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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제국의 창업자 故 잉그바르 캄프라드] 볼품 없는 학력에도 혁신경영 역사 쓰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DIY 가구, 고객과 소통하는 전시장 등 소비자 제일주의 기치 내세워 성공

▎1월 28일(현지시간) 스웨덴의 이케아 박물관에서 한 관광객이 잉바르 캄프라드 이케아 창업주의 사진을 찍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조립식 가구를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유통 업체인 이케아(IKEA, 영어권에서는 아이케아로 읽음) 창립자인 잉그바르 캄프라드 고문이 1월 27일 91세로 별세했다. 이케아에 따르면 캄프라드는 이날 고향인 스웨덴 남부 스몰란드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캄프라드는 1926년 스웨덴의 스몰란드에서 태어나 17세인 1943년에 유통 업체인 이케아를 창업했다. AFP통신은 2017년 기준 캄프라드의 재산이 373억 유로(약 48조5000억원)에 이른다고 스위스의 경제 전문지 ‘빌란’을 인용해 보도했다. 캄프라드는 1956년 각 부분과 부품으로 나눠 납작한 상자에 넣어 파는 자가 조립용 가구를 개발해 성공의 기회를 잡았다. 스테판 뢰벤 스웨덴 총리도 애도 성명에서 “캄프라드 고문은 스웨덴 경제계에 많은 업적을 남긴 특별한 인물”이라며 “세계 많은 사람이 집에 가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라고 평가했다.

스웨덴 총리 “많은 사람이 집에 가구 둘 수 있도록 했다”

이케아를 가구 업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가구는 주축일 뿐 다양한 인테리어상품·생활용품 등 1만2000종의 상품을 취급하는 종합 유통 업체다. 이케아는 현재 세계 49개 시장(대만을 국가로 표현하는 기업에 각종 보복을 가하는 중국 등 때문에 ‘국가’ 대신 ‘시장’이라는 용어를 쓴다)에서 412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도 광명과 고양에 매장을 열고 있다. 지난해 세계에서 10억 명이 넘는 고객이 이케아 매장을 방문했다.

1943년 17세의 캄프라드는 실업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7월 28일 상업등기소에 ‘이케아’라는 이름으로 사업체를 등록했다. 자신의 이름인 잉그바르 캄프라드의 이니셜인 I, K와 그가 태어난 엘름타리드 농장의 이니셜인 E, 고향 마을인 아군나리드의 이니셜인 A를 합쳐 이케아(IKEA)로 회사 이름을 지었다. 창업자의 이름과 고향 이니셜을 합성해 기업명을 지은 것이다. 실업학교를 마친 캄프라드는 대도시 예테보리에 있는 2년 과정의 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이케아를 운영했다. 처음에는 시계·스타킹·넥타이·양말 등 잡화를 우편 판매하는 업체로 시작해 취급 상품을 넓혀갔다. 본사는 아버지의 집이었고, 고향 마을과 그가 학교에 다니던 예테보리가 그의 활동 구역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캄프라드는 사회 경험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 근처인 벡시외에 있는 삼림소유자협회 사무소에 취직했다. 캄프라드는 이곳에서 ‘투잡’ 생활을 했다. 협회 사무실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으면서 회사 간부들을 상대로는 개인 장사를 했다. 간부들에게 고가의 시계를 팔기도 하고, 협회에서 사용하는 사무용품을 기존 거래처보다 더 싼값에 공급하기도 했다. 벡시외 지역의 남품업자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하고 가장 싼 값에 공급해주겠다는 업자를 찾아낸 덕분이다. 캄프라드가 이렇게 번 돈이 월급보다 많았다.

