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대북 제재로 핵심층까지 불만 소문 … 파격적 남북, 북·미 정상회담 셈법은 복잡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오른쪽)이 2월 12일 방한 후 돌아온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여정 부부장(왼쪽부터) 등 고위급 대표단과 만나 활동 내용을 보고받고 있다. / 사진:조선중앙TV=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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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 간 만남을 위한 시간표가 짜여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사 파견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화답하고, 김 위원장의 ‘비핵화’ 메시지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색하는 순차적 의기투합이 이뤄진 것이다. 그 결과 올 봄 두 개의 정상회담 테이블이 차려지게 됐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그리고 비핵화라는 국제 이슈를 둘러싼 메머드급 논의가 이뤄질 역사적인 이벤트가 거의 동시에 열리는 형국이다. 4월 말 판문점에서 열릴 남북 정상회담은 청와대가 주도하는 준비위원회가 출범하는 등 초읽기에 들어갔다. 북·미 정상회담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5월 중에 김정은과 만날 것”이란 입장을 대미 특사인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통해 지난 3월 8일 밝힌 상태다. 미 행정부의 국무장관 교체 등으로 다소 늦춰질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으나 북·미 양측의 만남을 위한 사전 점검과 준비 작업도 사실상 시작된 셈이라는 게 우리 정부 당국의 설명이다.이 같은 훈풍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북한 김정은은 지난 한 해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와 주변 정세를 뒤흔들었다. 서울 불바다와 미국령 괌 타격을 공언하던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발사체를 쏘아올린 후 “워싱턴을 타격할 핵 공격 능력을 갖추었다”고 겁박했다. 대북 제재에도 아랑곳 않고 막가파식 행태를 보이던 김정은은 지난해 9월 6차 핵 실험까지 벌였다. 11월 말 ICBM급 ‘화성-15형’을 발사하는 데 성공한 김 위원장은 ‘국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기도 했다.이러던 김정은이 새해 들어 급작스레 대화공세를 펼치고 나왔다.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의 개선 의지를 내세우며 평창 겨울올림픽에 선수단과 응원단·예술단 등을 보내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특사로 내려 보내 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3차 남북 정상회담 제안이다. 대북특사로 평양을 다녀온 정의용 안보실장이 백악관에 전달해준 김정은의 대미 메시지도 무척 매력적이다. 김정은 자신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고, 향후 어떠한 핵 또는 미사일 실험도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게 정 실장의 전언이다. 합동 군사훈련이 지속돼야 한다는 한·미 측의 입장을 김정은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정 실장의 얘기도 놀랍지만, 김정은이 북한 체제를 ‘가난한 나라(poor country)’로 칭했다는 건 파격이다. 지난 1월 “적들이 100년을 제재한다고 해도 뚫지 못할 난관이 없다”던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호기는 찾아보기 힘든 변신이다.
김정은 비핵화 메시지에 한반도 훈풍서울과 워싱턴을 향해 각각 정상회담 일정을 띄운 김정은 위원장은 장고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군부대 방문이나 공장 시찰 등 공개 활동을 자제한 채 회담 전략과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모양새다. 북한의 관영 매체들은 정상회담 문제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대남특사로 김정은 친서를 들고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제1부부장이나 고위급 대표단장으로 서울을 다녀간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등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자신들이 가진 패를 철저히 감추면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한국과 미국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는 모습이다.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김정은이 왜 도발 행보를 접고 대화의 장으로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한·미 정보당국과 대북 전문가들이 꼽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북 제재에 따른 위기감이 작용했을 것이란 점이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촘촘한 대북 경제제재 조치와 압박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는 얘기다. 북한은 이에 대해 언급을 않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은 물론 문재인 대통령까지 유엔과 미국 주도의 강력한 대북 압박이 약효를 발휘하기 시작했고, 김정은의 셈법을 바꿔 가고 있는 것이란 평가를 내놓고 있다. 김정은의 북·미 정상회담 제안을 트럼프 대통령이 수락한 이튿날인 3월 9일자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 대북 제재 압박과 트럼프 대통령의 특이한 스타일에 대한 우려 속에 이제 김정은은 한국이 그에게 내민 ‘올리브 가지(branch)’를 갑작스럽게, 또 기꺼이 받으려고 한다”고 전했다. 