 명종] 당신 곁에는 간언하는 참모가 있는가?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문극겸 간언 무시한 의종의 비참한 최후 … 보스의 옳은 선택 돕는 게 참모의 의무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충남 공주시에 있는 고간원지에 모셔진 문극겸의 묘(왼쪽)와 문극겸 초상.
1170년(의종24) 8월 30일, 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일대 광풍이 불었다. 평소 자신들에 대한 차별에 불만을 품어왔던 무신(武臣)들이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문신과 환관 등 임금의 측근들이 저지른 만행도 도화선이 되었다. 이날 상장군 정중부와 견룡행수(임금의 경호책임자) 이의방 등은 임금의 출궁을 기회로 거병했는데, “문관의 관(冠)을 쓴 사람은 비록 말단 서리라 할지라도 모두 죽여 씨를 남겨 두지 말라”고 외치며 닥치는 대로 문신들을 도륙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문신과 환관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날 궁궐 한구석에서는 의외의 광경이 벌어진다. 대부분의 문신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다 죽임을 당하는 가운데 “임금께서 내 말을 따랐다면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는가. 잘 드는 칼로 단번에 죽여라”고 일갈한 문신이 있었던 것이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여긴 군사들이 그를 생포해 지휘부로 끌고 가자 정변의 수뇌들도 “공(公)의 명성을 익히 들었다”며 당장 풀어주라고 지시한다. 무신들은 예의로서 그를 대우했는데, 문신이라면 이를 갈던 그들이었지만 이 사람에 대해서 만큼은 존경했던 것이다. 무신정권 초기 많은 문신의 목숨을 구했고 학문이 짧은 무인 집권자들을 대신해 사실상 국정을 총괄했던 문극겸(文克謙, 1122~1189년)의 일화다.

무신들, 문극겸의 올곧음과 기개 높이 평가

문극겸은 의종(재위 1146~1170년) 때 처음 관직에 나섰는데, 재능이 두드러지게 뛰어나거나 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과거시험에도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계속 낙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음서(蔭敍)로 관리가 된 후에도 그는 학업을 그만두지 않았고 마침내 과거에 급제한다. 꾸준한 노력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극겸이 조야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환관 백선연과 궁녀 무비 등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휘두르며 온갖 부정을 자행한 측근들을 탄핵하면서다. 문극겸은 의종이 이들의 잘못을 묵인하는 것을 넘어 조장하고 있다며 하루빨리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의종은 문극겸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크게 진노한다. 의종은 문극겸의 상소를 불살라버리게 하고 그를 지방의 한직으로 좌천시켰다. 더 큰 처벌을 내리고자 했지만 그나마 대신들이 필사적으로 만류한 덕분이었다. 이후 문극겸은 그에게 앙심을 품은 자들의 모함이 더해져 폄직(貶職)을 거듭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풍파도 문극겸의 뜻을 꺾지 못했다. 그는 불의에 침묵하고 권력에 아첨하는 신하들을 향해 “잘난 인재들이여! 낯가죽이 어찌 그리 두꺼운가”라고 꾸짖으며 부패한 권력에 대한 감시를 그만두지 않았다. 무신들은 바로 이러한 문극겸의 올곧음과 기개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무신정변으로 폐위돼 유배를 떠나던 의종도 말 위에서 “짐이 진즉에 문극겸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의 치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고 하는데, 물론 문극겸의 상소 하나로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만 의종이 만약 문극겸의 간언을 계기로 스스로 반성하고 바른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했더라면, 측근들을 단속하고 잘못을 바로잡았더라면,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고 차별을 없앴더라면, 반란을 초래한 요소들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3년 후 의종은 무신정권의 네 번째 집권자가 되는 이의민의 손에 척추가 부러지며 시해당했는데, 그 순간 의종의 후회는 더욱 사무치지 않았을까.

이처럼 간언을 무시한 의종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반면, 간언을 한 문극겸은 조정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무신정권의 첫 번째 집권자 이의방의 추천으로 우승선 겸 어사중승이 돼 정변의 사후 수습을 맡았고, 얼마 후에는 재상 겸 상장군이 되어 국정을 담당했다. 무신들도 그에게 의지하며 자문을 많이 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문극겸과 무신의 협력 관계는 서로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다. 정치와 행정을 맡아 줄 전문가가 필요했던 무신들로서는 명망까지 함께 갖춘 문극겸이 매우 유용한 존재였을 것이다. 문극겸은 이를 활용해 문신들의 안위를 확보하고 무신들을 제어하며 어떻게든 나라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의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명종에게 간언을 아끼지 않은 것도 그래서이다. 한 번은 명종의 측근들이 임금의 장수(長壽)를 축원하는 잔치를 열어 밤늦도록 떠들썩하게 즐기자 문극겸은 “이것이 바로 전 왕이 폐위된 까닭입니다. 어이하여 경계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직언하기도 했다.

명종도 문극겸 간언 외면해 몰락의 길

그렇다면 명종은 문극겸이 올리는 간언을 잘 들어준 임금이었을까. 명종이 문극겸에게 화를 내거나 문극겸을 껄끄럽게 여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문극겸의 말을 잘 수용한 것도 아니었다. 명종은 무인 집권자들의 눈치를 보며 시종일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데, 무신들을 견제하려는 문극겸의 노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종은 임금에게 충성하며 문신과 무신의 균형을 통해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으려던 무신정권의 세 번째 집권자 경대승도 외면했다. 명종은 문극겸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아 ‘오직 근심 걱정만 나날이 깊어지니 / 짧은 생각 옹졸한 지혜를 한꺼번에 끊기 어려워 / 천 갈래 흰 터럭만 상투 끝에 가득하네’라는 내용의 시를 하사했는데, 역시 무력함이 엿보인다. 결국 명종도 문극겸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최충헌에게 폐위됐다.

이상 문극겸의 사례는 ‘간언’을 둘러싼 보스와 참모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무릇 참모가 보스를 잘 보좌한다고 하는 것은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다거나 지시하는 일에 무조건 복종하는 게 아니다. 보스가 보스로서 제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 보스가 올바른 선택을 하고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참모의 의무다. 그런데 이 과정이 평탄하지만은 않다. 보스를 보좌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보스가 듣기 싫은 말을 해야 하고 보스의 지시에 반대하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보스가 이것을 좋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충언일수록 귀에 거슬릴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자칫 보스가 자신에 대한 항명으로 여길 수도 있다.

실제로 보스 중에는 참모의 소중한 고언을 사장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그 참모를 배척하고 처벌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충언을 올린 사람이 무사하지 못하게 되면, 충언을 올릴 사람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옳은 일일지라도 목숨을 걸면서까지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보스 본인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문극겸의 간언을 외면한 의종의 비참한 죽음, 명종의 몰락이 주는 생생한 교훈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78호 (2017.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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