세계 49개 시장에서 412개 매장 운영

1947년 캄프라드는 군에 입대해 2년 간 의무 복무를 했다.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1948년 장교 시험에 합격해 장교로 전역해 예비역에 편입됐다. 열심히 군복무를 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군 복무 중 개인적으로 통신판매 사업을 했다. 상관으로부터 근무가 끝난 후에는 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물건을 구입해 이를 게재한 카탈로그를 돌리고 주문을 받으면 우편으로 보내주는 사업이었다. 주택가 지하실에 사무실을 꾸렸다. 그는 동료들이 술 마시러 갈 때는 끼는 법이 없었으며 대신 지하실에서 사업에 몰두했다.

제대한 캄프라드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가며 고향 집의 창고에서 통신판매 일을 계속했다. 사무용품에 더해 화장품, 넥타이, 바늘과 실 등 일상용품까지 팔던 그는 2차 대전 이후 유럽을 뒤흔든 스타일리시한 상품인 나일론 스타킹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당시론 첨단 상품이다. 여러 가지 축하카드·만년필·지갑 등도 취급했으며 값싼 액자는 물론 시계·장신구·벽장식품으로 취급 품목을 늘려갔다. 익숙한 곳에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승부를 건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문을 받고 제품을 포장하는 일을 도왔으며 난독증으로 장부 정리에 어려움을 겪는 캄프라드를 대신해 회계 일도 해줬다. 가족경영이었다. 농장이 곧 물류창고였고, 농장에서 우유를 받아 역까지 오가는 트럭이 배송차량이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일손이 더 필요했던 캄프라드는 기나긴 면접 끝에 1952년 스벤예테 한손이라는 직원을 채용했다. 한손은 엘름타리드 농장으로 이사해 캄프라드와 생활을 함께했다. 그러면서 이케아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의견을 교환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두 가지 결정을 했다. 첫째, 취급 제품을 가구와 생활용품으로 단순화하기로 했다.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세운 것이다. 경쟁이 심하고 이익이 박했던 사무용품은 정리했다. 그가 가구 사업에 집중한 이유는 바로 스웨덴 사회의 변화 때문이었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서민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주택 100만 가구 건설을 추진했다. 주택 건설 붐은 가구 판매를 늘릴 절호의 기회였다. 정부가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에 맞춘 아이템이라면 수요가 크고 안정적일 것이라는 판단에서 캄프라드는 가구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둘째, 제품 전시장을 세우기로 했다. 우편 주문자들에게 제품을 실제로 보여 신뢰를 얻는 게 목적이었다. 고객이 눈으로 보고 믿고 구입하게 한다는 이케아의 전략은 이때부터 나왔다. 그래서 1953년 3월 8일 가구 전시장을 열었다. 고객들이 방문하기 쉽도록 기차역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캄프라드의 외가가 있는 엘름홀트의 제재소를 개조해서 세웠다. 이날은 이케아가 새롭게 재탄생한 날이다. 개장식을 하던 날, 1000명이 넘는 고객이 몰려들었다. 캄프라드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정확하게 읽었던 것이다. 상품을 직접 보고 구매하겠다는 욕구다. 고객의 욕구는 바뀌는데, 당시 유통 업자들은 여전히 공급자 위주의 사고와 행동에 머무르고 있었다.

1950년대는 캄프라드에게 엄청난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스웨덴 경제는 고속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이던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국가와 달리 산업시설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스웨덴은 커다란 반사이익을 얻었다.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공장의 일부를 군수물자 생산으로 돌리면서 생긴 공백을 차지한 것이다. 급속한 경제 발전은 도시화를 촉진했고, 이는 주택난을 불렀다. 스웨덴의 사회민주당 정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대규모 주택 공급정책을 폈다. 이는 1946년부터 스웨덴을 이끈 사회민주당의 타예 에를란데르 총리가 주도한 국가 개조작업의 일부였다. 그 목적은 스웨덴을 복지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의료보험과 연금제도에 육아보조금은 물론, 주거보조금까지 정부가 국민에게 지급하는 스웨덴식 복지제도를 만든 것이다. 처음 ‘국민의 가정’이던 정부 구호는 곧 ‘사회의 가정’으로 확대됐다. 정부가 지원을 해주는 수준을 넘어 스웨덴을 하나의 거대한 사회공동체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특히 산업화한 도시지역으로 대규모 이동한 농촌 인구는 정부가 마련한 자그마한 새 주택에 입주했다. 문제는 그 집을 채울 가구였다. 기존의 가구는 새로 지어진 작은 집에는 지나치게 컸다. 그리고 그들이 구입하기에는 너무 비쌌다. 캄프라드는 이런 변화를 읽고 가구사업에 집중한 것이다. 기회는 발견하는 사람들에게만 가치가 있다. 스웨덴의 사회 변화 속에 그는 창의적이고 신용을 지키는 상인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가구사업의 패러다임 바꿔


