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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7) 세계화와 요소환원주의] 문제는 ‘철학의 빈곤’이었다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woojinb@hanwha.com
김영삼 정부 실패는 ‘세계화, 요소환원주의’ 등 아이디어의 실패... 한계 대기업 수술·치료할 시기에 대증적 처방에 주력

“경제학자들과 정치철학자들의 아이디어는, 그것이 옳거나 그르거나,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디어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가 책 [일반이론]에서 한 말이다. 한국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는 파탄에 이르게 된 요인 역시 아이디어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아이디어는 ‘요소환원주의, 세계화, 세계 일류’였다. 김영삼 정부 이전으로 시야를 넓히면 정경유착에 뿌리를 둔 대마불사라는 생각이 한국 경제의 위험을 키웠다. IMF 사태 이후에도 엉터리 아이디어가 헤게모니를 쥐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행태가 반복됐다. 가장 가까운 시기에 활개친 틀린 아이디어는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였다. 요즘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정체 모를 아이디어가 ‘권좌’를 노리며 배회하고 있다. 한국은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더 비판적인 태도를 갖추고 더욱 치밀하게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1993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신경제 추진회의에서 ‘미래와 세계를 향하여’란 연설을 하고 있다.
#1. [세계화는 나부터], 정부 광고

내레이션: 당신의 경쟁상대는 어느 나라 누구입니까?

주부: 전 독일 주부예요.

디자이너: 이태리 디자이너들입니다.

근로자: 일본 근로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공무원: 전 싱가포르 공무원으로 정했습니다.

농부: 덴마크 농부들입니다.

경찰관: 제 경쟁상대는 영국 경찰입니다.

내레이션: 이제 생각도 행동도 세계인이 될 때입니다.

(공보처가 1994년 12월 말부터 1995년 12월 말까지 1년 동안 5차례에 걸쳐 내보낸 세계화 주제 TV 광고 중 하나)

# 2. [국민 모두가 경쟁 주체], 김영삼 대통령 연설

“우리는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세계와 미래로 나가는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국제경쟁의 주체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다. 국민 모두가 일터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가정과 학교에서 경쟁에 나서야 한다. 기업인은 여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정부는 금리를 내려 안정시키고 지가상승을 억제하며 물류비용이 인하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

(1993.11.8. 제4회 신경제추진회의와 1994년 신년사에서 취합)


정부 광고와 김영삼 전 대통령 연설에 들어간 핵심 논리는 요소환원주의다. 요소환원주의는 전체는 각 부분으로 나뉘며 각 부분을 합하면 전체가 된다는 사유방식을 가리킨다(상자기사 참조).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서 움직이는 조직과 사회에는 요소환원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김영삼 정부 시절, 정부는 이런 기초적인 원리를 알지 못했고,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도 요소환원주의에 매몰돼 최우선 순위 과제가 아닌 일에 헛심을 써댔다.

김영삼 정부는 요소환원주의에 따라 경제를 강하게 하는 방법은 비용을 줄여주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돈을 빌리는 비용, 땅을 사거나 빌리는 비용, 물류에 드는 비용 등 각각의 비용을 낮춰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소비용 경감 대책은 ‘고비용 저효율 구조 개선과 ‘경쟁력 10% 이상 높이기’라는 이름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설령 비용 부담이 가벼워지더라도 팔리지 않을 제품은 시장에서 호응을 받지 못한다. 공급초과 상태인 시장에 특장점이 없는 제품을 내놓아서는 이익을 내기가 불가능하다. 설령 비용이 전보다 줄어 원가가 낮아져도 마찬가지다. 빚을 지고 시작한 새 사업은 적자에 눌리고 기업은 부도 위기에 몰린다.

희한한 것은 비용 부담을 덜어줘 경쟁력을 강화하는 접근이라면 원화 가치도 낮춰서 수출 기업의 가격경쟁력을 보조해주는 접근을 했을 법한데, 김영삼 정부는 이와 정반대로 환율을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정부는 환율을 낮게 유지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대규모로 쌓여 원화 가치에 하락 압력을 줬는데도 이를 저지하고 원화 가치를 높게 잡아둔 것이다. 경쟁력 지원 측면에서도 맞지 않고 거시경제 차원에서도 옳지 않은 이 정책은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시행됐을까. ‘원화 가치 하락에 기대 쉽게 수출하는 데서 벗어나 환율이 불리한 가운데 진정한 경쟁력을 키우도록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당시 한국 경제가 체력을 키우지 않은 채 몸집만 불리면서 중증 대사질환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최악의 처방이었다. 한편 원화 가치를 유지하는 환율 정책의 다른 취지는 물가를 안정시킨다는 것이었다.

