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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 관계학(36) 정조와 홍국영] 금기인 왕의 역린 건드려 처참한 말로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정조 즉위의 일등공신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왕위 계승에 개입해 몰락 자초

▎사진:gettyimagesbank
중국의 사상가 한비자(韓非子)는 ‘역린(逆鱗)’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용(龍)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을 타고 노닐 수 있는데, 용의 목덜미 아래에 난 거꾸로 된 비늘, 역린을 건들게 되면 용이 그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이와 같은 역린이 있으니 신하는 그 비늘을 건드리지 않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주의 역린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물론 왕마다 달랐겠지만 공통의 것이 하나 있다. 신하가 왕위 계승에 개입하는 것이다. 보위를 이을 승계자를 결정하는 것은 군주의 고유 권한이므로 왕은 철저히 자신의 뜻대로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현재와 미래의 왕권이 직결돼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민감하게 여긴다. 이를 신하가 왈가왈부한다면 군주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신하가 자신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원하는 후계자를 옹립하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리사욕으로 정치를 오염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왕의 권위를 침범하는 반역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번 회에서 소개할 홍국영이다.

정조 즉위 후 각종 요직에 올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은 정조의 핵심 측근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몰락한 인물이다. 시강원의 관리가 되면서 세손이었던 정조와 처음 만난 이래, 그는 타고난 기지와 지략으로 정조를 보위했다. 당시 정조는 정적에게 포위돼 있었고, 이들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돼서는 곤란하다며 정조의 후계자 지위를 위협했다. 세손은 노론과 소론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고, 누가 이조판서를 할 만한지 병조판서를 할 만한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을 알 필요가 없다는, 홍인한의 이른바 ‘삼불가지론(三不可知論)’은 세손의 존재 자체까지 부정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때에 홍국영은 서명선·정민시 등과 더불어 정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정조는 ‘동덕회’를 만들고 매년 같은 날 모임을 가지며 이들을 예우했다). 특히 홍국영의 활약상이 눈부셨는데, 여기에 대해 정조는 “전후좌우가 모두 역적의 무리를 편드는 사람들뿐이었다. 오직 홍국영이 몸과 마음을 바쳐 국본(國本, 왕위계승자)의 안위를 떠받들었다” “과인의 언행을 경계토록 하여 훗날을 도모하게 하였고 은밀하게 감추어진 부분까지 잘 살펴 간악함의 싹을 미리 꺾었다” “적들이 만금의 포상을 걸어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지만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목숨이 위태로우니 내 곁을 떠나라고 타일렀지만 오히려 절개를 더욱 굳건히 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명의록]). 그야말로 정조가 즉위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조의 신임이 홍국영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정조는 보위에 오른 직후 홍국영을 임금의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에 임명했다. 본인이 역점을 두고 개편한 규장각의 실무를 총괄시켰으며,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에 봉해 병권까지 부여했다. 불순한 세력이 대궐을 침범하고 역모가 이어지자,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해 임금의 호위를 맡겼는데 이 때 숙위대장이 된 것도 홍국영이다. 홍국영에게 막강한 권력이 주어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홍국영은 그 무게를 알고 처신에 신중했어야 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에게 부여되는 권력의 크기는 위험의 크기와 비례하는 법이다. 더욱이 신하가 누리는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왕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거두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군주와의 관계 등 제반 요소를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홍국영은 그러지 못했다.

홍국영은 임금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인사와 언론, 병권까지 군국(軍國)의 기무를 장악했다. 임금에게 가는 모든 문서가 자신을 거치도록 했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차례로 숙청했다. 그리하여 정승과 판서들도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으니 “온 세상이 두려워하여 그의 말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였다.”(정조 3년 9월 26일).

그런데 단지 여기까지였다면, 그가 그처럼 순식간에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조도 적절하게 견책하는 선에서, 자신의 칼이자 방패였던 홍국영을 계속 활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국영은 어느 새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있었다. 1778년(정조 2년) 6월 21일, 홍국영의 누이동생이 정조의 후궁이 되어 원빈(元嬪)에 봉해졌다. 누이동생은 1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는데, 홍국영은 정조의 조카(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아들) 이담을 죽은 누이의 양자로 들이고 군호를 ‘완풍군’으로 고쳤다. 완이라는 것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을 가리키고 풍이라는 것은 홍국영 집안의 본관인 풍산을 가리킨다. 자신의 집안을 왕실에 견주고, 자신의 집안사람으로 보위를 잇게 하겠다는 의도가 들어있었다. 더구나 홍국영은 완풍군을 나의 생질이라고 부르며 아끼고 “저사(儲嗣, 왕세자)를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조에게 아직 적자소생이 없는 상황에서 누이동생이 낳은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게 되자 ‘양자’라는 형식을 빌어서라도 후계에 개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홍국영의 행동은 정조의 역린을 건드리게 된다. 임금과 중전이 젊고 건강해 얼마든지 적자를 출산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신하가 감히 후사를 운운하는 것은 참람한 일이다.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임금의 아들이 아닌 이를 세자로 옹립하고자 하였으니,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홍국영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국영은 원빈이 죽은 것이 중전 때문이라며, 제멋대로 중궁전의 궁녀를 잡아들여 고문했다고 한다.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긴 하지만 홍국영이 중전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야사도 있다. 정조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정조는 자신을 지킨 공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인지 홍국영이 자진사퇴 형식으로 물러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정조 3년 9월 28일). 30대 초반에 불과한 그에게 원로대신에게 내리는 최상의 예우인 ‘봉조하(奉朝賀)’의 직함도 하사했다. 그렇지만 홍국영이 “방자하게 대계(大計, 임금의 후계자를 정하는 것)에 개입하려 했다”는 점에서 탄핵이 쏟아졌고, 결국 시골로 쫓겨났다가 1781년(정조 5년) 4월 5일 강릉에서 죽는다. 그리고 5년 후인 1786년(정조 10년)에는 정조의 적장자 문효세자의 죽음에 홍국영의 잔당이 개입했다는 정순대비의 교지에 따라 나라의 역적으로 규정됐다. 왕위승계에 개입하려고 했던 신하의 처참한 말로였다.

사후 역적으로까지 몰려

홍국영의 사례는 아무리 큰 공을 세우고, 보스와 친밀한 참모라고 하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국영의 방종과 전횡이 그의 몰락을 가져온 하나의 이유임에는 분명하지만, 결정타를 날린 것은 그가 후계문제라는 임금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보스가 금기로 여기는 부분을 인지하고 여기에 거리를 두는 것, 참모가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다.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19호 (2018.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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