▎잉바르 캄프라드의 사망 소식을 다룬 스웨덴 신문들. / 사진:연합뉴스
캄프라드는 가구를 중심으로 제품 전시장을 열기 몇 달 전부터 치밀하게 다른 가구점을 살폈다. 그가 살펴본 다른 가구점은 소비자의 요구를 제대로 맞춰주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스웨덴 가구 업계는 고비용 고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구를 완제품으로 만들어 거대한 가구점에 전시하고 있다가 고객이 주문하면 커다란 트럭을 동원해 비싼 배달비까지 받고 집에 가져가서 설치해주는 식이었다. 가구를 완제품으로 만드는 비용은 기본이었다. 이를 보관하는 거대한 창고, 그리고 전시에 필요한 넓은 매장에 대한 부동산 비용도 추가로 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커다란 가구를 운반하려면 별도의 배달 트럭을 불러야 했다. 자가용 승용차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가구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가구 업계는 소량 판매로도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가구의 값을 더욱 높여 팔았다. 당시 스웨덴에서 가구는 고가 상품으로 분류됐다. 반드시 필요한 사람과 돈이 많은 사람은 필요한 가구를 고루 구입할 수 있었지만, 새롭게 독립하는 젊은 사람은 힘들게 가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결혼을 하는 젊은이들은 가구 마련에 드는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스웨덴의 젊은 부부들은 정부 정책 덕분에 집은 얻었어도 집을 채울 가구는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가구 업계는 소량 고가 판매로 적절한 이윤은 남겼지만, 새로 집을 얻은 젊은 부부를 위한 거대한 시장을 공략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존 방식에 안주했기 때문에 사회 변화라는 거대한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캄프라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러곤 공백으로 방치됐던 이 거대한 시장에 주목했다. 중저가로 적절한 품질을 유지하는 제품의 시장 말이다. 이러한 고객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고자 캄프라드는 원가를 낮춰 좀 더 싼 값에 가구를 파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적의 약점을 나의 장점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캄프라드는 자신이 차린 가구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독특한 영업 전략을 세웠다. 우선, 손님들이 가게에 와서 마음껏 가구를 만지고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쓸 가구를 찬찬히 살펴보고 골라가게 한 것이다. 물론 가구라는 고가 상품을 사려면 와서 열어보고 두드려 본 다음에 사는 건 기본이었다. 하지만 캄프라드는 이를 넘어섰다. 손님들이 아예 두고두고 가구를 구경하며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쉬어가는 공간으로 자신의 점포를 내준 것이다. 이를 위해 손님들에게 차는 물론 식사까지 제공했다. 차는 말린 야생화 엑기스를 꿀에 절인 스웨덴 전통차를 주로 제공했다. 이 차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작용이 일부 있었다. 캄프라드의 가구점은 동네 사랑방이 됐다. 손님이 와서 주인과 대화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매장을 주인과 점원들이 물건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와서 물건을 생각하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가구점을 단순하게 가구를 사고파는 공간이 아닌, 가서 쉬면서 상품에 대해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은 의외의 성과를 가져왔다. 캄프라드는 소비자들의 불만과 바라는 점을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소비자는 보다 싼 제품을 원했다. 하지만 품질은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랐다.

