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 재정지출 확대와 대규모 통화완화정책 유지...원·엔 환율 10% 하락하면 수출 평균 4.6% 감소
▎원·엔 환율이 10월 22일 일본 중의원 선거 이후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서울 중구 KEB하나은행에서 외환출납관계자가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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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가 다시 탄력을 받으면서 원·엔 환율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 중의원 선거(10월 22일) 직전인 10월 20일 100엔당 1000원선이 깨지며 900원대로 추락한 이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회복은커녕 12월 12일에는 연중 최저치인 962.01원을 기록하는 등 900대에서 고착화하는 모습이다. 원·엔 환율은 12월 들어 한때 950원대까지 밀리기도 했는데, 950원대는 2015년 12월 이후 2년 만이다. 원·엔 환율 하락은 그만큼 원화 가치가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달러당 엔화 가치가 떨어지는 연결성을 지닌다. 실제 일본 외환시장에서 11월 1일 1달러당 114.15엔을 기록한 엔·달러 환율은 같은 달 27일 111.89엔으로 떨어진 이후 12월 들어 112~113엔을 오가고 있다. ‘달러 강, 엔 저’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 수출 기업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 전자·자동차·조선·철강 등 세계 주요 산업 분야를 놓고 우리 기업과 수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 기업으로서는 가격 경쟁력에서 한국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자국 돈인 엔화로 바꾸면 달러 강세 덕분에 추가 수익을 얻을 수 있어 그만큼 가격을 인하할 여력이 생긴다. 수출 업계 관계자는 “일부 분야에서는 여전히 일본 기업이 우리 기업보다 상품성이나 기술력이 앞서는데,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다면 우리 기업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최근의 엔화 약세는 아베노믹스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10월 22일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아베 총리가 이끄는 집권 여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그간 힘이 빠졌던 아베노믹스가 다시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중의선 선거 직전인 10월 20일 집권 여당의 승리가 예측되자 이날 원·엔 환율은 1000원대에서 900원대로 급락했다. 아베노믹스는 재정지출 확대와 대규모 통화완화정책이 주요 골자다. 일본은행(BOJ)도 통화완화정책을 이어갈 태세다. BOJ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는 중의원 선거 직전인 10월 15일 “공격적인 통화완화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집권 여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2018년 4월 임기가 끝나는 구로다 총재가 연임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에 이어 유럽중앙은행(ECB)까지 긴축(緊縮) 기조에 무게를 싣고 있는 반면 일본은 양적완화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당분간 엔화 약세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아베노믹스로 인해 엔저 시대는 최소 2~3년 간 더 지속될 수 있다”면서 “미국의 금리 인상과 맞물린 엔저의 지속은 한국 경제에 상당한 악재”라고 말했다.
일본은행 총재 “양적완화 기조 유지”원·엔 환율이 하락하면 한국 수출에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원·엔 환율이 10% 하락하면 수출은 평균 4.6% 감소한다. 현대경제연구원도 엔화 가치가 원화보다 5% 떨어지면 수출은 1.4% 줄고 성장률은 0.27%포인트 하락한다고 분석했다. 국제무역연구원 심혜정 수석연구위원은 “국내 기업의 대일본 소재부품 수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송금 등의 부담은 즉각적으로 가중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최근 몇 년 간 엔저 시대를 지나면서 국내 기업의 체질이 강화한 만큼 과거처럼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반도체나 일반 전자 소비자 제품이 1990년~2000년대 초반까지는 일본과 경합도가 굉장히 높았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것이다. 전자제품 소비재는 현지공장으로 많이 진출했고, 소재 부품 분야 수입품 가격이 싸지면서 우리나라 수출품의 원가 경쟁력이 더 높은 측면도 있다는 분석이다. 수출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와 비교해 엔저가 우리 수출의 가격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줄었다”라고 말했다.
환율에 민감한 여행 업계는 이중고그렇더라도 엔화 환율 약세가 장기화하면 국내 기업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 이주열 총재도 11월 기자간담회에서 “환율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력은 과거보다는 감소했다”면서도 “원화 절상 추세가 장기화하면 환율의 수출 가격 전가가 확대돼 일본, 중국과 경합도가 높은 업종 중심으로 부정적 영향이 파급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당장 현대차 글로벌 경영연구소는 12월 8일 열린 ‘2018 글로벌 자동차 시장 전망’ 세미나에서 2018년 원·엔 환율을 평균 978원으로 전망하면서 “원·엔 환율 하락으로 2018년 현대·기아차 수출 경쟁력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출 비중이 큰 자동차산업에서 원화 가치가 상승하면 수출하는 차량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익성이 나빠진다. 반대로 일본차는 엔저를 등에 없고 가격 경쟁력과 수익성을 높여가고 있다. 현대차 글로벌경영연구소 이보성 이사는 “엔저가 시작되기 전에는 소나타와 혼다의 세계 시장 가격 차이는 10%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2%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차는 환율에 따른 수익으로 신흥국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 이사는 “도요타 등이 엔저로 인해 10% 이상의 수익률을 냈는데 이를 연구개발과 신흥시장 개척에 투자하면서 신흥국 점유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환율에 민감한 여행 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올 1~9월 한국인 일본 관광객 수는 전년 동기 대비 40.3% 증가한 반면 1~10월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은 전년 대비 0.9% 증가하는 데 그쳤다. 10월 들어 일본인 관광객 수가 급감한 것이다. 엔화 값이 싸진 만큼 여행 경비 부담이 줄자 한국인 관광객은 일본으로, 일본인 관광객은 한국을 피한 영향이다.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인해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한 상황에서 환율에 따른 일본인 관광객마저 줄자 여행수지 적자폭이 커지면서 10월 서비스수지는 통계 집계 이후 37년 만에 최대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0월 서비스수지 적자는 35억3000만 달러다. 직전 사상 최대 서비스수지 적자는 올 1월 33억4000만 달러였다. 적자폭이 1월보다 1억9000만 달러 커진 것이다. 서비스수지 적자가 늘어나면서 경상수지 흑자도 감소했다. 10월 경상수지는 57억2000만 달러 흑자로 68개월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갔지만, 흑자 규모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던 전달(122억9000만 달러)에 비해 절반 이상 줄었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지는 엔저 흐름이 뒤집히기 어려울 것”이라며 “국내 기업의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고 재생에너지 등 차세대 산업 분야 투자에 집중하는 등 엔화 환율 하락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