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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배터리 게이트’ 한국 소송은 지금] 소비자 피해 외면하고 책임 회피로 일관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원고인단 6만4000명 손해배상 소송 예정 … 피고 애플코리아 “본사 책임과 무관” 입장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문을 연 ‘애플스토어’에 몰린 소비자들. 애플코리아는 정작 소비자 권익 보호엔 뒷전인 채 책임 회피에만 급급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애플 ‘배터리 게이트’ 후폭풍이 일파만파 확대되고 있다. 국내에선 단일 사건 사상 최대 규모의 소송전으로 확산됐다. 3월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애플 ‘아이폰’의 배터리 게이트 관련 소송을 위임하는 법무법인 한누리가 이날 위임 절차를 마감, 총 6만3879명이 원고인단으로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누리의 조계창 변호사는 “2014년 당시 KB국민카드·NH농협카드·롯데카드 등 신용카드 3사의 개인정보 유출 관련 손해배상 소송 원고인단이 약 5만5000명으로, 이번 소송은 이를 넘어선 단일 사건 사상 최대 규모의 원고인단으로 진행될 것”이라며 “증거 검토 후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애플 본사와 애플코리아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애초 이번 소송전엔 약 40만 명이나 참여를 신청했지만 증빙 자료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이들 중 상당수가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 해도 이미 역대 최다 원고인단이다. 한누리는 애플 본사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집단 소송 방식으로 제소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미국 법원이 한국 소비자를 위한 집단소송을 인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판단 하에 국내 소송 진행을 결정했다. 애플이 아이폰 성능을 떨어뜨리는 업데이트를 시행해 소비자들의 손해를 유발한 것은 국내 민법상 채무불이행과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업데이트 부작용을 알고 있었음에도 알리지 않은 것은 소비자기본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취지다. 이번 소송전의 총 손해배상 청구액은 약 127억7000만원. 원고 1인당 20만원씩이다. 한누리는 소송 과정에서 추가 피해 사실이 밝혀지면 더 많은 금액의 손해배상을 요구할 방침이다.

단일 사건으로 사상 최대 규모 원고인단

앞서 애플은 2016년 12월부터 아이폰 운영체제(iOS) 업데이트를 통해 배터리 잔량이 적은 상태이거나 낮은 온도일 때 고의로 공지 없이 구형 아이폰의 운영 속도를 떨어뜨렸다. 애플의 배터리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각종 외신과 온라인을 통해 논란이 확산되자, 애플 본사는 지난해 12월 이런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팀 쿡 최고경영자(CEO)가 공식 사과했다. 이후 애플은 글로벌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배터리 교체 지원에 나선 바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반발은 애플 측 예상보다 훨씬 거셌다.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 애플 측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 제기가 잇따랐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분위기였던 가운데 결국 최대 규모 소송전까지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애플코리아 측은 애플 본사와 역할이 다르므로 법적 책임이 없다며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하고 있다. 시민단체 소비자 주권시민회의 역시 지난 1월 아이폰 사용자 122명을 대리해 애플 본사와 애플코리아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 쿡 CEO와 다니엘 디시코 애플코리아 대표는 형사고발한 바 있다. 그러나 애플코리아는 최근 답변서에서 “원고의 청구원인 사실을 모두 부인한다”며 “손해배상 청구가 기각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원고는 애플코리아와 ‘애플컴퓨터(본사)’를 구분하지 않은 채 막연히 피고의 행위 일체가 원고에 대한 채무불이행 또는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원고가 제출한 증거도 애플코리아의 책임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덧붙였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는 3월 8일 원고인단 401명을 대리해서 2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애플코리아의 입장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나는 아이폰 제조·생산에서 생기는 문제를 총괄적으로 책임지는 본사와 달리, 국내 판매 주체일 뿐인 사업구조상 배터리 게이트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애플코리아가 법적으로 본사와 독립된 ‘유한회사’인 관계로 자연히 본사 책임과는 무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주식회사인 본사와 달리 애플코리아는 사원들이 회사에 대해 출자금액을 한도로 책임을 지되, 회사 채권자에 대해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유한회사다. 1998년 11월 법인 설립 당시만 해도 주식회사로 들어왔던 애플코리아는 2009년 8월 유한회사로 전환했다.

유한회사는 법적으로 재무제표 등의 경영 정보를 공시할 필요가 없는 등 각종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데다, 설립부터 해산까지 자유로워 경영상 리스크가 발생하더라도 어려움 없이 책임 회피가 가능하다는 논란에 휩싸여왔다. 지난해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오는 11월부터 바뀐 외감법이 전면 시행될 예정이지만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다. 최민식 상명대 교수는 “법 개정으로 앞으로는 유한회사도 외부감사를 받게 됐지만, 법 적용 대상이 제한적이라서 (법망에서) 교묘히 빠져나가는 유한회사가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애플코리아가 언제까지 소비자 권익 보호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느냐는 비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애플코리아는 그동안 제품이나 서비스 관련 논란이 국내에서 불거질 때마다 “책임질 일이 아니니 대응할 일도 없다”는 ‘무(無)대응’ 전략으로 일관해 눈총을 샀다. 오히려 국내 산업구조상 휴대전화를 대리 판매하고 있는 이동통신사들에 각종 책임을 대부분 떠넘기는 태도로 비판 대상이 됐다. 이통사로부터 판매 수수료를 챙기지만 고객 응대나 기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의 애프터서비스(A/S) 같은 책임은 지지 않는 방침을 고수해왔다. 정준호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소비자법률센터위원장은 “애플코리아가 본사와 선을 긋고 책임 회피에만 나선 성의 없는 태도로 국내 다수 소비자들이 보였던 신뢰를 저버리고 있다”며 “잘못을 솔직하게 사과하고 실질적인 피해 구제에 나서야만 떨어진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정부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애플코리아에 대한 실태 조사와 행정 제재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한다. 국회가 집단소송법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입법에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아직 집단소송법을 도입하지 않아서 개별 피해액수가 작아도 다수의 피해가 우려되는 소비자 분야에서 피해자들이 적은 비용에 피해 구제를 받기가 어려운 상태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민사재판에서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손해배상을 부과하도록 조치하는 제도다.

미국에선 관련 소송 60건 넘게 진행 중

한편 애플의 본고장인 미국에선 한국에서보다 파장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최근 현지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맥루머스는 배터리 게이트와 관련해서 진행 중인 소송이 미국 내에서만 60건을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애플이 미국에서 구형 아이폰의 배터리 교체 비용을 기존 79달러에서 29달러로 낮추고 성난 소비자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프랑스와 이스라엘 등 5개국에서도 관련 소송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런 직접적인 소송 외에, 실적 악화 가능성도 애플이 배터리 게이트를 계기로 더 깊이 고민하게 된 대목이다. 미국 바클레이즈증권은 연초 한 보고서에서 “배터리 교체비용 인하로 애플의 올해 아이폰 판매량이 약 1600만대 줄어들 수 있다”며 “매출 손실이 102억9000만 달러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기존 아이폰 사용자 5억1900만명의 10%가 배터리 교체를 택할 경우 이들 중 30%가 올해 신형 아이폰을 사지 않는다고 가정해서 나온 추정치다.

1425호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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