최진욱 전 통일연구원장은 “김정은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그동안 유엔은 북한이 핵 실험을 처음 감행한 2006년 10월 이후 여러 차례 굵직한 대북 제재 결의를 내놓았다. 하지만 구멍이 적지 않았다. 상징적 규제에 그치거나 중국과 러시아 등 후견 국가나 친북 성향의 국가나 기관·기업이 숨통을 터주었다. 대북 제재 무용론이 나온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통과된 대북 제재 결의 2397호는 대북 석유정제품 수출 제한을 강화하는 등 북한 무역의 90%를 차단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3월 12일 정의용 특사와 만찬을 함께 한 자리에서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2397호가 나온 후 북한에 한계점이 왔다고 판단했다”고 언급했을 정도다. 여기에 미국이 돈줄 차단을 겨냥한 대북 거래 금융망 단독 제재 조치까지 취하면서 북한은 적지 않은 압박을 느꼈다. 공해상에서 선박을 맞대놓고 유류나 기타 물자를 옮겨 싣는 방식의 은밀한 거래도 미국과 일본의 정보 감시망에 포착돼 차단됐다. 정부 당국은 해상 차단 수준의 물샐틈 없는 대북 제재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대북 제재의 효과보다는 핵 개발과 미사일 시험 발사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자신감 때문에 대화 국면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는 관측도 있다. 북한의 핵 능력과 외교적 협상 쪽에 초점을 맞춰 김정은의 태도 변화를 분석하려는 시각이다. 6차례의 핵 실험을 통해 북한이 이미 수소탄까지 과시한 데다,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HEU) 등 다양한 방식의 핵 개발 프로그램에서 완성 단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얘기다. 헌법에 ‘핵 보유국’을 명시하고 김정은의 ‘국가 핵 무력 완성’ 선언까지 이뤄졌다는 점에서 대화 테이블에 나설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란 분석이다.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등 핵 보유국 5개 국가에 이어 잠재적이고 사실상의 보유국으로 인정받는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에 이어 9번째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겠다는 야망이다.
‘핵 개발 프로그램 완성에 자신감 얻어’ 분석도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정은이 언급했다는 ‘비핵화’가 쉽지 않은 숙제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트럼프에게 ‘비핵화’라는 달콤한 유인책을 던진 후 막상 회담 테이블에 앉으면 핵 보유국으로서의 지위 인정을 주장하며 핵 군축 회담으로 이끌어가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비핵화를 언급하면서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전제 조건을 붙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 핵 문제가 ‘비핵화’라는 말처럼 한순간에 해결될 거였다면 30년 가까이 끌었겠느냐”며 치밀한 준비와 차분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여동생 김여정의 ‘남조선 리포트’에 자극받았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김여정은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석차 평창과 서울에 2박3일 간 머물렀다. 화려한 개막식 행사와 서울 시내 방문, 청와대 특사 예방 등을 통해 남한 사회의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도도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 고개를 어색할 정도로 치켜세운 그녀였지만, 카메라에 클로즈업 된 표정에서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이 드러났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발전상에 대한 놀라움과 호기심도 엿보였다. 김여정은 다른 특사와 처지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 평양 귀환 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남한 모습을 김정은에게 보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대북부처 당국자는 “김여정이 남한에서 보고 듣고 한 사항을 빠짐없이 오빠에게 전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보고서에는 평창올림픽 개막식의 수준 높은 이벤트와 경기장 시설은 물론 관련 인사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담겼을 것이란 얘기다. “직접 남조선 가보니 장난이 아니더라”며 “오빠, 우리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라는 말도 허심탄회하게 던졌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김정은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Big picture)’이 무엇일까 하는 점도 궁금한 대목이다. 거의 동시에 서울과 워싱턴을 상대로 두 개의 커다란 체스판을 준비하는 건 뭔가 새로운 차원의 청사진이 있기 때문이란 진단이다. 과거처럼 미국과 대화하며 한국을 상대 않던 통미봉남(通美封南) 같은 전술은 낡은 방식이 됐다. 올 김정은 신년사는 평창올림픽 참가 등 남북 교류를 강조하면서, 미국과는 핵 단추 운운하며 각을 세웠다. 