품질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가격을 낮출 수 있을까. 캄프라드는 이 문제를 풀었다. 해답을 얻고 거대한 시장을 차지했다. 해결책의 실마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나왔다. 그것은 고객이 스스로 조립하는 DIY(do it-yourself) 가구였다. 조립 전 가구를 분해해 납작하게 포장해 공간과 물류 비용을 줄였다. 분해한 가구는 납작한 박스에 담을 수 있었다. 고객들은 이 박스를 승용차에 싣고 집에 가져갈 수 있었다. 창고 비용과 운송비용, 매장 면적이 줄어든 덕에 제품 가격을 크게 내릴 수 있었다. 이는 혁신을 넘어 혁명에 가까웠다. 오늘날 이케아의 대명사가 된 DIY 가구 아이디어는 캄프라드가 가구점을 차리고 동네 사랑방으로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왔다. 캄프라드는 점포를 개업한 바로 그해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았다. 실마리는 그의 새 직원이 제공했다.

그는 길리스 룬드그렌이라는 이름의 디자이너였다. 룬드그렌은 캄프라드가 구상을 말로 전하면 그대로 그림으로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이케아의 혁신에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했다. 어느 날 이케아에 납품하는 가구공장에서 받아온 제품 사진을 찍던 그는 촬영 후 대형 탁자를 통째로 다시 박스에 넣으려고 끙끙거리다 해결책을 발견했다. “다리를 각각 떼어내고 그것을 바닥에 담으면 되잖아. 이것 좀 도와줘.” 룬드그렌은 탁자의 다리를 몸체에서 떼어내는 등 구성물을 서로 분리해 납작한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박스 안에 몸체를 넣고 그 위에 분리했던 다리를 눕혀서 얹었다. 그랬더니 다리와 몸체가 분리된 가구는 쉽게 박스 안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원래 통통한 주사위 모양이던 포장 박스가 납작하게 되면서 가구 포장의 부피가 크게 줄었다. 곁에서 가구를 분해해 상자에 담는 것을 도와주던 캄프라드는 무릎을 쳤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캄프라드의 ‘유레카’였다.

품질을 유지하되 가격은 더 낮춰


▎2014년 문을 연 이케아의 국내 1호점인 광명점.
캄프라드는 처음에는 이러한 조립형 포장 가구가 파손도 줄일 수 있다는 점에만 주목했다. 부분으로 나뉜 가구는 파손율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가구의 파손도 막는 것은 물론 포장의 부피를 크게 줄인 덕분에 보관과 운반에 아주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간파했다. 파손율을 줄이는 것은 물론, 배송비도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매장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적다는 이점도 있었다.

“가구를 부품별로 분리해 평평한 박스에 담은 포장가구는 전시 때는 물론이고 운반할 때도 공간을 절약할 수 있잖아. 그러면 굳이 트럭을 동원하지 않아도 자동차에 싣고 갈 수 있잖아. 고객들이 가구창고로 와서 제품을 본 후 분해된 가구가 들어있는 납작한 상자를 자동차에 싣고 갈 수가 있으니 운반비만큼 싸게 팔 수가 있네. 고객들이야 당연히 운반비가 안 드는 가구를 선택할 것이고. 게다가 제조 과정에서 조립 공정을 없애주는 역할도 하잖아. 그만큼 조립공의 임금과 조립비용이 덜 들어가니 더욱 싸게 팔 수 있게 되잖아. 세상에, 품질을 유지하면서 중저가에 가구를 공급할 길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

캄프라드는 납품업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조립식 가구를 납작한 포장에 담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를 바탕으로 캄프라드는 룬드그렌에게 지시해 막스라는 이름의 조립식 탁자를 개발했다. 이케아의 첫 조립식 포장가구다. 두 사람은 그 뒤 함께 다양한 조립식 가구를 구체적으로 개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케아 상품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조립식 가구는 이렇게 탄생했다. 룬드그렌은 그런 캄프라드의 손발이었다. 그는 캄프라드의 아아디어를 도면으로, 그리고 상품으로 구현할 줄 알았다. 둘은 아무리 손재주가 없는 사람도 렌치나 드라이버만 돌리면 쉽게 조립할 수 있는 다양한 조립식 가구를 고안했다.