조직 경쟁력은 구성원으로 나뉘지 않아: 거시경제 차원의 요소환원주의는 잠시 후 상세하게 살펴보겠다. 조직 단위의 요소환원주의를 먼저 생각해보자. 조직 단위에 적용하는 요소환원주의는 의미상 ‘구성원환원주의’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낫겠다. 한 신문사에서 다음과 같은 경쟁력 강화 방안을 내놓았다고 하자. ‘우리 회사의 모든 기자가 자신의 출입처에서 일등을 하면 우리 신문이 일등이 된다.’ 문제는 모든 기자가 일등에 올라서서 그 자리를 지키기가 힘들고 따라서 위의 방안은 비현실적이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런 경쟁력 강화 방안은 조직의 작동 원리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실효가 없을 수밖에 없다.


▎1995년 1월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추진위원회 위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신문사의 기자들은 한정된 지면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 기사는 기자가 소속된 부서의 데스크와 편집국장 주재 회의, 편집부 등을 거치면서 키워지거나 축소된다. 기사를 독자에게 전달하기까지 취사선택하고 경중을 가리며 검열하는 언론사 내부 직책을 게이트 키퍼라고 한다. 각 단계의 게이트 키퍼의 성향을 논외로 하더라도, 기사는 복잡다단한 사안과 현상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게이트 키퍼의 안목에 따라 커지거나 작아진다. 해당 신문사의 게이트 키퍼 집단의 기사 판단·평가 역량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라면 어떻게 될까. 현장에서 큰 기사를 발제해 송고해도 그 비중만큼 지면에 반영될 확률이 낮을 것이다. 반대로 별 의미가 없는 기사를 크게 편집하는 경우가 잦을 것이다. 특히 방향이 잘못된 기사를 내보낼 위험이 크다. 언론사는 매일 새로운 국면과 사건, 사고, 주장을 다루기 때문에 판단 오류는 체계적으로 반복된다.

인간 조직은 대부분 피라미드 구조로 구성된다. 의사결정 권한이 소수의 간부에게 집중되고 각 간부의 권한이 위로 올라갈수록 커진다.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일수록 피라미드 구조를 더 짜임새 있고 일사불란하게 작동하려고 한다. 기업을 직급에 관계없이 논의를 열어놓고 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경우, 그 기업은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중요한 사안에서 옳은 결정에 도달할지라도 경쟁사에 비해 시일이 너무 오래 걸린 다음이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도 속도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에서 빠른 속도는 돈이고 지체는 손실이라는 측면에서도 결정과 동작이 느린 회사는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 그래서 ‘회사가 성장하려면 직원 각자가 성실하게 노력하고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하는 최고경영자(CEO)는 그 자리에서 일할 자격이 없다. CEO는 ‘회사가 어디로 가야하며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회사를 움직여야 한다. ‘어디’와 ‘무엇’을 정하는 직무를 유기한 채 구성원의 분발만 촉구할 경우 조직은 제자리에 정체된 채로 진동할 뿐이다.

국가적 아이디어는 공동으로 채택된다: 나라의 리더십은 기업의 리더십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작동한다. 기업의 역량과 CEO의 능력은 일 대 일로 대응하며 기업 경쟁력의 상한은 CEO에 의해 그어진다. CEO의 그릇이 작으면 기업은 그 규모를 넘어서 성장하지 못한다. 반면 다양하고 많은 조직이 상호작용하면서 움직이는 나라에는 리더가 많다. 국가 경제의 리더십은, 왕조나 독재국가가 아니라면, 대통령이나 한두 인물이 아니라 각 부문의 리더로 이뤄지는 집단이 행사한다. 이는 요소환원주의, 세계화, 세계 일류 등 김영삼 정부 시기에 한국 경제를 지배한 아이디어가 채택되고 실행된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들 아이디어는 대통령 홀로 주창한 것이 아니라 학계, 공무원, 언론, 기업 등이 함께 받아들여 현실에 접목한 것이었다.