하지만 정작 대화국면에 접어들자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정상회담 카드를 빼내들었고, 정의용 실장을 북·미 정상이 메신저로 활용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문제는 북한 김정은이 언급한 ‘비핵화’가 정상회담 테이블 의제로 다뤄져 논의의 진전이나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지 하는 점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비핵화가 선대 수령(김일성과 김정일)의 유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이른바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은 2016년 7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비핵화를 위한 5대 조건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여기에는 남한 내 미국의 핵무기 공개와 함께 ▶미국의 핵 타격 수단을 한반도에 전개하지 않는다는 보장 ▶남한 내 핵무기 및 기지 철폐와 검증 ▶북한에 대한 핵 불사용 확약 ▶핵 사용권을 가진 주한미군 철수 선포 등이 담겨 있다. 북핵이 이슈가 된 마당에 있지도 않은 ‘남조선 핵 무기’를 내세워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CVID)’는 북한이 당장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건 핵이나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김정은이 핵을 내려놓을지는 불투명하다. 북한은 대북 제재의 해제와 함께 평양·워싱턴 무역대표부와 연락사무소 상호 개설, 대사급 외교 관계 설정 등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결국 비핵화에 대해 원론적 합의에 도달한다 해도 ‘행동 대 행동’의 단계별 이행 차원으로 들어가면 지난(至難)한 과정이 되풀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북한의 합의 파기 전례에 미 관료 각오 만만찮아이런 비관적 전망이 나오는 건 북한의 합의 파기 전례 때문이다. 미국은 1993년 봄 북한 1차 핵 위기가 터지자 대북 협상을 서둘렀다. 이듬해 10월 제네바 기본합의(Agreed Framework)에 따라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 2기를 지어주기로 합의했다. 핵 프로그램 동결에 대한 보상 차원이지만 북한은 합의 파기와 도발을 계속했다. 결국 경수로는 70% 수준의 공정에서 파국을 맞았고, 2006년 10월 북한은 첫 핵 실험을 감행했다. 이런 경험을 한 미국 행정부의 관료들은 ‘같은 말(馬)을 두 번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핵과 미사일 카드를 절묘하게 조합한 평양의 상술에 번번이 넘어갔다. 다른 말이거나 당나귀인 줄 알았는데 결국 같은 말이었던 셈이다. 2000년 가을 북·미 관계에 훈풍이 불어 닥쳤을 때도 ‘평양에 성조기가 걸릴 것’이란 기대가 쏟아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인 조명록 총정치국장은 그해 10월 10일 백악관을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다. 공동성명에는 ‘모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란 북한의 약속이 담겼다. 답방차 평양을 찾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김정일은 학생 10만 명을 동원한 카드섹션을 보여줬다. 미사일 발사 장면이 등장하자 김정일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인공위성 발사가 될 것”이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날 밤이 마지막이라던 매스게임 속의 미사일은 워싱턴을 넘보는 괴물로 다가왔다.
경제·핵 병진노선 약속 6년 가까이 못 지켜이런 패착 때문인지 김정은과의 담판에 임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료들의 각오가 만만치 않다.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은 3월 12일(현지시간)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비핵화를 향한 북한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실질적 진전이 있을 때까지 ‘최대한 압박’을 계속할 것”이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정은이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과 각각 정상회담을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쉽게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걷히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과거처럼 협상 테이블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보상을 받고, 단계별 이행마다 중유와 쌀 등을 챙기던 방식의 협상은 더 이상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김정은 위원장은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듬해 3월에는 핵 개발 덕으로 국방비를 민생에 돌릴 수 있게 됐다며 경제·핵 병진노선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약속은 6년 가깝도록 지켜지지 않고, 핵과 미사일 도발로 자초한 대북 제재는 주민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고 있다. 장마당에서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일반 주민은 물론 엘리트 관료와 핵심층에까지 불만이 번지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 나온다. 자칫 체제위기로 번질 공산도 있다는 점에서 숨통이 트일 조치가 절실하다. 이런 내부 사정만 봐도 정상회담 테이블에 앉게 될 김정은의 셈법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핵과 미사일 도발카드로 한반도 긴장을 최고 위험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는 이제 ‘비핵화’라는 키워드로 체스판을 다시 한번 흔들려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김정은의 편이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