하지만 이 작은 아이디어는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조립된 가구는 하나만 샘플로 내놓든지, 아예 사진으로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조립 이전 상태의 가구를 부위별로 모아 납작하게 포장해서 가게에 쌓아두고 팔 수 있게 됐다. 한정된 공간에 훨씬 많은 가구 샘플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많은 가구 종류를 고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굳이 토지비용을 들여가며 거대한 매장을 만들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최종 조립은 집에서 손님들이 하도록 했다. 이렇게 판매하면 조립 비용이 들지 않아 그만큼 싼 값에 가구를 팔 수 있겠지만 고객들이 과연 그런 불편함을 받아들일까. 캄프라드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고객은 그렇게 게으르지 않았다. 고객들은 가구 값을 덜 내는 대신 기꺼이 최종 조립을 손수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했다. 같은 품질이라면 싼 값을 택한 것이다. 혁신은 성공을 불렀다.

조립식 포장가구를 채택하면서 완제품을 흠집을 내지 않고 배달하기 위해 필요한 특수 포장도 불필요해졌다. 그전까지 완제품 가구의 배달은 하나의 작전을 방불케 했다. 흠이 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도착한 가구에는 항상 몇 군데 작은 흠집이 나게 마련이어서 가구점에서는 칠을 하기 위한 락카를 든 직원을 보내 흠집을 때워주곤 했다. 모든 것이 다 가구 원가에 전가됐다. 가구가 비쌀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의 하나였다.

캄프라드의 최신 포장가구는 달랐다. 따로 포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손님이 가구 부품이 들어 있는 납작한 박스를 직접 들고 갈 수 있으므로 배달 비용도 절감할 수 있었다. 조립·포장·운반 등 불필요한 비용을 최소화하고 그만큼 원가를 낮춰 품질은 그대로 유지하되 좀 더 싼 값에 가구를 소비자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고비용의 가구 판매업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계기가 됐다. ‘싸게 팔 방법을 찾아라’는 캄프라드의 철칙이 됐다.

캄프라드는 1958년 스웨덴 엘름홀트에 첫 ‘대형’ 가구매장을 세웠다. 7000㎡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1953년 제재소를 개조해 가구를 전시했던 소형 전시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캄프라드는 가장 신뢰하던 한손을 매장 총책임자에 앉혔다. 고객들은 이미 납작하게 포장한 가구를 자동차에 실어 집에 운반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매장은 개장 첫날부터 손님으로 가득 찼다. 카탈로그를 통한 우편 판매와 매장 판매를 병행하면서 캄프라드의 사업은 더욱 커졌다.