▎요소환원주의에 함몰됐던 세계화 관련 공보처 광고(왼쪽). / 김영삼 정부의 요소환원주의, 세계화, 세계 일류 등 아이디어는 결국 외환위기 사태로 이어졌다.
김영삼 정부는 약한 한국 경제를 더 취약하게 한 세계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게다가 그 과제를 기업, 금융권, 연구소, 학계 등 각 부문 단위로 보여주는 대신 주부, 디자이너, 공무원, 농부, 경찰관 등 개별 구성원 수준으로 환원했다. 이 광고를 기획하고 결정한 공무원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한국 디자이너가 이탈리아 디자이너보다 실력이 뛰어나고 한국 공무원 각자가 싱가포르 공무원보다 일을 잘하면 한국이 세계 일류가 된다고 생각했을까. 한국 제품의 디자인 수준은 개별 디자이너의 역량에 비례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만들어진 시안은 한국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거치며 변형된다. 또 방향이 잘못된 과제라면 공무원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수록 더 나쁜 결과가 나온다.

‘구성의 오류’에도 빠졌다: 거시경제로 돌아가 보자. 김영삼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금리, 지가, 물류비용 등 생산요소 가격을 낮추겠다며 1996년 4월 ‘고비용 저효율 구조 개선’에 나선다. 정부는 이런 대응을 10월에 ‘경쟁력 10% 이상 높이기’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이름을 바꿔 추진한다. 국회와 언론, 각종 단체는 요소비용 경감이라는 정부의 아이디어에 박수를 보냈다. 기업은 고비용 저효율 구조 개선 대책을 당연히 환영했다. 이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업이 요구했고 관철한 것이었다. 경제단체와 경제연구소는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부터 이 구조를 탓했다. 청와대 이석채 경제수석은 경쟁력 10% 이상 높이기를 호소하면서 다음과 같은 행동지침을 예시했다. 에너지·사무용품 절감, 근무시간 중 근무만 하기, 불량률 낮추기, 음식쓰레기 줄이기, 물소비 줄이기, 전기 한 등 끄기, 가까운 거리는 걷고 10부제 이행, 저축 10% 더하기···. 효과가 있을 수 없는 대증요법들이었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 때문에 한국 경제가 어려움에 빠지고 위기를 맞게 됐다는 인식은 외환위기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서둘러 이 구조를 일찌감치 개선했어야 했다면 외환위기를 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당시 한국 경제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는 이전부터 내려온 악조건이었다. 그때 기업이 비용을 낮춰달라고 아우성친 것은 대기업의 수익성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빚을 많이 지고 있던 대기업은 국내외로부터 부채를 잔뜩 더 차입해 성공 가능성이 작은 쪽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적자가 쌓이면서 한계 상황에 몰리는 대기업이 늘어갔다.

그렇다면 1996년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했나? 각 요소비용이 아니라 대기업 전체를 대상으로 놓고 외과적인 수술을 집도하면서 부실한 체질을 개선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1997년 들어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야 실행한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선제적이고 시범적으로 시작했어야 했다. 정부는 일정 기준과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기업부문이 과잉투자 영역으로부터 질서 있게 퇴각하게끔 독려했어야 했다.

각자에게 좋고 모두에게 좋은 것이 전체적으로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현상을 ‘구성의 오류’라고 한다. 김영삼 정부는 요소환원주의에 빠져 기업부문 각자에게 좋고 모두에게 좋은 요소비용 경감 대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모두에게 최악인 상황이 닥쳤다.

요소환원주의는 인간 조직엔 통하지 않아

요소환원주의는 대상을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 각 부분을 파악한 뒤 각 결과를 더하면 자연히 전체의 성질이 나온다는 과학연구의 사상이자 방법론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요소환원주의는 근대 서양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부품이 결합된 기계를 요소환원주의의 방법론을 적용 가능한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조직과 사회에서 전체는 각 구성원이나 부문의 합이 아니다. 조직은 구성원의 역량과 노력의 합이 아니고, 사회는 부문의 역량과 노력의 합이 아니다.

인간 조직과 사회는 여러 구성 요소가 기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고 그 작용의 결과가 또 각 구성 요소에 영향을 주는 복잡계이기 때문이다. 복잡계에서는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더 작을 수도 있지만, 더 크게 되는 일도 가능하다. 조직과 사회에서 전체를 부분의 합보다 크게 키우는 것이 리더십이다.

한편 환원주의는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세계관으로 갈래를 친다. 유전자 환원주의는 인간의 도덕감정까지 포함해 생물의 거의 모든 행동을 유전자에 입력된 정보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설명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라는 인식은 복잡계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복잡계에서는 어느 한 곳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이 그 주변의 다양한 요인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가 합쳐져 더 큰 힘이 되며, 그 힘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큰 사건을 일으킨다. ‘나비 효과’가 대표적인 복잡계 현상으로 예시된다.

1383호 (20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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