캄프라드의 이케아는 스웨덴의 젊은 부부들에게 품질 좋고 값싼 가구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가구는 정부가 새로 공급한 작은 집에 넣기에는 너무 컸다. 캄프라드의 컴팩트한 조립식 가구는 그런 집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이제 캄프라드는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포장가구의 이케아라는 사업 아이템을 창안한 그는 몇 년이 지난 1976년 ‘가구 판매업자의 헌장’을 만들어 그의 경영가치를 정리했다. 상세한 사업 지침이기도 하다. 그는 검소함과 열정을 이케아의 사업 지침으로 내세웠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 있다. ‘우리 물건을 사지 못하거나 사지 않는 사람들에까지 우리 상품을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불가능’이란 말은 우리 사전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달려가자.’ 같은 품질의 제품의 원가를 줄여 싸게, 더욱 싸게 공급한다는 캄프라드의 모토가 여기에 담겨있다. 이 모토는 DIY 가구를 처음 만들 때부터 그가 추구했던 가치다. 추구할 수밖에 없던 가치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다른 가구점과 차별화에 확실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차별화는 성공의 열쇠이기도 했다. 캄프라드가 하면 무엇이든 달랐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캄프라드는 또 다른 원칙을 확립했다. ‘고객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것이다. 이는 캄프라드가 성공에 이른 노하우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그가 이케아를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원동력의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제품 소개 카탈로그에 한 번 표시한 가격은 1년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켰다. 카탈로그를 보고 찾아온 손님에게 적힌 가격보다 올려서 파는 것은 약속 위반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업자들은 흔히 그동안 경기가 나빠졌다거나, 원가가 올랐다든지 하는 이유로 가격을 수시로 바꿨다. 하지만 캄프라드는 1년 간 무슨 일이 있어도 가구 가격을 카탈로그에 적힌 그대로 유지했다.

그의 고집은 1973년 빛을 발했다. 그해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석유파동이 일어나 세계 경제가 대혼란에 빠졌다. 당시 국제유가가 치솟으면서 생산과 배송 비용도 함께 폭등했다. 하지만 캄프라드의 고집과 원칙은 그때도 여전했다. 끝까지 카탈로그와 전단지에 제시했던 가구 가격을 1년 내내 그대로 유지했다. 고객들과의 신용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한 것이다. 그에게 ‘소비자는 언제나 최우선’이었다. 캄프라드의 성공 DNA는 소비자 제일주의였다.

문제는 원가가 폭등한 상태에서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캄프라드는 손해를 다른 방식으로 벌충했다. 판매 사원들에게 이익별 인센티브를 지급한 것이다. 단순히 많이 판다고 인센티브를 더 준 게 아니었다. 인센티브는 매출액이 아닌 이익에 따라 차등 지급했다. 그는 상품의 마진에 따라 가격표에 초록색과 흰색, 그리고 검은색의 표시를 했다. 초록색은 마진이 높은 상품이었고. 흰색은 그저 그런 제품, 그리고 검은색은 팔수록 손해를 보는 가구에 붙였다. 가격표에 초록색 표시가 붙은 고마진 가구를 팔 때 가장 많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기에 직원들은 되도록 그 제품을 고객들에게 권유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다.

중동전쟁으로 원가 폭등해도 카탈로그 가격 그대로


▎지난해 선보인 고양점.
그러면서 캄프라드는 원가 절감에 목숨을 걸었다. 그래야 고객들에게 더욱 싼 값에 가구를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스웨덴에서 하되 제품 제작은 동유럽 등 인건비가 저렴한 곳에 맡겼다. 회사에 절약과 실용의 문화를 정착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직원들은 정장 차림도 하지 않고, 넥타이도 매지 않도록 했다. 절약은 이 회사 직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규정이다. 이는 캄프라드 자신도 마찬가지다. 비행기는 항상 이코노미석을 이용하고, 15년 넘은 낡은 차를 몰고, 옷은 중고품 시장에서 사입고, 식료품은 가게 문을 닫기 직전에 찾아가서 떨이로 파는 걸 구입해서 먹었다. 이케아 매장에 가서 스웨덴 음식인 미트볼을 야생 베리잼에 찍어 먹는 소박한 식사를 즐겼다. 세금을 아끼려고 본사를 스웨덴에서 덴마크를 거쳐 네덜란드로 옮겼다. 하지만 세율에는 불만을 표시했지만 세금은 철저하게 납부해 잡음을 일으키기 않았다. 기부도 아끼지 않고 해왔다. 본인은 스위스에서 살며 휴가만 스웨덴의 고향집에서 보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고향집으로 옮겨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러한 소박한 인간미는 캄프라드의 이미지로 남았다.

1421호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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